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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극하는 진왕이존욱/秋分節中候蟄蟲塊(壞·培·啓)戶2日(陰8/23)庚辰

solpee 2021. 9. 29. 15:53

《後唐紀1 莊宗 同光 元年》〈癸未, 923年〉

 

 ①. 봄, 2월에 진왕은 교서를 내려서 백관을 두고, 네 진의 판관들 가운데 앞선 왕조(唐)의 사족을 선발하여 재상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하동절도판관 노질이 그것이 되기에는 으뜸이었으나 노질이 굳게 사양하며 의무절도판관 두노혁과 하동절도판관 노정을 그것으로 삼기를 요청하니, 왕은 즉시 두노혁과 노정을 불러서 행대 좌· 우승으로 하고 노질을 예부상서로 삼았다.

 ①. 春,二月,晉王下教置百官,於四鎮判官中選前朝士,欲以為相。〈四鎮,河東、魏博、易定、鎮冀。朝,直遙翻。相,息高翻;下同。〉河東節度判官盧質為之首,質固辭,〈盧質慢罵晉王諸弟,又能辭相位於惟新之朝,是必有見也。〉請以義武節度判官豆盧革、河東觀察判官盧程為之;王即召革、程拜行臺左、右丞相,〈考異曰:薛史唐紀作「盧澄」。今從實錄、莊宗列傳。〉以質為禮部尚書。

 

 후량 황제는 병부시랑 최협 등을 파견하여 오월왕 전류를 오월국왕으로 삼도록 책명하게 하였다.

 22일에 전류는 비로소 나라를 세웠으며 의장과 호위 호칭은 대부분 천자의 제도와 같이 하니, 사는 곳을 궁전이라 하고 부서를 조정이라 하였으며, 교령을 내려서 영내를 통할하는 것을 제칙이라 하고 장리들이 모두 칭신하였으나 오직 연호만은 고치지 않았으며, 표문이나 상소를 올리면서 오월국이라고 호칭하였고 軍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梁主遣兵部侍郎崔協等冊命吳越王鏐為吳越國王。丁卯,鏐始建國,儀衛名稱多如天子之制,〈稱,尺證翻。〉謂所居曰宮殿,府署曰朝廷,教令下統內曰敕,將吏皆稱臣,〈將,即亮翻。〉惟不改元,表疏稱吳越國而不言軍。〈以建國,不肯復稱鎮海、鎮東軍節度。〉

 

 청해절도사· 겸시중인 전전관을 진해· 진동유후로 삼고 군부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백관을 두었는데, 승상· 시랑· 낭중· 원외랑· 객성사 등의 사직을 두었다.

 以清海節度使兼侍中傳瓘為鎮 海、鎮東留後,總軍府事。置百官,有丞相、侍郎、郎中、員外郎、客省等使。〈使,疏吏翻。考異曰:十國紀年:「鏐功臣、諸子領節制,皆置而後請命。居室服 御,窮極侈靡,末年荒恣尤甚。錢氏據兩浙逾八十年,夕厚貢獻,內事奢僭,地狹民眾,賦斂苛暴,雞魚卵菜,纖悉收取。斗升之逋,罪至鞭背。每笞一人,則諸案使各持其簿列於庭,先唱一簿,以所負多少為數;笞已,次吏復唱而笞之,盡諸簿乃止,少者猶笞數十,多者至五百餘,訖于國除,人苦其政。」吳越備史稱:鏐節儉,衣衾用紬布,常膳惟襷漆器,寢帳壞,恭穆夫人欲易以青繒,鏐不許。嘗歲除,夜會子孫鼓琴,未數曲,止之,曰:『聞者以我為長夜之飲,』遂罷。」錢易家話稱:「鏐公宴不貳羹胾,衣必三濣然後易。」劉恕以為錢元瓘子信撰吳越備史、備史遺事、忠懿王勳業志、戊申英政錄,弘倧子易撰家話,俶子惟演撰錢氏慶系圖譜、家王故事、秦國王貢奉錄,故吳越五王行事失實尤多,虛美隱惡,甚於他國。按錢鏐起於貧賤,知民疾苦,必不至窮極侈靡,其奢汰暴斂之事蓋其孫所為也。今從家話。

 

 ④. 진왕이 위주 아성의 남쪽에 단을 쌓앗는데, 여름 4월 25일에 단에 올라가서 제사를 지매며 상제에게 고하고 드디어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당이라 하였으며, 크게 사면하고 연호(天祐 20년을 同光 원년)를 고쳤다. 어머니인 진국태부 조씨를 높여서 황태후라 하고, 적모인 진국부인 유씨를 황태비라 하였다.

