카테고리 없음

石敬瑭의 쿠데타 4/霜降節 仲候草木黃落 2日(陰9/24)庚戌

solpee 2021. 10. 28. 15:25

《後晉紀1 高祖 天福 元年》〈丙申, 936年〉

 

 ㉖. 겨울, 10월 7일에 조서를 내려서 천하의 장리 글고 백성들 사이에 있는 말을 대대적으로 모았고 또 백성들을 징발하여 병사로 삼았는데, 매 7호마다 征夫(정부:정벌참여자) 한 사람씩을 내게 하고 스스로 갑옷과 병장기를 갖추도록 하였는데, 이를 '義軍'이라 하였고, 기한을 정하여 11월까지 모두 집합하게 하였으며, 진주 자사 낭만금에게 며영하여 싸우고 진을 치는 방법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장연랑의 끼를 사용한 것이었다.

 ㉖. 冬,十月,壬戌,詔大括天下將吏及民間馬;〈將,即亮翻。〉又發民為兵,每七戶出征夫一人,〈考異曰:薛史云十戶。今從廢帝實錄。〉自備鎧仗,謂之「義軍」,期以十一月俱集,命陳州刺史郎萬金教以戰陳,〈郎萬金,當時勇將也。〉用張延朗之謀也。

 

 무릇 말 2천여 필과 정부 5천 명을 얻었으나 실제로 사용하는데는 이익이 없었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크게 어지러워졌다.

 凡得馬二千餘匹,征夫五千人,實無益於用,而民間大擾。

 

 

 ㉗. 애초에, 조덕균이 은밀히 두 마음을 길러서 어지러움을 이용하여 중원을 빼앗으려고 스스로 진안채를 구원하겠다고 요청하였는데, 황제가 명령하여 飛狐(비호: 太行8陘 중 6 번째)에서 거란의 뒤를 밟아서 그들의 부락을 노략질하게 하니, 조덕균이 은안거란직 3천 기를 거느리고 토문로(하북 녹천)에서 서쪽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자,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㉗. 初,趙德鈞陰蓄異志,欲因亂取中原,〈趙德鈞之志圖非望,亦見潞王得之之易也。〉自請救晉安寨;唐主命自飛狐踵契丹後,鈔其部落,〈鈔,楚交翻。〉德鈞請將銀鞍契丹直三千騎,〈趙德鈞在幽州,以契丹來降之驍勇者置銀鞍契丹直。〉由土門路西入,帝許之。

 

 조주자사· 북면행영도지휘사인 유재명이 먼저 군사를 거느리고 역주를 지켰는데 조덕균이 역주를 지나면서 유재명에게 명령하여 그의 무리를 데리고 스스로 따르게 하였다. 유재명은 유주 사람이다.

 趙州刺史、北面行營都指揮使劉在明先將兵戍易州,德鈞過易州,命在明以其眾自隨。在明,幽州人也。

 

 조덕균이 진주에 도착하자 동온기를 영초토부사로 삼고 맞이하여 더불어 갔으며, 또 표문을 올려 군사가 적으니 반드시 택로군사와 합쳐야 한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오아곡(吳兒谷:하북 섭현과 산서 여성 사이 협로)에서 노주로 향하였고, 18일에 난류(산서 심양)에 도착하였다.

 德鈞至鎮州,以董溫琪領招討副使,邀與偕行,〈董溫琪時 鎮鎮州。〉又表稱兵少,須合澤潞兵;乃自吳兒谷趣潞州,〈吳兒谷在潞州黎城東北,涉縣西南。〉癸酉,至亂柳。

 

 당시에 범연광은 조서를 받고 부병 2만을 거느리고 요주에 주둔하고 있자 조덕균은 또 위박군과 더불어 합치게 해달라고 요청하니, 범연광은 조덕균이 여러 부대를 합치려는 것을 알았지만 의향을 헤아리기 어려워서 표문을 올려 위박의 군대가 이미 적의 경계로 들어갔으므로 남쪽으로 수백 리를 가서 조덕균과 합칠 수 없다고 말하자 마침내 중지하였다.

 時范延光受詔將部兵二萬屯遼州,德鈞又請與魏 博軍合;延光知德鈞合諸軍,志趣難測,表稱魏博兵已入賊境,無容南行數百里與德鈞合,乃止。

 

 ㉜. 거란황제가 석경당에게 말하였다.

 "내가 삼천리를 어려움을 당하는 곳에 왔으니 반드시 성공할 것이오. 그대의 그릇됨고 자태, 식견과 도량을 보니 진정 중원의 주인이오. 나는 그대를 세워서 천자를 삼으려 하오."

