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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의 멸망.2./秋分節中候蟄蟲塊(壞·培·啓)戶4日(陰8/25)壬午

solpee 2021. 9. 30. 07:49

《後唐紀1 莊宗 同光 元年》〈癸未, 923年〉

 

 ⑳. 이진이 경상에게 말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우리 무리를 깨끗이 씻었다고 하는데 서로 나란히 새 군주에게 조현하시겠소?"

 경상이 말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양의 재상이 되어 군주가 어두워도 간할 수 없었고 나라가 망해도 구원할 수 없었는데 새로운 군주가 만약 묻는다면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하겠소?"

 ⑳. 李振謂敬翔曰:「有詔洗滌吾輩,相與朝新君乎﹖」〈朝,直遙翻;下同。〉翔曰:「吾二人為梁宰相,君昏不能諫,國亡不能救,新君若問,將何辭以對!」

 

 이날 저녁 밤이 새기 전에 어떤 사람이 보고하였다.

 "숭정이태보가 이미 들어가서 조현하였습니다."

 경상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이진은 거짓으로 장부 노릇을 하였구나! 주씨는 새 주군과는 대대로 원수였는데 지금 나라는 망하고 군주는 죽었는데 설령 새 군주가 죽이지 않는다고 하여도 무슨 면목으로 건국문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마침내 목을 매어 죽었다.

 是夕未曙,〈曙,常恕翻,天明為曙。〉或報翔曰:「崇政李太保已入朝矣。」〈梁以李振為崇政使,故以稱之。〉翔歎曰:「李振謬為丈夫!朱氏與新君世為仇讎,今國亡君死,縱新君不誅,何面目入建國門乎!」乃縊而死。

 

 10일에 양의 백관들이 다시 조당에서 대죄하자 황제는 칙서를 선포하여 그들을 사면하였다.

 조암이 허주에 도착하자 온소도가 맞이하여 알현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가 머리를 베어가지고 와서 바치니, 조암이 싸가지고 갔던 재화를 모조리 몰수하였다. 온소도는 다시 이름을 회복시켜서 온도라고 하였다.

 庚辰,梁百官復待罪於朝堂,〈復,扶又翻。〉帝宣敕赦之。

趙巖至許州,泅昭圖迎謁歸第,斬首來獻,盡沒巖所齎之貨。〈元徽、趙巖可為怙權冒貨之戒。河南尹張全義收葬之。今從實錄。〉

 

 11일에 왕찬에게 조서를 내려서 주우정의 시신을 수습하여 불에 빈소를 마련하고 그의 머리에 옻칠을 하여 그것을 함 속에 넣어 태사(양실 제단)에 넣어두게 하였다.

 단응이 활주에서부터 하를 건너 구원하러 들어오면서 제군배진사 두안구를 선봉으로 삼았는데, 봉구에 도착하여 이종가를 만나자 두안구가 먼저 항복하였다.

 12일에 단응은 그의 무리 5만을 거느리고 봉구에 도착하자 역시 갑옷을 벗고 항복 받아 주기를 요청하였다. 단응은 여러 대장들을 인솔하고 먼저 대궐에 가서 대죄하니, 황제는 위로하고 그들에게 하사하며 사졸들을 위로하고 달래며 각기 그들이 있던 곳으로 복귀하게 하였다.

 辛巳,詔王瓚收朱友貞尸,殯於佛寺,漆其首函之,藏於太社。〈考異曰:薛史末帝紀云:「詔河南尹張全義收葬之。」今從實錄。〉

段凝自滑州濟河入援,以諸軍排陳使杜晏球為前鋒;至封丘,遇李從珂,晏球先降。壬午,凝將其眾五萬至封丘,亦解甲請降。凝帥諸大將先詣闕待罪,帝勞賜之,〈帥,讀曰率。勞,力到翻。〉慰諭士卒,使各復其所。

 

 단응이 공경들 사이를 출입하면서 의기양양하며 스스로 성공한 것처럼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자, 양의 구신들 가운데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얼굴을 물어뜯으려고 하면서 그들의 가슴을 들추어냈다.

 凝出入公卿間,揚揚自得無愧色,梁之舊臣見者皆欲齕其面抉其心。〈齕,恨沒翻,又下結翻,齧也。抉,於決翻。〉

 

 16일에 조서를 내려서 중서시랑인 동평장사 정각을 깎아내려서 내주사호(司戶參軍: 府· 州에 설치 戶口· 帳籍· 婚姻· 田宅· 雜役 그리고 道路 업무를 관장)로 삼고, 소경을 등주사호로 삼고, 한림학사 유악을 균주사마로 삼고, 요의를 복주사마로 삼고, 봉교를 당주사마로 삼고, 이역을 회주사마로 삼고, 두몽정을 혼주사마로 삼고, 숭정학사 유광소를 밀주사호로 삼고, 육숭을 안주사호로 삼고, 어사중승 왕권을 수주사호로 삼았는데, 이들은 대대로 당의 은혜를 입었는데도 양의 벼슬을 하여 존귀하고 현달하게 된 연고였다.

