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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敬瑭의 쿠데타 3/霜降節 初候豺乃祭獸 3日(陰9/20)丙午

solpee 2021. 10. 24. 16:39

《後晉紀1 高祖 天福 元年》〈丙申, 936年〉

 

 ㉕. 9월에 거란황제가 5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30만이라고 하면서 양무곡에서 남진하였는데, 정기가 50여 리에 끊이지 않았다. 대주 자사 장랑과 흔주 자사 정심기는 농성하며 스스로 지켰는데, 오랑캐의 기병들이 성 아래를 지나면서도 역시 유혹하거나 위협하지 않았다. 정심기는 명주 사람이다.

 ㉕. 九月, 契丹主將五萬騎,號三十萬,自揚武谷而南,〈揚武谷在代州崞縣。薛史:陽武谷在朔州南。考異曰:代州今有楊武寨,其北有長城嶺、聖佛谷。今從漢高祖實錄作 「揚武」。〉旌旗不紹五十餘里。代州刺史張朗、忻州刺史丁審琦嬰城自守,〈九域志:代州南至忻州一百六十里;忻州南至太原一百四十里。〉虜騎過城下,亦不 誘脅。〈誘,音酉。〉審琦,洺州人也。

 

 15일에 거란황제가 진양에 도착하여 분수 북쪽의 호북구에 진을 치고 먼저 사람을 파견하여 석경당에게 말하였다.

 "내가 오늘 바로 적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되겠소?"

 석경당이 사람을 파견하여 말을 타고 달려가서 보고하게 하였다.

 "남쪽의 군대가 심히 두터워서 가볍게 할 수 없으니, 청컨대 내일 전쟁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을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

 辛丑,契丹主至晉陽,陳於汾北之虎北口。〈陳,讀曰陣;下同。考異曰:按幽州北山口名虎北口,亦名古北口。此在太原,而云陳於虎北口,又云歸虎北口,蓋太原城側別有地名虎北口也。〉先遣人謂敬瑭曰:「吾欲今日既破賊可乎﹖」敬瑭遣人馳告曰:「南軍甚厚,不可輕,〈唐兵自南來攻晉陽,故謂之南軍。〉請俟明日議戰未晚也。」

 

 사자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거란이 이미 당의 기장인 고행주· 부언경과 맞붙어 싸우자, 석경당이 마침내 유지원을 파견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돕게 하였다. 장경달· 양광원· 안심기는 보병으로 성의 서북쪽에 있는 산 아래에 진을 쳤는데 거란이 경무장한 기병 3천을 파견하여 갑옷을 입히지 않고 곧바로 그들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였다,

 使者未至,契丹已與唐騎將高行周、符彥卿合戰,敬瑭乃遣劉知遠出兵助欴。張敬達、楊光遠、安審琦以步兵陳於城西北山下,契丹遣輕騎三千,不被甲,直犯其陳。

 

 당의 군사들이 그들의 파리한 모습을 보고 다투어 그들을 뒤쫓아 가서 분곡에 도착하자 거란은 물을 건너 떠나갔다. 당의 군사들이 언덕을 따라 나아가는데 거란의 복병이 동북쪽에서 일어나 당의 군사에 충돌하여 끊어서 두 동강을 냈는데, 보병 가운데 북쪽에 있던 병사들 대부분이 거란에 죽임을 당하였으며, 기병 가운데 남쪽에 있던 병사을 이끌고 진안채로 돌아갔다.

 唐兵見其羸,爭逐之,至汾曲,〈被,皮義翻。羸,倫為翻。汾曲,汾水之曲也。〉契丹涉水而去。唐兵循岸而進,契丹伏兵自東北起,衝唐兵斷而為二,步兵在北者多為契丹所殺,騎兵在南者引歸晉安寨。

 

 거란이 군사를 풀어 그들을 추격하니 당의 군대가 대패하였고 보병 가운데 죽은 병사가 1만 명에 가까웠고 기병들만이 다만 온전하였다. 장경달 등이 남은 무리를 수습하여 진안을 지키자, 거란 역시 군사를 이끌고 호북구로 돌아갔다. 석경당이 당의 항복한 병사 1천여 명을 얻었는데 유지원이 석경당에게 그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권고하였다.

 契丹縱兵乘之,唐兵大敗,步兵死者近萬人,〈近,其靳翻。〉騎兵獨全。敬達等收餘眾保晉安,契丹亦引兵歸虎北口。敬瑭得唐降兵千餘人,劉知遠勸敬瑭盡殺之。〈唐兵雖敗,其眾尚強,劉知遠懼降兵復叛歸,故勸殺之。〉

 

 이날 저녁에 석경당이 북문으로 나가서 거란황제를 알현하였다 거란황제가 석경당의 손을 잡고 서로 만난 것이 늦은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석경당이 물었다.

