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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의 南下1 /秋分節(04:21)初候雷始收聲4日(陰8/20)丁丑

solpee 2021. 9. 25. 16:45

《後梁紀4 均王 貞明 3年》〈丁丑, 917年〉

 

 ④. 애초에, 유주 북쪽으로 700리인 곳에 유관이 있고 아래에는 유수가 있어 바다로 통하였다. 유관 동북쪽에서부터 바다를 따라서 길이 있는데, 길의 좁은 곳은 겨우 몇 자 정도인데다 옆은 모두 어지러운 산이고 높고 험준하여 넘을 수가 없었다. 북으로 가서 진우구에 이를 즈음에, 옛날에는 팔방어군을 설치하고 토착 병사를 모집하여 그곳을 지켰으며, 전조는 모두 군대의 양식으로 공급하고 계에는 들이지 아니하였으며 유주에서는 해마다 솜이 도착하면 전사의 옷으로 제공하였다.

 ④. 初,幽州北七百里有渝關,〈渝關入營州界及平州石城縣界。漢書音義:渝,音喻,今讀如榆。〉下有渝水(洋河)通海。自關東北循海有道,道狹處纔數尺,旁皆亂山,高峻不可越。比至進牛口,〈「比」,當作「北」。〉舊置八防禦軍,募土兵守之,〈歐史曰:渝關東臨海,北有兔耳、覆舟山(箕山。亦作箕屋山。即今山东莒县东北一百里五山。《淮南子· 墜形训》),山皆斗絕。並海東北有路,狹僅通車,其旁地可耕植。唐時置東硤石、西硤石(在今河北省抚宁县榆关附近)、淥疇、米磚、長楊、黃花、紫蒙(黄岭县: 汉乐浪郡镂方县地)、白狼城(延安 北300公里)以扼之。 宋白曰:渝關關城下有渝水入大海。其關東臨海,北有兔耳山、覆舟山,山皆斗峻,山下尋海岸東北行,狹處纔通一軌。三面皆海,北連陸關,西亂山至進牛柵凡六 口,柵戍相接,此所以天限戎狄者也。〉田租皆供軍食,不入於薊,〈薊,音計。〉幽州歲致繒纊以供戰士衣。

 

 매년 일찍이 수확하여 청야하고 성벽을 견고하게 하고서 거란을 기다렸는데, 거란이 도착하면 번번이 성벽을 폐쇄하고 싸우지 아니하고 그들이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날쌔고 용감한 병사를 선발하여 좁은 곳을 점거하고 그들을 맞게 하여 거란이 항상 이로움을 잃고 도주하였다.

 每歲早穫,清野堅壁以待契丹,契丹至,輒閉壁不 戰,俟其去,選驍勇據隘邀之,〈幽州盧龍節度治薊縣。繒,慈陵翻。纊,苦謗翻。隘,烏懈翻。〉契丹常失利走。

 

 토병들이 모두 스스로 논밭을 만들었는데 힘써 싸워서 공로가 있으면 훈급을 하사하고 상을 덧붙여 주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거란이 감히 가벼이 생각하여 들어와서 침구하지 않았다. 주덕위가 노룡절도사가 되자, 용기를 믿고 변방의 방비를 수축하지 않았다가 드디어 유관의 험요한 곳을 잃으니, 거란에서는 매번 영· 평 사이에서 풀을 먹이고 길렀다. 주덕위는 또 유주의 옛날 장수들 가운데 명망 있는 사람을 꺼려서 때때로 그들을 죽였다.

