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潞王의 거저먹는 쿠데타1/寒露節中候雀入大水爲蛤2日(陰9/9)乙未

solpee 2021. 10. 13. 16:58

《後唐紀7 潞王 淸泰 元年》〈甲午, 934年〉

 

 ⑤. 노왕이 이미 조정과 더불어 시기하여 막히게 되자 조정에서도 또 양왕 이종장에게 명령하여 권지봉상으로 삼았다. 이종장의 성격은 거칠고 경솔하였으며 재화를 즐겨서 전에 안중회를 대신하여 하중에서 진수하면서 손수 그를 죽였는데, 노왕은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그를 싫어하여 명령을 거절하려고 하여도 군사는 약하고 식량은 적어서 해야할 바를 알지 못하여 장좌들과 모의하니, 모두가 말하였다.

 "주상께서는 춘추가 어리셔서 정치적인 일은 주홍소와 풍빈에게서 나오는데, 대왕의 공명이 주군을 떨게 하고 있으니 진을 떠나면 반드시 온전할 리 없으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⑤. 潞王既與朝廷猜阻,朝廷又命洋王從璋權知鳳翔。從璋性粗率樂禍,〈樂,音洛。〉前代安重誨鎮河中,手殺之;〈見二百七十七卷明宗長興二年。〉潞王聞其來,尤惡之,〈惡,烏路翻。〉欲拒命則兵弱糧少,〈少,詩沼翻。〉不知所為,謀於將佐,皆曰:「主上富於春秋,政事出於朱、馮,大王功名震主,離鎮必無全理,〈離,力智翻。〉不可受也。」〈言不可受代。〉

 

 왕이 관찰판관인 상하 사람 마윤손에게 물었다.

 "지금 가는 길은 경사를 지나가는데 마땅히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이 편리한가?"

 대답하였다.

 "임금이 부르면 수레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장례에 참석하였다가 진으로 부임하는 것인데 또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여러 사람들의 흉악한 모의를 좇아서는 아니됩니다."

 무리들이 그를 비웃었다.

 王問觀察示判官滴河馬胤孫〈隋閏皇十六年置滴河縣,屬渤海郡,唐屬棣州。九域志:滴河縣在棣州西南八十里。註云:漢都尉許商鑿此河近海,故以商為名,後人加「水」焉。〉曰:「今道京師,當何向為便﹖」〈發此問以觀眾意。〉對曰:「君命召,不俟駕。〈弔論語孔子之言。〉臨喪赴鎮,又何疑焉!諸人凶謀,不可從也。」眾哂之。〈言當過京師臨大行之喪,然後赴太原也。馬胤孫之言,儒生守經學之言也。是時勸潞王拒命者以其言為不達時變,故相與哂之。哂,矢忍翻。笑不壤顏為哂。〉

 

 왕이 마침내 격문을 이웃 도에 보내어서 말하였다.

 "주홍소 등은 선황의 병세가 위중해지는 것을 이용하여 맏아들을 죽이고 어린 아들을 세워놓고 오로지 조정의 권력을 통제하였으며, 골육을 갈라 소원하게 하고 번원(藩垣: 울타리와 담장 즉 절도사)을 동요시켰으니, 사직을 뒤집어엎을까 두렵습니다. 지금 나 이종가가 장차 들어가서 조현하고 임금의 옆에 있는 간악한 사람들을 깨끗이 제거하려고 하나 힘으로는 홀로 처리할 수 없으니, 바라건대 이웃하는 번진들에게 걸령(乞靈: 남의 힘을 의지하여 자기의 이익을 구함)하여서 이것을 이루고자 합니다."

 王乃移檄鄰道,言「朱弘昭等乘先帝疾亟,殺長立少,〈謂殺從榮而立帝也。長,佑兩翻。少,詩照翻。〉專制朝權,別疏骨肉,動搖藩垣,〈謂易置石敬瑭乃己也。朝,宜遙翻;下同。別,彼列翻。〉懼傾覆社稷。今從珂將入朝以清君側之惡,而力不能獨辦,願乞靈鄰藩以濟之。」

 

 노왕은 서도유수 왕사동이 동쪽으로 나가는 길을 감당하고 있어서 더욱 그와 더불어 서로 결맹하고자 하여 추관인 학후와 압아 주정예 등을 파견하여 서로 계속하여 장안에 가게 하여 이해를 가지고 유세하게 하고 미색이 있는 기녀를 가지고 뇌물을 먹이되 좇지 아니하면 그를 바로 도모하게 하였다.

