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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원 등극/秋分節末候水始涸3日(陰8/29)丙戌

solpee 2021. 10. 4. 19:08

《後唐紀3 莊宗 天成 元年》〈丙戌, 923年〉

 

 ④. 애초에, 장종이 여와 정씨 두 환관에게 명령하여 진양에서 하나는 군사를 감독하고 다른 하나는 창고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유수인 장헌 이하 모두가 받들고 호응하느라 겨를이 없었다.

 업도에서 변란이 있게 되자 또 분주 자사 이언초에게 명령하여 북도순검으로 삼았다. 이언초는 이언경의 형이다.

 ④. 初,莊宗命呂、鄭二內養在晉陽,一監兵,一監倉庫,〈監,工銜翻。〉自留守張憲以下皆承應不暇。及鄴都有變,又命汾州刺史李彥超為北都巡檢。彥超,彥卿之兄也。

 

 장종이 죽고 나자 추관인 하간 사람 장소원이 장헌에게 권고하여 표문을 받들고 나아갈 것을 권고하니, 장헌이 말하였다.

 "나는 한 사람의 서생으로 포의에서 금자에 이른 것은 모두 선황의 은전에서 나왔는데 살기를 탐낸다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소?"

 장소원이 울면서 말하였다.

 "이는 옛날 사람들의 일이며, 공은 이를 실행할 수 있으니, 충성과 의리는 썩지 않았습니다."

 莊宗既殂,推官河間張昭遠勸張憲奉表勸進,憲曰:「吾一書生,自布衣至服金紫,皆出先帝之恩,豈可偷生而不自愧乎!」昭遠泣曰:「此古人之事,公能行之,忠義不朽矣。」〈張昭遠儒者也,故勉成張憲之志節。其後昭遠避漢高祖名,止名昭。〉

 

 이존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장종의 가까운 친척으로 낙양에서 진양으로 도망하여 장종의 명령을 속여서 전달하고 몰래 두 내시와 더불어 장헌과 이언초를 죽이고 진양을 저항하며 지킬 것을 모의 하였다.

 이언소가 이를 알고 은밀히 장헌에게 보고하고 먼저 그들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장헌이 말하였다.

 "노복인 저는 선황의 두터운 은전을 입이서 이를 차마 하지 못하겠소. 의리를 따르다가 화에서 모면하지 못하는 것은 마침내 하늘의 뜻이오."

 有李存沼者,莊宗之近屬,〈考異曰:唐愍帝實錄符彥超傳云「皇弟存沼」,薛史、歐陽史彥超傳作「存霸」;莊宗列傳、薛史張憲傳但云「李存沼」。按莊宗弟無名存沼者;存霸自河中衣僧服而往,非今日傳莊宗之命者也。或者武皇之姪,莊宗之弟。別無所據,不敢決定,故但云近屬。按莊宗謚光聖神閔皇帝,唐愍帝實錄即莊宗實錄也,「愍」、「閔」字通。〉自洛陽奔晉陽,矯傳莊宗之命,陰與二內養謀殺憲及彥超,據晉陽拒守。彥超知之,密告憲,欲先圖之。憲曰:「僕受先帝厚恩,不忍為此。徇義而不免於禍,乃天也。」

 

 이언초가 모의하면서 아직 결정되지 않았는데, 6일 밤에 군사들이 아성에서 두 내시와 이존소를 죽이고 이어서 대대적으로 약탈하였는데,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장헌은 변란의 소식을 듣고 나가서 흔주로 도망하였다. 마침 이사원이 보내온 편지가 도착하여 이언초는 사졸들에게 호령하자 성 안이 비로소 편안해졌고, 드디어 권지(임시)태원군부로 삼았다.

 彥超謀未決,壬辰夜,軍士共殺二內養及存沼於牙城,因大掠達旦。憲聞變,出奔忻州。〈九域志:太原府東北至忻州二百里。此以宋氏徙府後言也。〉會嗣源移書至,彥超號令士卒,城中始安,遂權知太原軍府。

 

 ⑤. 백관들이 세 번이나 편지를 올려 이사원에게 감국하기를 요청하니, 이사원이 마침내 이를 허락하였다. 8일에 흥성궁에 들어가서 거처하고 비로소 백관들에게 나누어 알현하는 것을 받았다. 영을 내리는 것을 교라 하고 백관들은 그를 '전하'라고 하였다.