 ㉜. 契丹主謂石敬瑭曰:「吾三千里赴難,〈難,乃旦翻。〉必有成功。觀汝器貌識量,真中原之主也。〈契丹主初來赴難,石敬瑭出見之於晉陽北門,此時固得之眉睫間矣。及圍晉安,軍中旦暮見,審之既熟,然後發此言。然味其言,不徒取其氣貌,又取其識量,則其所謂觀者必有異乎常人之觀矣。〉吾欲立汝為天子。」

 

 석경당이 사양한 것이 네 번을 헤아렸으나 장리들이 다시 오르기를 권하자 마침내 이를 허락하였다.

 *이로써 後晉의 황제는 거란황제의 아들로써 중국황제에 등극하였으며 사마광마저 이를 황제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아마 송의 정통성을 찾으려다 이런 우를 범했을 것!

 敬瑭亂讓者數四,將吏復勸進,乃許之。〈復,扶又翻。〉

 

 거란황제는 책서를 작성하고 석경당을 명하여 大晉황제로 삼고, 스스로 의관을 벗어 그에게 주고, 유림에다가 단을 쌓고서 이날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이후의 중국황제는 모두가 거란황제가 임명한 황제가 아닐까?

 契丹主作冊書,命敬瑭為大晉皇帝,自解衣冠授之,〈石敬瑭蓋以北服即位。〉築壇於柳林,是日,即皇帝位。〈考異曰:廢帝實錄:「閏月丁卯,胡立石諱為天子於柳林,」誤也,今從晉高祖實錄、薛史契丹冊文。...下略...

 

 ㉟. 진안채가 포위된 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 고행주와 부언정이 자주 기병을 이끌고 나가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공로를 세우지 못하였다.

 꼴과 양식이 모두 떨어지자 감나무를 깎고 분을 일어서 말에게 먹였으며, 말들이 서로 잡아막어서 꼬리와 말갈기가 모두 벗겨지니, 죽으면 장수와 사졸들이 그것을 나누어 먹었는데, 구원병은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㉟. 晉安寨被圍數月,〈是年九月晉安寨被圍。被,皮義翻。〉高行周、符彥卿數引騎兵出戰,〈數,所角翻。〉眾寡不敵,皆無功。芻糧俱竭,削窃淘糞以飼馬,馬相啗,尾鬣皆禿,〈窃,方肺翻,斫木札也。木札已薄,更削之使薄,使馬可啗。淘糞者,淘馬糞中草筋,復以飼馬。飼,祥吏翻。啗,徒濫翻。禿,他谷翻。〉死則將士分食之,援兵竟不至。

 

 장경달은 성격은 강직하여 당시 그를 '張生鐵(장생철)'이라 하였고, 양광원과 안심기가 장경달에게 거란에 항복할 것을 권고하니, 장경달이 말하였다.

 "나는 명종과 지금의 황상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원수가 되어 군대를 패배시켰으니 그 죄가 이미 큰데 하물며 적에게 항복하겠는가? 지금 구원병이 조만간 도착할 것이니 또 마땅히 그들을 기다려야 하오.

 필시 만약 힘이 다 떨어지고 기세도 다하면 여러 군대에서 나의 목을 베어 그것을 들고나가서 항복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찾아보아도 아직은 늦지 않소."

 張敬達性剛,時謂之「張生鐵」,〈歐史曰:張敬達小字生鐵。〉楊光遠、安審琦勸敬達降於契丹,敬達曰:「吾受明宗及今上厚恩,〈歐史:張敬達,明宗時為河東馬步軍都指揮使,領欽州刺史,屢遷彰國、大同節度使,徙鎮武信、晉昌,故敬達自謂受厚恩也。然明宗置武信軍於遂州,尋為孟知祥所陷,張敬達未嘗往鎮。晉得中國,始改長安為晉昌軍,歐亦考之未詳也。通鑑前書敬達自建雄節度代敬瑭;建雄軍晉州也,歐史誤以為晉昌耳。又不知武信緣何而誤。降,戶江翻。〉為元帥而敗軍,其啡已大,況降敵乎!今援兵旦暮至,且當俟之。必若力盡勢窮,則諸軍斬我首,〈軍,當作君。〉攜之出降,自求多福,未為晚也。」〈史言張敬達之志節。〉

 

 양광원은 안심기에게 눈짓하며 장경달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안심기가 차마 아직은 못하였다. 고행주는 양광원이 장경달을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항상 장사를 이끌며 기병을 뒤따르며 그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장경달이 그 연유를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고행주가 매번 나의 뒤를 밟는데 무슨 뜻인가?"