 유악은 유숭구의 조카이고, 요의는 만년 사람이고, 봉의는 봉오의 손자이고, 이역은 경조 사람이고, 왕권은 왕구의 손자이다.

 丙戌,詔貶梁中書侍郎同平章事鄭玨為萊州司戶,蕭頃為登州戶,翰林學士劉岳為均州司馬,任贊為房州司馬,姚顗為復州司馬,封翹為唐州司馬,李懌為懷州司馬,竇萬徵為沂司馬,崇政學士劉光素為密州司戶,陸崇為安州司戶,御史中丞王權為隨州司戶:以其世受唐恩而仕梁貴顯故也。岳,崇龜之從子:〈劉崇龜見二百五十三卷唐僖十示廣明元年。從,才用翻。〉顗,萬年人;〈年屬京兆府,唐為赤縣。時復以京兆為西京。〉趐敖之孫;〈封敖仕唐武、宣朝,入翰林,位至尚書僕射。〉懌,京兆人;權,龜之孫也。〈王龜,式之兄也,唐咸通間有名。〉

 

 단응과 두안구가 말씀을 올렸다.

 "위량의 요인인 조암· 조곡· 장희일· 장한윤· 장한걸· 장한융· 주규 등은 위엄과 복을 몰래 희롱하며 여러 생명을 해치는 좀벌레이어서 죽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조서를 내렸다.

 "경상과 이진은 주온을 머리에서 보좌하고 함께 당의 사직을 기울어트렸으며, 거란의 야율살라아발은 형을 배반하고 어머니를 버렸으며 은혜를 저버리고 나라를 배신하였으니, 의당 조암 등과 더불어 저자에서 족주해야 하며, 남은 문무 장리들에서부터는 일절 묻지 않는다."

 또 조서를 내려서 주온과 주우정을 추가로 폐위시켜서 서인으로 삼고 그 종묘의 신주를 훼손하였다.

 段凝、杜晏球上言:〈上,時掌翻。〉「偽梁要人趙巖、趙鵠、張希逸、張漢倫、張漢傑、張漢融、〈【張:「融」作「俊」。】〉朱珪等,竊弄威福,殘蠹群 生,不可不誅。」詔:「敬翔、李振首佐朱溫,共傾唐祚;契丹撒刺阿撥叛兄棄母,負恩背國,〈撒刺阿撥奔梁,見二百七十卷貞明明年。背,蒲妹翻。〉宜與巖等 並族誅於市;自餘文武將吏一切不問。」又詔追廢朱溫、朱友貞為庶人,毀其宗廟神主。

 

 황제가 양과 더불어 하에서 싸우면서, 양의 공신좌상도지휘사인 육사탁이 활을 잘 쏘았고, 항상 화살대 위에 스스로 성명을 새겼으며 황제를 쏘았고 말안장을 맞추자 황제는 화살을 뽑아서 그것을 감추었다.

 이에 이르러 유사탁이 무리를 좇아 함께 항복하자 황제가 화살을 꺼내어 그에게 보이자 육사탁이 땅에 엎드려 대죄하니, 황제는 위로하고 그를 석방하고서 얼마 안 있어 용무우상도지휘사를 제수하였다.

 帝之與梁戰於河上也,梁拱宸左廂都指揮使陸思鐸善射,常於笴上自鏤姓名,〈笴,古我翻,又公旱翻,箭莖也。鏤,郎豆翻。〉射帝,中馬鞍,〈射,而亦翻。中,竹仲翻。〉帝拔前藏之。至是,思鐸從眾俱降,帝山箭示之,思鐸犬地待罪,帝慰而釋之,尋授龍武右廂都指揮使。

 

 두노혁이 아직도 위에 있어서 추밀사 곽숭도에게 권행중서사를 하게 명령하였다.

 양의 여러 번진이 조금씩 들어와서 조현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표문을 올려 대죄하였는데 황제는 모두 그들을 위로하고 풀어주었다. 송주(하남 상구)절도사 원상선이 가장 먼저 와서 입조하엿고 섬주(삼문협)유후 곽언위가 그 다음이었다.

 원상선은 진귀한 재화 수십만을 연에 싣고 와서 유부인· 권귀한 사람들· 영관(광대 배우)· 환자들에게 두루 뇌물을 주자 열흘 동안에 안팍의 사람들이 그를 다투어 칭찬하였으며 은총도 높고 남달랐다.

 以豆盧革尚在魏,命樞密使郭崇韜權行中書事。

梁諸藩鎮稍稍入朝,或上表待罪,帝皆慰釋之。宋州節度使袁象先首來入朝,陝州留後霍彥威次之。象先輦珍貨數十萬,徧賂劉夫人及權貴、伶官、宦者,旬日,中外爭譻之,〈譽,音余。〉恩寵隆異。

 

 19일에 위정의 절도사· 관찰사· 방어사· 단련사· 자사에서 여러 장교에 이르기까지 나란히 바꾸거나 고치는 것을 논의하지 않았고, 장교와 관리들 가운데 먼저 위정으로 도망한 사람에게도 일절 묻지 않았다.