 土兵皆自為田園,力戰有功則賜勳加賞,〈勳,勳級也。〉由是契丹不敢輕入寇。及周德威為盧龍節度使,恃勇不脩邊備,遂失渝關之險,契丹每芻牧於營、平之間。〈金虜節要曰:燕山之地,易州西北乃金坡關,昌平縣之西乃居庸關,順州之地乃古北口,景州之東北乃松亭關,平州之東乃渝關,渝關之東即金人來路也。此數關皆天造地設以分蕃、漢之限,一夫守之可以當百。本朝復燕之役,若得諸關,則燕山之境可保。然關內之地,平、灤、營三州,自後唐陷於阿保機,改平州為遼興府,以營、灤二州隸之,號為平州路。至石晉之初,耶律德光又得燕山、檀、順、景、薊、涿、易諸州,建燕山為燕京,以轄六郡,號燕京路,而與平州自成兩路。海上議割地,但云燕、雲兩路而已,初謂燕山路盡得關內之地,殊不知燕山、平州盡在關內而異路也。破遼之後,金人復得平州路據之,故阿離不後由平州入寇,乃當時議燕、雲不明地里之故。又金虜行程云:灤州,古無之。唐末阿保機攻陷平、營,劉守光據幽州,暴虐,民多亡入虜中,乃築此城。營州古柳城郡,舜所築也,乃殷之孤竹國,漢、唐遼西地。其城外多大山,高下皆石,不產草木,地當營室,故以為名。自營州東至渝關,並無保障,沃野千里,北限大山,重岡複嶺,中有五關,唯渝關、居庸可以通餉饋,松亭、金坡、古北口止通人馬,不可行車。其山之南,則五穀百果、良材美木,無所不有,出關未數里則地皆瘠鹵,豈天設此以限華、夷乎﹖〉德威又忌幽州舊將有名者,往往殺之。

 

 오왕이 사자를 파견하여 거람주에게 맹화유(猛火油: 석유 베트남 산 水戰用)를 보내며 말하였다.

 "성을 공격하면서 이 기름을 가지고 불을 붙여 누각과 망루를 불태우시오. 적이 물을 그곳에 뿌리면 불길이 더욱 거세게 될 것이오."

 거란주가 크게 기뻐하며 즉시 기병 3만을 선발하여 유주를 공격하려고 하자, 술률후가 그를 비웃으며 말하였다.

 吳王遣使遺契丹主以猛火油,曰:「攻城,以此油然火焚樓櫓,敵以水沃之,火愈熾。」〈南蕃志:猛火油出占城國,蠻人水戰,用之以焚敵舟。遺,于季翻。〉契丹主大喜,即選騎三萬欲攻幽州,述律后哂之曰:〈哂,失忍翻。〉

 

 "어찌 기름을 시험하려고 한 나라를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서 장막 앞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거란주에게 말하였다.

 "이 나무가 껍질이 없으면 살 수 있습니까?"

 거란주가 말하였다.

 "살 수 없지요."

 술률후가 말하였다.

 "유주성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다만 3천의 기병을 데리고 그 옆에 매복시켜서 그들의 사방의 들팜을 노략질하게 하여 성 안에 식량을 없게 하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성은 스스로 곤핍할 것인데, 어찌 반드시 이처럼 조급하게 움직이며 가볍게 거동하십니까? 만의 하나 이기지 못하여 중국을 비웃게 한다면 우리 부락 역시 해체될 것입니다."

 거란주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豈有試油而攻一國乎!」因指帳前樹謂契丹主曰:「此樹無皮,可以生乎﹖」契丹主曰:「不可。」述律后曰:「幽州城亦猶是矣。吾但以三千騎伏其旁,掠其四野,使城中無食,不過數年,城自困矣,何必如此躁動輕舉!萬一不勝,為中國笑,吾部落亦解體矣。」契丹主乃止。〈婦人智識若此,丈夫愧之多矣。此特阿保機因其能勝室韋,從而張大之以威鄰敵耳。就使能爾,曷為不能止德光之南牧,既內虛其國,又不能為根本之計,而終有木葉山之囚乎﹖〉

 

 3월에 노문진이 거란의 군사를 이끌고 신주(탁록)를 급히 공격하니, 자사인 안금전이 지킬 수 없게 되어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으며, 노문진이 그의 부장인 유은을 자사로 삼고 그곳에서 지키게 하였다. 진왕이 주덕위로 하여금 하동(태원)· 진(성덕치소)· 정(의무치소)의 군사를 합하여 그곳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열흘이 되어도 이기지 못하였다. 거란주가 무리 30만을 인솔하고 그곳을 구원하니 주덕위는 중과부적으로 크게 거란에게 패배하여 도망하여 돌아갔다.