 ⑤. 百官三牋請嗣源監國,〈考異曰:監國本太子之事,非官非爵。然五代唐明宗、潞王、周太祖皆嘗監國。漢太后令曰,「中外事取監國處分,」又誥曰,「監國可即皇帝位,」是時直以監國為稱號也。今從之。〉嗣源乃許之。甲午,入居興聖宮,〈按是時莊宗之殯在西宮,興聖宮蓋在西宮之東。按薛史,莊宗即位於魏州,以子繼岌充北都留守、興聖宮使,及平定河南,充東京留守、興聖宮使,則東京、北都皆有興聖宮。宋白所記見前。〉始受百官班見。〈示即真之漸。見,賢遍翻。〉下令稱教,百官稱之曰殿下。

 

 장종의 후궁으로 생존한 사람이 1천여 명이었는데, 선휘사가 그 가운데 미색이 있고 젊은 사람들을 뽑아서 수백 명을 감국에 헌상하니, 감국이 말하였다.

 "어디에 이들을 사용한단 말인가?"

 대답하였다.

 "궁중의 직무는 관장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감국이 말하였다.

 "궁중의 직무를 관장하려면 의당 고사를 알아야 하는데 이들이 어찌 알겠는가?"

 마침내 늙고 오랜 경험이 있는 사람을 채용하여 이에 보임하게 하고, 그 젊은 사람들은 모두 내보내어 그들의 친척에게 돌려보내고 친척이 없는 사람들은 그가 있을 적당한 곳에 맡겼다. 촉에서 압송되어 온 궁인들도 역시 이 기준에 따랐다.

 莊宗後宮存者猶千餘人,宣徽使選其美少者數百獻於監國,〈少,詩照翻。〉監國曰:「奚用此為!」對曰:「宮中職掌不可闕也。」監國曰:「宮中職掌宜諳故事,〈諳,烏含翻。〉此輩安知!」乃悉用老舊之人補之,其少年者皆出歸其親戚,無親戚者任其所適。蜀中所送宮人亦準此。

 

 9일에 중문사 안중회를 추밀사로 삼고, 진주별가 장연랑을 부사로 삼았다.

 장연랑은 개봉 사람이며 양에서 벼슬하면서 조용리였는데, 성격이 섬세하고 교묘하여 권력 있고 귀한 사람을 잘섬겼고 딸을 안중회의 아들에게 처로 보냈으니, 그러므로 안중회가 그를 이끌어 준 것이다.

 乙未,以中門使安重誨為樞密使,〈安重誨本成德軍中門使,監國所親任者也。〉鎮州別駕張延朗為副使。延朗,開封人也,仕梁為租庸吏,〈按歐史,張延朗仕梁,以租庸吏為鄆州糧料使,明宗克鄆州得之,復以為糧料使,後徙鎮宣武、成德,以為元從孔目官,蓋由此選為鎮州別駕也。〉性纖巧,善事權貴,以女妻重誨之子,〈妻,七細翻。〉故重誨引之。

 

 감국이 각기 있는 곳에 명령하여 여러 친왕을 찾도록 하였다. 통왕 이존확과 아왕 이존기는 백성들 사이에 숨어 있엇는데 어떤 사람이 안중회에게 밀고하자 안중회가 이소진과 더불어 모의하며 말하였다.

 "지금 전하께서 이미 감국하며 장례를 관장하고 있으니 여러 친왕들이 의당 일찌감치 갈 곳을 만들어서 사람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해야 하오. 전하의 성정이 자애로우니 보고해서는 아니되오."

 마침내 은밀히 사람을 파견하여서 전사에 가서 그를 죽이게 하였다.

 監國令所在訪求諸王。通王存確、雅王存紀匿民間,或密告安重誨,重誨與李紹真謀曰:「今殿下既監國典喪,諸王宜早為之所,以壹人心。殿下性慈,不可以聞。」乃密遣人就田舍殺之。後月餘,監國乃聞之,切責重誨,傷惜久之。

 

 후에 한 달이 더 지나서 감국이 마침내 이 소식을 듣고 안주회를 호되게 질책하며 오랫동안 가슴아파하였다.

 유황후는 신왕 이존악과 더불어 진양으로 도망하였는데, 길에서 이존악과 더불어 사사롭게 통정하였다.