 고행주는 마침내 감히 그의 뒤를 따라다니지 못하였다.

 光遠目審琦欲殺敬達,審琦未忍。高行周知光遠欲圖敬達,常引壯騎尾而衛之,敬達不知其故,謂人曰:「行周每踵余後,何意也﹖」行周乃不敢隨之。

 

 제장들이 매일 아침마다 초토사의 군영에 집합하였는데, 9일에 고행주와 부언경이 아직 도착하지 않자 양광원이 그가 대비함이 없는 것을 타고서 장경달의 목을 베고 제장들을 인솔하고 표문을 올려 거란에게 항복하였다.

 거란황제는 평소 제장들의 명성을 들은 터라 모두에게 위로해주고 갓옷과 모자를 내리고 이어서 그들을 희롱하며 말하였다.

 "너희들도 역시 '大惡漢(한족을 낮춰부르는 말)'이니 소금과 식초 1만 필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마 1만 필을 먹을 것이다."

 諸將每旦集於招討使營,甲子,高行周、符彥卿未至,光遠乘其無備,斬敬達首,帥諸將上表降於契丹。〈帥,讀日率。〉契丹主素聞諸將名,皆慰勞,〈勞,力到翻;下詔勞同。〉賜以裘帽,因戲之曰:「汝輩亦大惡漢,〈北人謂南人為「漢」。大惡,猶今人謂桀烈者為得人憎也。王昭遠所謂「惡小兒」亦此意。〉不用鹽酪啗戰馬萬匹!」

 

 양광원 등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거란황제는 장경달의 충정을 가상히 여겨서 그를 거두어 장사 지내고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하고 그의 아랫 사람과 진의 제장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으니, 마땅히 장경달을 본받도록 해라."

 光遠等大慚。契丹主嘉張敬達之忠,命收葬而祭之,謂其下及晉諸將曰:「汝曹為人臣,當效敬達也。」

 

 당시 진안채에는 말이 여전히 5천에 가깝게 있었고, 갑옷과 병장기도 5만이 있었는데 거란에서 모두 빼앗아서 그의 나라로 돌려보내고 모든 당의 장졸들은 후진황제에게 넘겨주면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힘써 섬길 너의 주군이다."

 마군도지휘사 강사립이 분통해하며 한탄하다가 죽었다.

 時晉安寨馬猶近五千,〈近,其靳翻。〉鎧仗五萬,契丹悉取以歸其國,悉以唐之將卒授帝,語之曰:「勉事而主。」〈語,牛倨翻。而,汝也。〉馬軍都指揮使康思立憤惋而死。〈惋,烏貫翻。〉

 

 후진황제는 진안이 이미 항복하자, 사자를 파견하여 여러 주를 달래게 하였는데, 대주 자사 장량이 그 사자의 목을 베었고, 여기가 당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북군을 위로하며 혼주에 도착하였다가 진의 사자를 만나자 역시 그의 목을 베고 자사인 정심기에게 말하였다.

 "오랑캐가 성 아래를 지나가면서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는데, 돌아오는 날에는 반드시 온전할 리가 없을 것이니, 일찌감치 군사와 백성을 인솔하고 오대에서 진주로 도망하는 것만 같지 못하오."

 帝以晉安已降,遣使諭諸州,代州刺史張朗斬其使;呂琦奉唐主詔勞北軍,〈北軍,謂鴈門以北諸州固守之軍。〉至忻州,遇晉使,亦斬之,謂刺史丁審琦曰:「虜過城下而不顧,其心可見,還日必無全理,不若早帥兵民自五臺奔鎮州。」〈自五臺縣東南至鎮州三百六十里,即取飛狐路也。帥,讀曰率;下同。〉

 

 장차 가려하다가 정심기가 이를 후회하고 아성을 닫고 좇지 않앗다. 주의 군사가 그곳을 공격하려고 하자, 여기가 말하였다.

 "가정과 국가가 이와 같은데 어찌 하여 다시 서로 도멸한다는 말인가?"

 마침내 주의 군사를 인솔하고 진주로 향하자 정심기는 마침내 거란에 항복하였다.

 將行,審琦悔之,閉牙城不從。州兵欲攻之,琦曰:「家國如此,何為復相屠滅!」〈復,扶又翻。〉乃帥州兵趣鎮州,〈州兵,忻州兵也。趣,七喻翻。〉審琦遂降契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