 "황제께서 멀리 오셔서 군사와 군마는 피로에 지쳤을 터인데 갑자기 당과 더불어 싸워서 큰 승리를 하셨으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是夕,敬瑭出北門,〈出晉陽城北門也。〉見契丹主。契丹主執敬瑭手,恨相見之晚。〈以前此未識面,故然,亦必石敬瑭之氣貌有以聳其瞻視也。〉敬瑭問曰:「皇帝遠來,士馬疲倦,遽與唐戰而大勝,何也﹖」

 

 거란황제가 말하였다.

 애초에, 내가 북에서 오면서 당에서 반드시 안문에서 여러 길을 차단하고 험요한 곳에 군사를 매복한다면 나는 전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소. 사람을 시켜서 정탐해보니 그러한  것이 모두 없었으니, 나는 이로써 멀리까지 말을 몰아 깊숙이 들어가면 큰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알았소.

 契丹主曰:「始吾自北來,謂唐必斷鴈門諸路,〈斷,音短。鴈門有東陘、西陘之險,崞縣有陽武、石門之隘。〉伏兵險要,則吾不可得進矣。〈使張敬達等果知出此,豈有晉安之困哉。〉使人偵視,皆無之,〈偵,丑鄭翻。〉吾是以長驅深入,知大事必濟也。

 

 군사들이 이미 서로 접전하게 되면 우리의 기세는 바야흐로 예리하였으며 저들의 기세는 바야흐로 꺾여 있어서 만약 이 기회를 타고 신속히 그들을 치지 않고 오랜 세월을 견디게 한다면 이기고 지는 것은 알 수 없었소. 이는 내가 빠르게 싸워서 승리한 까닭이며 피로해있고 편안하게 있는 것으로 대처하는 보통의 이치를 가지고 하였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오."

 석경당이 심히 탄복하였다.

 兵既相接,我氣方銳,彼氣方沮,若不乘此急擊之,〈言當乘初至之銳而用其鋒也。〉曠日持久,則勝負未可知矣。此吾所以亟戰而勝,不可以勞逸常理論也。」敬瑭甚歎伏。

 

 16일에 석경당이 군사를 이끌고 거란과 회합하여 진안채를 포위하고 진안의 남쪽에 군영을 설치하였는데, 길이는 100여 리이고 두텁기는 50리였으며, 방울을 많이 설치하고 짖는 개를 묶어 놓아서 사람의 걸음으로는 반걸음도 지나갈 수 없었다. 장경달 등의 사졸들은 오히려 5만 명과 군마 1만 필이 있었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갈 곳이 없었다.

 壬寅,敬瑭引兵會契丹圍晉安寨,置營於晉安之南,長百餘里,厚五十里,多設鈴索吠犬,人跬步不能過。〈長,直亮翻。厚,戶茂翻。索,昔各翻。吠,房廢翻。跬,犬橤翻,半步也。又司馬法曰:一舉足曰跬。跬,三尺也。〉敬達等士卒猶五萬人,馬萬匹,四顧無所之。〈兵法:置之死地而後生。若張敬達等能於圍落未合之時, 勉諭將士,竭力致死決戰,勝負未可知也。〉

 

 18일에 장경달이 사자를 파견하여 당에 패배한 일을 보고하게 하였는데, 이로부터 소식이 다시는 통하지 않았다.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청성도지휘사 부언요를 파견하여 낙양에 있는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하양에 주둔하게 하고, 천웅절도사· 겸중서령인 범연광에게 조서를 내려서 위주에있는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청산을 경유하여 유차로 향하게 하였고, 노룡절도사· 동북면초토사· 겸중서령인 북평왕 조덕균에게 유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거란군의 후방에 출동하게 하고, 요주방어사 반환은 서로수병을 규합하여 진· 강 사이에 있는 양유령을 경유하여 자· 습으로 출동하게 하여 함께 진안채를 구원하게 하였다. 거란황제가 장막을 유림으로 옮겼으며 유격기병이 석회관을 지났는데 당의 군대를 보지 않았다.