 이존악이 진양에 도착하였으나 이언초가 받아들이지 아니하자 도주하여 남곡에 도착하였지만 그의 아랫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劉皇后與申王存渥奔晉陽,在道與存渥私通。存渥至晉陽,李彥超不納,走至風谷,〈「風谷」恐當作「嵐谷」。唐長安三年分宜芳縣置嵐谷縣,屬嵐州。〉為其下所殺。

 

 다음날에 영왕 이존패도 역시 진양에 도착하였으나 좇던 군사들이 모두 도망가고 흩어지자 이존패가 머리를 깎고 승복차림으로 이언초를 배알하고 말하였다.

 "바라건대, 산승이 되겠으니 비호해 주기를 바랍니다."

 군사들이 다투어 그를 죽이려고 하니, 이언초가 말하였다.

 "여섯 번째 상공이 온 것이니 마땅히 주문을 올리고 지시를 기다려라."

 군사들이 듣지 않고 그를 부문의 비석 아래에서 죽였다.

 明日,永王存霸亦至晉陽,從兵逃散俱盡,〈從,才用翻。〉存霸削髮、僧服謁李彥超,「願為山僧,幸垂庇護。」軍士爭欲殺之,彥超曰:「六相公來,當奏取進止。」〈存霸第六。〉軍士不聽,殺之於府門之碑下。

 

 유황후는 진양에서 비구니가 되었는데 감국이 사람을 시켜서 곧바로 그녀를 죽이게 하였다. 설왕 이존례와 장종의 어린 아들들인 이계승· 이계동· 이계섬· 이계요는 난리를 만나고 나서 모두 그 끝이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하였다. 오직 옹왕 이존미만이 중풍으로 야위어서 모면할 수 있었으며 진양에서 살았다.

 劉皇后為尼於晉陽,監國使人就殺之。薛王存禮及莊宗幼子繼嵩、繼潼、繼蟾、繼嶢,〈嶢,倪么翻。〉遭亂皆不知所終。惟邕王存美以病風偏枯得免,居于晉陽。〈沙陀自唐末強盛,蓋至於此。恐赤心之支胤或有存者;晉王父子相傳,其血嗣殲矣。且明宗,晉王義兒也,得國之後,坐視義父之遺育為魚為肉,何忍也!他日詎可望麥飯灑陵乎!

 

 ⑩. 위왕 이계급은 흥평에서부터 물러나 무공에 도착하니, 내시 이종섭이 말하였다.

 "화가 될지 복이 될지는 알 수 없으나 후퇴하는 것은 전진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청컨대 왕께서는 조속히 동쪽으로 가서 안에 있는 어려움을 구원하십시오."

 이계급이 이를 좇았다. 돌아와서 위수에 도착하였는데 권서도유수인 장전이 이미 부량을 끊어서 물을 따라 배를 타고 건너 이날에 위남에 도착하였으나 심복인 여지유 등은 이미 모두 숨어버렸다.

 ⑩. 魏王繼岌自興平退至武功,宦者李從襲曰:「禍福未可知,退不如進,請王亟東行以救內難。」繼岌從之。還,至渭水,權西都留守張籛已斷浮梁;〈難,乃旦翻。籛,則前翻。斷,音短。〉循水浮渡,是日至渭南,腹心呂知柔等皆已竄匿。

 

 이종섭이 이계급에게 말하였다.

 "이 시대의 큰일은 이미 떠나갔으니 왕께서는 의당 스스로를 도모하십시오."

 이계급이 배회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마침내 스스로 평상에 엎드려 복부인 이환에게 명령하여 자기의 목을 매어서 죽이게 하였다.

 임환이 그의 무리를 대신 거느리고 동쪽으로 갔다. 감국이 석경당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게 하니 군사들이 모두 다른 말이 없었다.

 從襲謂繼岌曰:「時事已去,王宜自圖。」繼岌徘徊流涕,乃自伏於床,命僕夫李環縊殺之。〈繼岌以李從襲、呂知柔而殺郭崇韜,而殺繼岌者豈他人哉!李環即撾殺崇韜者也。考異曰:莊宗實錄,「征蜀初為都監,後勸繼岌殺郭崇韜者李從襲也。」明宗實錄云「宦者都監李繼襲勸繼岌東還」,及令自殺,又云「任圜監軍李廷襲欲存康延孝」,及至華州為李沖所殺者,復云「李從襲」。蓋「從襲」誤為「繼襲」、「廷襲」。今從莊宗實錄。〉任圜代將其眾而東。監國命石敬瑭慰撫之,軍士皆無異言。〈史言西軍歸心於新主。〉

 