 ④. 晉王築壇於魏州牙城之南,夏,四月,己巳,升壇,祭告上帝,遂即皇帝位,〈曰遂者,先有即位之心,而今遂其事。〉國號大唐,大赦,改元。〈因唐國號,改天祐年號為同光。〉尊母晉國太夫曹氏為皇太后,嫡母秦國夫劉氏為皇太妃。〈君子以是知帝之不終。〉

 

 두노혁을 문하시랑으로 삼고 노정을 중서시랑으로 삼으며, 나란히 동평장사로 하였다. 곽승도와 장거한을 추밀사로 삼고, 노질과 풍도를 한림학사로 삼으며, 장헌을 공부시랑· 조용사로 삼고, 또 의무 장서기인 이덕휴를 어사중승으로 삼았다. 이덕휴는 이강의 손자이다.

 以豆盧革為門下侍郎,盧程為中書侍郎,並同平章事;郭崇韜、張居翰為樞寧使,〈徐無黨曰:樞密使,唐故事宦者為之,其職甚微,至此始參軍士人,而與宰相權任鈞矣。余按唐末兩樞密與兩神策中尉,號為四貴,其職非甚微也,特專用宦者為之耳。項安世曰:唐於政事堂後列五房,有樞密房以主曹務,則樞密之要,宰相主之,未始他府;其後寵任宦人,始以樞密歸之內侍。〉盧質、馮道為翰林學士,張憲為工部侍郎、租庸使,〈宋白曰:租庸使自天寶三年韋堅始。〉又以義武掌書記李德林為御史中丞。德休,絳之孫也。〈李絳相唐憲宗,有直聲。〉

 

 노정에게 조서를 내려 진양에 가서 태후와 태비를 책봉하게 하였다. 애초에, 태비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성품이 현명하고 투기를 하지 않았으며, 태후가 무황(이극용)의 시희가 되자 태비는 항상 무황에게 그녀를 잘 대우해 주라고 권고하였고, 태후도 역시 스스로 겸양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서로 심히 기뻐하였다.

 詔盧程詣晉陽冊太后、太后。初,太紀無子,性賢,不勡忌;太后為武皇侍姬,太妃常勸武皇善待之,〈晉王克用諡武皇帝。〉太后亦自謙退,由是相得甚歡。

 

 책명을 받게 되자 태비가 태후궁에 가서 축하를 하니 기쁜 색은 있었으나 태후는 겸언쩍어하며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태비가 말하였다.

 "바라건대, 우리 아이가 나라를 오랫동안 길게 누리기를 원하는데, 우리들이 죽어서 땅에 있게 되면 원릉의 주인이 있을 것이니, 나머지는 무엇을 말할 만한 것이겠는가?"

 이어서 서로 마주하며 흐느꼈다.

 及受冊,太妃詣太后宮賀,有善色,太后忸怩不自安。〈忸,女六翻。怩,女夷翻。〉太妃曰:「願吾兒享國久長,吾輩獲沒于地,園陵有主,餘何足言!」因相向歔欷。〈歔,音虛。欷,音希,又許既翻。〉

 

 두노혁과 노정은 모두 가볍고 천박하여 다른 능력이 없엇지만 황상은 그들이 의관의 계통이고 폐부의 원로(衣冠은 한족사대부, 覇府元僚는 막부의 실세 대관)이었으니, 그러므로 그들을 중용하였다.

 豆盧革、盧程皆輕淺無他能,上以其衣冠之緒,霸府元僚,故用之。〈按歐史,豆盧為世名族,革父瓚為唐舒州刺史、唐末之亂,革避地中山,為王處直判官。盧程不知其家世何人,唐昭宗時舉進士,為鐵出使巡官,唐末避亂,變服為道士,遊燕、趙間。豆盧革為義武節度判官,盧汝弼為河東節度副使,二人皆故唐名族,與程門地相等,因共薦為河東節度推官。帝議擇相,而唐公卿故家遭亂喪亡且盡,盧汝弼、蘇循已死,盧質又辭,故用革、程。興王之君,命相如此,天下事可知矣。〉

 

 애초에, 이소굉이 중문사가 되자, 곽숭도가 그를 도왔었다.