 潞王以西都留守王思同當東出之道,〈自鳳翔趣洛陽,道出長安。〉尤欲與之相結,遣推官郝詡、押牙朱廷又等相繼詣長安,說以利害,〈說,式芮翻。〉餌以美妓,〈妓,渠綺翻。〉不從則令就圖之。

 

 왕사동이 장리들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명종의 큰 은혜를 입어서 지금 봉상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면, 설사 일이 이루어져서 영광을 얻는다 해도 오히려 한 시대의 반신이 되는데, 하물며 일이 실패하여 치욕을 당하여 만고의 추한 자추로 흐르는 것이랴!"

 드디어 학후 등을 붙잡고서 상황을 보고하였다.

 당시에 노왕의 사자들은 대부분 이웃 도에 잡혀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아첨에 의지하여 두 마음을 가졌지만 오직 농주방어사 상리금만이 마음을 기울여 그에게 귀부하였고, 판관 설문우를 파견하여 가고 오면서 일을 계획하게 하였다. 상리금은 병주 사람이다.

 思同謂將吏曰:「吾受明宗大恩,〈王恩同自燕降晉,梁、晉相距,思同未嘗有戰功,明宗時以久次為節度使,故自言受大恩。〉今與鳳翔同反,無使事成而榮,猶為一時之叛臣,況事敗而辱,流千古之醜跡乎!」遂執詡等,以狀聞。時潞王使者多為鄰道所執,不則依阿操兩端,〈不,讀曰否。操,七刀翻。〉惟隴州防禦使相里金傾心附之,〈隴州東至鳳翔一百五十里。遣判官薛文遇往來計事。〈薛文遇由此為潞王所信用。〉金,并州人也。〉

 

 조정에서는 봉상을 토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강의성이 외지로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은데다 군권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왕사동을 통수로 삼고 우림도지휘사 후익을 행영마보군도우후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후익은 군사 정황으로 보아 장차 변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사양하고 가지 않았더니,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그에게 화를 내며 내보내어 상주 자사로 삼았다.

 朝廷議討鳳翔。康義誠不欲出外,恐失軍權,〈明宗以康義誠朴忠,豈知其陰狡乃爾邪!〉請以王思同為統帥,〈帥,所類翻。〉以羽林都指揮使侯益為行營馬步軍都虞候。〈宋白曰:長興二年二月,敕衛軍神捷、神威、雄武及魏府廣捷已下指揮改為左、右羽林,置四十指揮,每十指揮立為一軍,每一軍置都指揮使一人,兼分為左、右廂。〉益知軍情將變,辭〈【章:十二行本「辭」下有「疾」字;乙十一行本同。】〉不行;〈侯益會經鄴都之變,故爾。〉執政怒之,出為商州刺史。〈洛陽至商州八百八十六里。〉

 

 21일에 왕사동을 서면행영마보군도부서로 삼고 전에 정난절도사를 지낸 악언조를 그의 부사로 삼게 하였으며, 전에 강주 자사였던 장종간을 마보도우후로 삼았고, 엄위보군좌상지휘사인 윤휘와 우림지휘사 양사권 등을 모두 편장으로 삼았다. 윤휘는 위주 사람이다.

 辛卯,以王思同為西面行營馬步軍都部置,〈前此用兵置帥,率以都招討使命之。莊宗時,明宗為北面招討使以禦契丹,房知溫為副都部署,當時為都部署者必有其人。又孟知祥拒董璋,以趙廷隱為行營都部署,後遂以為元帥之任,宋氏建國之初猶因而用之。〉前靜難節度使藥彥稠副之,〈難,乃旦翻;下同。〉前絳州刺史萇從簡為馬步都虞候,嚴衛步軍左廂指揮使尹暉、〈宋白曰:應順元年三月,改在京羽林左、右四十指揮為嚴衛左、右軍。然此時羽林指揮使楊思權與嚴衛指揮使尹暉並為西征偏裨,則似羽林與嚴衛並置。〉羽林指揮使楊思權等皆為偏裨。暉,魏州人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