 甲辰,敬達遣使告敗於唐,自是聲問不復通。〈復,扶又翻。〉唐主大懼,遣彰聖都指揮使符彥饒將洛陽步騎兵屯河 陽,詔天雄節度使兼中書令范延光將魏州兵二萬由青山趣榆次,〈青山,既邢州青山口也。趣,七喻翻。〉盧龍節度使、東北面招討使兼中書令北平王趙德鈞將幽州 兵〈【章:十二行本「兵」下有「由飛狐」三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退齋校同。】〉出契丹軍後,〈欲使趙德鈞自飛狐道出代州,以斷契丹之後。〉耀州防禦使潘環牐合西路戍兵,〈「牐」,與「糾」同。說文:繩三合為牐。故凡合集兵眾者謂之牐合、牐集。西路戍兵,謂蒲、潼以西諸道戍兵也。〉由晉、絳兩乳嶺出慈、隰,共救晉安寨。契丹主移帳於柳林,〈柳林當在晉安寨南。〉遊騎過石會關,不見唐兵。

 

 21일에 황제가 친히 정벌할 것이라는 조서를 내렸다.

 옹왕 이중미가 말하였다.

 "폐하의 눈병이 아직 낫지 않았는데, 바람부는 사막을 멀리 건너 갈 수가 없으며 신은 비록 어릴지라도 바라건대, 폐하를 대신하여 북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황제는 속으로 본래 가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자못 기뻐하였다.

 丁未,唐主下詔親征。雍王重美曰:〈雍,於用翻。〉「陛下目疾未平,未可遠涉風沙;臣雖童稚,願代陛下北行。」帝意本不欲行,聞之,頗悅。

 

 장연랑과 유연호 그리고 선휘남원사 유연랑이 모두 황제에게 갈 것을 권고하니, 황제는 하는 수 없이 22일에 낙양을 출발하며 노문기에게 말하였다.

 "짐은 평소 경에게 재상의 재간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그러므로 무리르리 의견을 물리치고 첫머리에 경을 기용하였는데, 지금 화란이 이와 같으니 경의 좋은 모의는 모두 어디 있는가?"

 노문기는 다만 절하고 사죄만 할 뿐 대답할 수 없었다.

 張延朗、劉延皓及宣徽南院使劉延朗皆勸帝行,帝不得已,戊申,發洛陽,謂盧文紀曰:「朕雅聞卿有相業,故排眾議首用卿,〈相,息亮翻。盧文紀,唐主清泰元年四月既位,七月相盧文紀。〉今禍難如此,〈難,乃旦翻。〉卿嘉謀皆安在乎﹖」文紀但拜謝,不能對。

 

 23일에 유연랑을 파견하여 시위보군도지휘사 부언요를 감독하게 하여 노주에 가서 대군을 위하여 뒤에서원조하게 하였다. 여러 부대가 봉상에서 추대하는 일을 한 이래로 교만하고 사나워서 기용되지 못하였고, 부언요는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 두려워 감히 법령을 가지고 그들에게 단속하지 못하였다.

 己酉,遣劉延朗監侍衛步軍都指揮使符彥饒軍赴潞州,為大軍後援。〈大軍,謂晉安寨之軍。監,古銜翻。〉諸軍自鳳翔推戴以來,〈推戴,事見上卷清泰元年。〉驕悍不為用,彥饒恐其為亂,不敢束之以法。〈悍,下罕翻,又侯旰翻。兵驕而不為用,與無兵同。潞王以驕兵推戴而得天下,亦以驕兵不為用而失天下,固其宜也。〉

 

 황제가 하양에 도착하자 마음으로 북으로 가는 것을 꺼려 재상과 추밀사를 불러 진격하여 빼앗는 방략을 논의하니, 노문기가 황제의 뜻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국가의 근본은 태반이 황하 이남에 있습니다. 호병은 갑자기 왔다가 홀연히 가고 오랫동안 머무를 수 없으며, 진안의 대체는 심히 견고한데 하물며 이미 세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그곳을 구원함에서이겠습니까? 하양은 천하의 요새가 되는 나루이니 거가가 의당 이 진에 머물러 있으면서 남북을 어루만지고 또 가까이 있는 신하를 파견하여 가서 싸움을 독려하게 하고, 만약에 포위를 풀 수 없다면 전진해도 역시 늦지 않을 것입니다."

 帝至河陽,心憚北行,召宰相、樞密使議進取方略,盧文紀希帝旨,言「國家根本,太半在河南。胡兵倏來忽往,不能久留;晉安大寨甚固,況已發三道兵救之。〈謂范延光、趙德鈞、潘環三帥之兵。〉河陽天下津要,〈北兵犯洛,須自河陽渡河,故云然。〉車駕宜留此鎮撫南北,且遣近臣往督戰,苟不能解圍,進亦未晚。」

 

 장연랑이 일로 인하여 조연수로 하여금 기밀 엄부를 풀어 주려고 하였고, 이어서 말하였다.

 "노문기의 말이 옳습니다."