 三月,盧文進引契丹兵急攻新州,刺史安金全不能守,棄城走;文進以其部將劉殷為刺史,使守之。晉王使周德威合河東、鎮、定之兵攻之,旬日不克。契丹主帥眾三十萬救之,德威眾寡不敵,大為契丹所敗,〈帥,讀曰率。敗,補邁翻。〉奔歸。

 

 

 ⑥. 거란이 이긴 기세를 이용하여 나아가서 유주를 포위하고 겉으로는 무리 1백만이 있다고 소리쳤으며, 털로 짠 담요로 만든 수레와 군막이 산택을 가득 메웠다.

 노문진이 그들에게 성을 공격하고 땅굴 파는 법을 가르치고 밤낮으로 사면에서 함께 전진하자, 성 ㅏㄴ의 동굴 속에서 기름을 불태워서 그들을 맞이하였으며, 또 토산을 만들어 성에 가까이가게 하니, 성 안에 있는 동을 녹여서 그들에게 뿌려서 하루에 죽이는 것이 1천을 헤아렸지만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중지하지 않았다. 

 ⑥. 契丹乘勝進圍幽州,聲言有眾百萬,氈車毳幕彌漫山澤。〈毳,充芮翻,獸毛縟細者為毳。〉盧文進教之攻城,為地道,晝夜四面俱進,城中穴地然膏以邀之;又為土山以臨城,城中鎔銅以灑之,日殺千計,而攻之不止。

 

 주덕위는 샛길로 사자를 파견하여 진왕에게 급보를 알리게 하였는데, 왕이 바야흐로 양과 더불어 서로 하에서 대치하고 있어서 군사를 나누려 하나 군사의 수가 적었고, 그들을 구언하지 말라고 하니 그들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제장들과 모의하였더니, 오직 이사원· 이존심· 염보만이 왕에게 그를 구원하라고 권고하였다.

 周德威遣間使詣晉王告急,〈間,古莧翻。〉王方與梁相持河上,欲分兵則兵少,欲勿救恐失之,〈【章:十二行本「之」下有「憂形於色」四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謀於諸將,獨李嗣源、李存審、閻寶勸王救之。

 

 왕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옛날에 태종이 한 명의 이정을 얻어서 힐리를 사로잡았는데 지금 나는 용맹한 장수 셋이 있으니 다시는 무엇을 걱정하랴!"

 이존심· 염보는 오랑캐에게서 치중을 없애면 형세는 오래 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곳의 들판에서 노략질할 것을 없애고서 식량이 다하여 스스로 돌아가기를 기다린 연후에 뒤꿈치를 쫓아서 그를 공격하자고 하였다.

 王喜曰:「昔太宗得一李靖猶擒頡利,〈事見一百九十三卷貞觀四年。〉今吾有猛將三人,復何憂哉!」〈褒而期之,以作三臣之氣。復,扶又翻。〉存審、寶以為虜無輜重,〈重,直用翻。〉勢不能久,俟其野無所掠,食盡自還,然後踵而擊之。

 

 이사원이 말하였다.

 "주덕위는 사직의 신하이며 지금 유주는 아침저녁 사이에 지켜지지 못하여 변고가 발생할까 두려운데, 무슨 겨를에 오랑캐가 쇠퇴하기를 기다리겠소? 신이 청컨대 몸소 선봉이 되어 그곳에 가게 해 주십시오."

 왕이 말하였다.

 "공의 말이 옳다."

 그날로 명령하여 군사를 정돈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진왕은 이사원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건리고 먼저 전진하게 하여 내수에 주둔하게 하고, 염보는 진과 정의 군사를 데리고 그의 뒤를 잇게 하였다.

 李嗣源曰:「周德威社稷之臣,今幽州 朝夕不保,恐變生於中,何暇待虜之衰!臣請身為前鋒以赴之。」王曰:「公言是也。」即日,命治兵。〈治,直之翻;下同。〉夏,四月,晉王命嗣燙將兵先進,軍于淶水,〈淶水縣屬易州。淶,音來。宋白曰:李嗣源時屯淶水,扼祁溝諸關以伺賊勢。〉閻寶以鎮、定之兵繼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