 이보다 앞서서 감국이 가까이하던 이충을 화주도감으로 삼아 서사를 맞이하여 접대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충이 화주절도사 사언용을 멋대로 압박하여 들어와서 조현하게 하였는데, 동주절도사 이존경이 화주를 지나자 이충이 그를 죽이고 아울러 그의 가족도 도륙하였으며, 또 서천행영도감 이종습을 죽였다. 사언용이 울면서 안중회에게 호소하자 안중회는 사언용을 파견하여 진으로 돌아가게 하고 이충을 불러서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先是,監國命所親李沖為華州都監,應接西師。〈先,昔薦翻。華,戶化翻。西師,即謂魏王繼岌之師。〉沖擅逼華州節度使吏彥鎔入朝;同州節度使李存敬過華州,沖殺之,并屠其家;又殺西川行營都監李從襲。〈李從襲死有餘罪,監國未即肆諸市朝,而李沖殺之則為失刑耳。〉彥鎔泣訴於安重誨,重誨遣彥鎔還鎮,召沖歸朝。

 

 감국이 낙양에 들어오면서부터 안팎의 기밀에 관한 일은 모두 이소진에게서 결정되었다.

 이소진은 위승절도사 이소흠과 태자소보 이소충을 마음대로 체포하여 하옥시키고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안중호가 이소진에게 말하였다.

 "온도와 단응의 조악은 모두 양조에서 있었던 것이고, 지금 전하께서는 최근에 내부적인 어려움을 평정하고서 만국이 편안하기를 바라는데, 어찌 오로지 공을 위하여 원수를 갚으려고 하시오?"

 이소진이 이 일로 말미암아 점차 막혀졌다.

 自監國入洛,內外機事皆決於李紹真。紹真擅收威勝節度使李紹欽、太子少保李紹沖下獄,〈下,戶嫁翻。〉欲殺之。安重誨謂紹真曰:「溫、段罪惡皆在梁朝,今殿下新平內難,冀安萬國,豈專為公報仇邪!」〈難,乃旦翻。為,于偽翻。按歐史,霍彥威素與溫、段有隙。〉紹真由是稍沮。〈沮,在呂翻。〉

 

 15일에 감국이 교서를 내려서 이소충과 이소흠의 성명을 회복시켜 온도· 단응이라 하고 나란히 놓아주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辛丑,監國教,李紹沖、紹欽復姓名為溫韜、段凝,〈溫韜、段凝賜姓名並見二百七十二卷莊宗同光元年。〉並放歸田里。

 

 ⑫. 유사가 즉위에 관한 예의를 논의하였다. 이소진과 공순은 당의 운수가 이미 다하여서 의당 스스로 국호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감국이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왜 국호를 말하는 것이오?"

 대답하였다.

 "선황께서는 당에서 성을 하사받고 당을 위하여 원수를 갚았으며 소종의 뒤를 계승하였으니, 그러므로 당이라고 호칭하였습니다.

 지금 양조에 있었던 사람들이 전하가 당으로 호칭하기를 바라지 않을 뿐입니다."

 ⑫. 有司議即位禮。李紹真、孔循以為唐運已盡,宜自建國號。監國問左右:「何謂國號﹖」對曰:「先帝賜胜於唐,為唐復讎,〈賜姓於唐,謂獻祖以平龐勛之功始賜姓李也。為唐復讎,謂莊宗滅梁也。為,于偽翻。〉繼昭宗後,故稱唐。〈言以同光元年繼天祐二十年也。〉今梁朝之人不欲殿下稱唐耳。」〈霍彥威、孔循皆嘗事梁者也。當時在監國左右者未必皆儒生;觀其所對辭意,於正閏之位致其辯甚嚴,雖儒生不能易也。〉

 

 감국이 말하였다.

 "내 나이 열세 살에 헌조를 섬겼고  헌조는 나를 종속으로 여기고 나를 자식같이 보았소. 또 무황을 섬긴 지가 30년이 되며 선황께서는 20년을 베풀었으니 공격하며 전투를 거치면서 일찍이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무황이 기업은 곧 나의 기업이고 선황의 천하는 곧 나의 천하인데, 어찌 가문은 같이 하면서 나라를 달리 할 수 있겠소!"

 집정으로 하여금 다시 논의하게 하였다.

 監國曰:「吾年十三事獻祖,獻祖以吾宗屬,視吾猶子。〈莊宗即位,尊其祖國昌為獻祖。監國亦沙陀種,故云宗屬。〉又事武皇垂三十年,〈莊宗追尊父晉王克用為太祖武皇帝。〉先帝垂二十年,經綸攻戰,未嘗不預;武皇之基業則吾之基業也,先帝之天下則吾之天下也,安有同家而異國乎!」令執政更議。〈更,工行翻。〉

 

 이부상서 이기가 말하였다.