 己丑,詔偽庭節度、觀察、防禦、團練使、刺史及諸將校,並不議改更,〈將,即亮翻。校,戶教翻。更,工衡翻。〉將校官吏先奔偽庭者一切不問。

 

 20일에 두노학이 위에서부터 도착하였다.

 24일에곽숭도에게 수사중을 덧붙여 주고 영성덕절도사로 하였다.

 곽숭도는 임시로 안팍의 일을 겸하고 계책을 모의하여 유익을 주면서 충성을 다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아서 자못 역시 인물을 천거하였지만 두노혁은 이룩된 것을 바디만 할 뿐이고 자르거나 올바로 고치는 일을 하지 않았다.

 26일에 활주유후 단응에게 성명을 하사하여 이소흠이라 하고 요주 자사 두안구를 이소안이라 하였다.

 庚寅,豆盧革至自魏。甲午,加崇韜守侍中,領成德節度使。〈賞決策滅梁之功也。〉崇韜權兼內外,謀猷規益,竭忠無隱,頗亦薦引人物,豆盧革受成而已,無所裁正。

 丙申,賜滑州留後段凝姓名曰李紹欽,耀州刺史杜晏球曰李紹虔。〈後各復其本姓名。〉

 

 27일에 양의 서도유수인 하남윤 장종석이 와서 조현하자 이름을 장전의로 회복시키니 패물과 말을 바친 것이 1천을 헤아렸는데, 황제의 아들인 이계급과 황제의 동생인 이존기 등에게 명령하여 형님으로 그를 섬기게 하였다.

 乙酉,梁西都留守河南尹張宗奭來朝,〈復名仕義,梁改張全義名見二百六十六卷太祖開平元年。〉獻幣馬千計;帝命皇子繼岌、皇弟存紀等兄事之。〈繼岌,皇嗣也,豈可兄事梁之舊臣!存紀,皇弟也,既使其子以兄事全義,又使其弟以兄事全義,唐之家人長幼之序且不明矣;是後中宮又從而父事之,嘻,甚矣夷狄之俗好貨而已,豈知有綱常哉!〉

 

 황제는 양 태조의 묘를 파헤쳐서 관을 쪼개고 그의 시신을 불태우려고 하였으나 장전의가 말씀을 올렸다.

 "주온은 비록 나라의 깊은 원수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은 이미 죽었고 형벌도 가할 수 없으며 그의 가문은 도륙되어 없어졋으므로 충분히 원수를 갚았으니, 빌건대 불태워나 쪼개지 않게 하여 성스런 은혜를 보존하십시오."

 황제는 이를 좇고 다만 궐실을 대패로 밀어내고 봉수를 깎앗을 뿐이었다.

 帝欲發梁太祖墓,斲棺焚其尸,全義上言:「朱溫雖國之深讎,然其人已死,刑無可加,屠滅其家,足以為報,乞免焚斲以存聖恩。」帝從之,但鏟其闕室,削封樹而已。〈張全義猶不忘梁祖河陽之恩。鏟,初限翻。削其封樹者,隳其墳,赭其山也。〉

 

 28일에 천평(운주)절도사 이사원에게 겸중서령을 덧붙여 주고 북경유수 이계급을 동경유수· 동평장사로 삼았다.

 戊戌,加天平節度使李嗣源兼中書令;以北京留守繼岌為東京留守、同平章事。〈時以鎮州為北京,魏州為東京。〉

 

 

 ㉑. 황제는 사신을 파견하여 선유하여 여러 도를 달래게 하였는데, 양에서 임명한 절도사 50여 명이 모두 표문을 올리고 들어와서 진공하였다.

 ㉑. 帝遣使宣諭諭諸道,梁所除節度使五十餘人皆上表入貢。

 

 초왕 마은은 그의 아들인 아내마보도지휘사 마희범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알현하게 하고 홍· 악행영도통의 인장을 바치고 본도에 있는 장리들의 명적을 올렸다

 楚王殷遣其子牙內馬步都指揮使希範入見,〈見,賢遍翻。〉納洪、鄂行營都統印,〈梁命殷為洪、鄂行營都統。〉上本遣將吏籍。〈上,時掌翻。〉

 

 형남절도사 고계창이 황제가 양을 멸망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당묘의 휘를 피하여 이름을 고계흥이라 고치고 스스로 들어와서 조현하려고 하였는데 양진이 말하였다.

 "당은 천하를 잡어 삼킬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군사를 엄히 다스리고 험한 곳을 지키면서도 오히려 스스로 지키지 못할까를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수천 리를 가서 들어가서 조현하시려 합니까? 또 공께서는 주씨이 옛 장수이어서 어찌 저들이 원수로서 서로 만나지 않을지 알겠습니까?"

 고개홍이 좇지 않았다.

 

 荊南節度使高季昌聞帝滅梁,避唐廟諱,更名季興,〈以獻祖諱國昌也。更,工衡翻。〉欲自入朝,梁震曰:「唐 有吞天下之志,嚴兵守險,猶恐不自保,況數千里入朝乎!且公朱氏舊將,〈高季昌為梁將事始見二百六十三卷唐昭宗天復二年。〉安知彼不以仇敵相遇乎!」季興不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