 황제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감히 다르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택주 자사 유수응은 유심의 아들이며 몰래 스스로 석경당과 내통하였는데, 표문을 올려 거가는 태행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張延朗欲因事令趙延壽得解樞務,〈趙延壽時為樞密使,欲求解而未能。〉因曰:「文紀言是也。」帝訪於餘人,無敢異言者。澤州刺史劉遂凝,鄩之子也,潛自通於石敬瑭,〈應順初,劉遂雍以長安拒王思同而迎潞王者,亦劉鄩之子也;是其兄弟隨時反覆以求祿利,白晝攫金,見金而不見人者也。〉表稱車駕不可踰太行。〈行,戶剛翻。澤州當太行之道。〉

 

 황제는 가까이하는 신하들 가운데 북행을 할 만한 사람을 논의하게 하니 장연랑이 한림학사 수창 사람 화응 등과 더불어 모두 말하였다.

 "조연수의 아버지인 조덕균이 노룡 군사를 거느리고 어려움을 당하는 곳으로 왔으니, 의당 조연수를 파견하여 그와 화합하게 하십시오."

 24일에 추밀사· 충무절도사· 수가제군도부서· 겸시중인 조연수를 파견하여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노주로 가게 하였다.

 帝議近臣可使北行者,張延朗與翰林學士須昌和凝等〈須昌,即九域志鄆州所治之須城縣。蓋後唐避李國昌諱,改須昌為須城,而歐史與通鑑則仍舊縣名而不改也。〉皆曰:「趙延壽父德鈞以盧龍兵來赴難,〈難,乃旦翻。〉宜遣延壽會之。」庚戌,遣樞密使、忠武節度使、隨駕諸軍都部署、兼侍中趙延壽將兵二萬如潞州。

 

 25일에 황제는 회주로 갔다. 우신부통군인 강사립을 북면행영마군도지휘사로 삼고 호종기병을 인솔하여 단백곡에 다다랐다. 강사립은 진양의 호인이다.

 辛亥,帝如懷州。以右神武統軍唐思立為北面行營馬軍都指揮使,帥扈從騎兵赴團柏谷。〈帥,讀曰率。從,才用翻。九域志:太原府祁縣有團柏鎮。〉思立,晉陽胡人也。

 

 황제는 진안을 가지고 걱저아며 여러 신하들에게 대책을 물으니, 이부시랑인 영청 사람 용민이 이찬화를 세워서 거란황제로 삼자고 요청하고 천웅과 노룡 두 진으로 하여금 군사를 나누어 그를 호송하게 하여 유주에서 서루로 향하게 하고, 조정에서는 노격을 가지고 이를 말하면 거란황제는 반드시 안을 돌아보아야 하는 우환을 갖게 되는 것이며, 그런 다음에 군대 안에서 정예의 군사를 선발하여 모집하여서 그들을 치면 이 역시 포위를 푸는 한 가지 계책일 것이라고 하였다. 황제는 깊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집정자들은 그것이 성공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끝내 결정되지 못하였다.

 帝以晉安為憂,問策於群臣,吏部侍郎永清龍敏請立李贊華為契丹主,〈唐如意元年分安次縣置武隆縣,景雲元年改曰會昌,天寶元年改曰永清,屬幽州。匈奴須知:永清縣在幽州東南一百七十里。舜以龍為納言,子孫以名為氏,又或以為豢龍氏之後。項羽將有龍且,漢有龍伯高。李贊華,契丹主之兄也,明宗長興元年來降,賜姓名,時在洛陽。〉今天雄、盧龍二鎮分兵送之,〈欲令范延光、趙德鈞分兵送之。〉自幽州趣西樓,朝廷露檄言之,契丹主必有內顧之憂,〈露檄者,欲使契丹知之。觀他日契丹述律太后責趙德鈞之言,則龍敏之策為可行,唐主惜不用耳。〉然後選募軍中精銳以擊之,此亦解圍之一策也。帝深以為然,而執政恐其無成,議竟不決。

 

 황제는 걱정하고 일이 막혀서 얼굴색에 나타났으며 다만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슬피 노래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때로 그에게 북행을 권하며 말하였다.

 "경들은 말하지 말라. 석랑은 나로 하여금 심장과 간담을 땅에 떨어지게 하였다."

 帝憂沮形於神色,但日夕酣飲悲歌。群臣或勸其北行,則曰:「卿勿言,石郎使我心膽墮地!」〈李嗣源舉兵向洛,則莊宗為之神色沮喪;石敬瑭阻兵拒命,則潞王自謂使之心膽墮地;何平時之臨敵甚勇,一旦乃惴怯如此也﹖蓋莊宗之與明宗,潞王之與晉祖,皆同出入兵間,內揆其智力無以大相過,而乘時用勢偶有不相及者,則其氣先餒故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