 "만약 국호를 고치면 선황께서는 드디어 길 가는 사람이 되는데 재궁(관)은 어디에 의탁합니까?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는 삼세의 옛 임금을 잊으신다면 우리들은 신하된 사람으로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전대에는 방계의 친속이 들어와서 계승한 경우는 많았으니 의당 사자가 영구 앞에서 즉위하는 예의를 사용해야 합니다."

 무리들이 이를 좇았다.

 吏部尚書李琪曰:「若改國號,則先帝遂為路人,梓宮安所託乎!不惟殿下忘三世舊君,〈以監國歷事獻祖、太祖、莊宗三世也。〉吾曹為人臣者能自安乎!前代以旁支入繼多矣,宜用嗣子柩前即位之禮。」〈記曰:在床曰尸,在棺曰柩。鄭氏註曰:尸,陳也,言形體在;柩之言究也,白虎通云,久也。柩,音新舊之舊。〉眾從之。

 

 20일에 감국이 흥성궁에서 서궁으로 가서 참최를 입고 영구 앞에서 즉위하니 백관들이 흰 옷을 입었다. 이미 그렇게 하고 나자 황제의 곤면을 입고 책서를 받으니 백관들이 길복을 입고 축하를 하였다.

 丙午,監國自興聖宮赴西宮,服斬衰,於柩前即〈【章;十二行本「即」下有「皇帝」二字;乙十一行本同。】〉位,〈斬衰,下不緶,子為父服之。衰,倉回翻。自己丑入洛,至此二十日。先是未敢即位者,魏王繼岌猶在故也;繼岌既死,乃決為之。〉百官縞素。既而御袞冕受冊,〈徐無黨曰:既用嗣君之禮矣,遽釋衰而服冕,可以見其情詐。〉百官吉服稱賀。

 

 ⑯. 28일에 크게 사면을 하고 연호를 고쳤다. 후궁 100명과 환관 30명, 교방 100명, 응방 20명 그리고 어주 50명을 헤아려서 남기고, 스스로 나머지는 적합한 곳을 좇아가도록 하였다. 여러 관사의 사의 업무 가운데 유명무실한 것은 이를 모두 철폐하였다. 여러 군대를 나누어 파견하여 근기에 가서 식량을 공급받게 하여서 식량 운반의 경비를 줄이게 하였다.

 ⑯. 甲寅,大赦,改元。〈始改元天成。〉量留後宮百人,宦官三十人,教坊百人,鷹坊二十人,御廚五十人,〈量,音良。〉自餘任從所適。諸司使務有名無實者皆廢之。分遣諸軍就食近畿,以省饋運。

 

 하· 추세를 거두면서 생기는 성모(省耗: 수수료)를 없앴다. 절도· 방어등사는 원정· 강탄 네 절기에 공봉을 허락하지만 백성들에게는 거두어들일 수 없게 하였으며 자사 이하는 봉공할 수 없게 하였다.. 사람을 선발하는 데는 먼저 문서를 더럽히고 훼손된 사람은 삼전으로 하여금 허위로 위조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옛날의 규정을 회복시키도록 하였다.

 除夏、秋稅省耗。〈舊例,夏、秋二稅先有省耗,每斗一升,今後祗納正稅數,不量省耗。〉節度、防禦等使,正、至、端午、降誕四節聽貢奉,〈元正、冬至、端午、并降誕節為四。按五代會要,唐咸通八年九月九日帝始生於代北金鳳城,以其日為應聖節。〉毋得斂百姓;〈斂,力贍翻。〉刺史以下不得貢奉。選人先遭塗毀文書者,〈塗毀選人告身,見二百七十三卷莊宗同光二年。〉令三銓止除詐偽,餘復舊規。〈唐六典:吏部尚書、侍郎之職,掌天下官吏,以三銓分其選:一曰尚書銓,二曰中銓,三曰東銓。或云吏部東、西銓并流外銓為三銓。宋白曰:太和四年七月,吏部奏:「當司西銓侍郎廳,舊以尚書之次為中銓,次為東銓。乾元中,侍郎崔器奏改中銓為西銓,以久次侍郎居左,新除侍郎居右,因循倒置,議者非之。請自今久次侍郎居西銓,新除侍郎居東銓。」敕旨依。又曰:兵部尚書為中銓,并東銓、西銓為三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