 이에 이르러 유주에서부터 불러서 돌아오니, 곽숭도는 그의 옛날 사람의 지위가 자기 위에 잇는 것을 싫어하여, 마침내 장거한을 추밀사로 삼고 이소굉을 선휘사로 삼아 줄 것을 천거하니, 이소굉이 이로 말미암아 그에게 한스러워하였다.

 잔거한은 온화하고 근신하며 일을 두려워하니, 군국의 기밀과 정사는 모두 곽숭도가 이를 관장하였다.

 初,李紹宏為中門使,郭崇韜副之。至是,自幽州召還,〈梁貞明五年,李紹宏出幽州事見上卷。〉崇韜惡其舊人位在己上,〈惡,烏路翻。〉乃薦張居翰為樞密使,以紹宏為宣徽使,紹宏由是恨之。〈唐制,宣徽使在樞密使之下,且權任不及遠甚。〉居翰和謹畏事,軍國機政皆崇韜掌之。

 

 지탁무사 공겸이 스스로 재능이 있고 부지런하고 본받을 만하여 응당 조용사로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엿는데, 무리들이 논의하면서 공겸은 사람이 미천하고 지위는 한미하다 하여 중요한 직임을 갑자기 총괄하기에는 마땅하지 않다고 하니 그러므로 곽숭도가 장헌을 추천하고 공겸으로 하여금 그를 부사로 삼게 하였는데 공겸도 역시 기뻐하지 않았다.

 支度務使孔謙自謂才能勤效,應為租庸使;眾議以謙以微地寒,不當遽總重任,〈孔謙,魏州孔目吏也,晉王得魏州,以為支度務使。〉故崇韜薦張憲,以謙副之,謙亦不悅。

 

 위주(하북 대명)를 흥당부라고 하고 동경을 건설하였으며, 또 태원부에 서경을 건설하고, 진주(하북 정정현)를 진정부라고 하고 북도를 건설하였다.

 以魏州為興唐府,建東京;〈薛居正五代史:升魏州為東京興唐府,改元城為興唐縣,貴鄉為廣晉縣。〉又於太原府建西京,又以鎮州為真定府,建北都。

 

 위박절도파관인 왕정언을 예부상서로 삼고 행흥당윤으로 삼았으며, 태원 마보도우후인 맹지상을 태원윤으로 삼고 서경부유수에 충임하였다. 노주 관찰판관인 임환을 공부상서로 삼고 진정윤을 겸하게 하여 북경부유수에 충임하였고, 황제의 아들인 이계급을 북도우수· 흥성궁사로 삼고, 판육군제위사로 삼았다. 당시에 당국이 소유한 것은 13개 절도와 50주였다.

 以魏博節度判官王正言為禮部尚書,行興唐尹;太原馬步都虞候孟知祥為太原尹,充西京副留守;潞州觀察弮官任圜為工部尚書,兼真定尹,充京副留守;〈「京」,當作「都」。〉皇子繼岌為北都留守、興聖宮使,判六軍諸衛事。〈按後唐洛陽大西宮興聖宮。此時未得洛陽, 當以魏州府舍為興聖宮。宋白曰:唐莊宗即位於魏州,宰相豆盧革因進擬為興聖宮,以皇子繼岌為興 聖宮使。〉時唐國所有凡十三節度、五十州。〈十二節度,天雄、成德、義武、橫海、盧龍、大同、振武、鴈門、河東、護國、晉絳、安國、昭義。五十州,魏、 博、貝、澶、相、鄆、洺、磁、鎮、冀、深、趙、易、祁、定、滄、景、德、瀛、莫、幽、涿、檀、薊、順、營、平、蔚、朔、雲、應、新、媯、儒、武、忻、代、 嵐、石、憲、麟、府、并、汾、慈、隰、澤、潞、沁、遼,凡五十州。而昭義領澤、潞二州,己附于梁,止有十二節度、四十八州耳。〉

 

 윤4월에 황제의 증조인 주야집의를 추존하여 의조 소열황제라 라고, 할아버지인 이국창을 헌조 문황제라 하였으며, 아버지인 진왕을 태조 무황제라 하였다. 진양(태원)에 종묘를 세우고, 고조· 태종· 의종· 소종으로 의조 이하에 이르게 하여 칠실을 만들었다.

 閏月,追尊皇曾祖執宜曰懿祖昭烈皇帝,祖國昌日獻祖文皇帝,考晉王曰太祖武皇帝。立宗廟於晉陽,以高祖、太宗、懿宗、昭宗洎懿祖以下為七室。〈唐廟四,親廟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