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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의 河北經營/秋分節(04:21)初候雷始收聲3日(陰8/19)丙子

solpee 2021. 9. 24. 15:05

《後梁紀4 均王 貞明 2年》〈丙子, 916年〉

 

 ⑤. 황제가 누차 유심에게 싸울 것을 재촉하였으나 유심이 성벽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진왕이 마침내 부총관인 이존심을 남겨 군영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는 貝州(하북 청하)에서 군사들을 위로하며 겉으로만 晉陽(태원)으로 돌아간다고 말하였다.

 유심이 이 소식을 듣고 魏州(하북 대명)를 기습할 것을 요청하니, 황제가 회보하여 말하였다.

 "지금 경내를 쓸어내는 일은 장군에게 맡길 것이며, 사직의 존망은 이 한 번의 출동에 달려있으니, 장군이 힘써 주기 바라오."

 ⑤. 帝屢趣劉鄩戰,〈趣,讀曰促。〉鄩閉壁不出。晉王乃留副總管李存審守營,〈守莘西之營也。〉自勞軍於貝州,〈勞,力到翻。勞圍張源德之軍也。〉聲言歸晉陽。鄩聞之,奏請襲魏州,帝報曰:「今掃境內以屬將軍,〈屬,之欲翻。〉社稷存亡,繫茲一舉,將軍勉之!」

 

 유심이 澶州(전주: 하북 내황 동남) 자사 양연직에게 명령하여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위주에서 회합하게 하였고, 양연직이 한밤중에 위주성 남쪽에 도착하자 성 안에서는 장사 500을 선발하여 몰래 나가서 그들을 공격하니, 양연직이 대비도 하지 못하였다가 무너지고 혼란하여 도주하였다.

 이튼날 아침에 유심은 莘縣(신현: 산동 신현)에서부터 무리를 다 모아서 성의 동쪽에 도착하여 양연직의 나머지 무리와 더불어 합치니, 이존심이 군영 안의 군사들을 이끌고 그들의 뒤를 밟았으며, 이사원은 성 안에 있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가서 싸우고, 진왕 역시 패주에서부터 도착하여 이사원과 더불어 그들의 전면에서 맞이하였다.

 鄩令澶州刺史楊延直引兵萬人會於魏州,延直夜半至城南,城中選壯士五百潛出擊之,延直不為備,潰亂而走。詰旦,鄩自莘縣悉眾至城東,與延直餘眾合,李存審引營中兵踵其後,李嗣源以城中兵出戰,晉王亦自貝州至,與嗣源當其前。

 

 유심이 그를 보자 놀라며 말하였다.

 "진왕이다!"

 군사를 이끌고 조금 물러나니 진왕이 그를 뒤밟았고 옛날의 元城(산동 신현 남)의 서쪽에 도착하여 이존심과 더불어 만났다.

 진왕이 서북쪽에 방진을 치고, 이존심은 동남쪽에 방진을 치니, 유심은 그 중간에 원진을 쳐서 사면에서 적을 맞았는데, 맞붙어 싸운 지가 오래 되어서 양의 군사는 대패하였고 유심은 수십 기병을 이끌고 포위를 뚫고 도주하였다.

 鄩見之,驚曰:「晉王邪!」引兵稍卻,晉王躡之,〈躡,尼輒翻。〉至故元城西,〈隋元城縣治古殷城,唐貞觀十七年併入貴鄉,聖曆二年又分貴鄉、莘縣置元城縣,治王莽城,開元十三年移元城治魏州郭下,故有故元城。古殷城在朝城東北十二里。〉與李存審遇。晉王為方陳於西北,存審為方陳於東南,鄩為圓陳於其中間,〈陳,讀曰陣。〉四面受敵;合戰良久,梁兵大敗,鄩引數十騎突圍走。

 

 양의 보병은 무릇 7만이었는데 진의 군사가 에워싸고 그들을 공격하니, 패졸이 나무에 올라갔고, 나무는 그것 때문에 꺾엿으며, 뒤쫓아서 하까지 도착하여서는 죽거나 물에 빠져서 거의 모두 없어졌다.(元城之戰)

 유심이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黎陽(여양: 하남 준현)에서 하를 건너 滑州(활주: 하남 활현)를 지켰다.

 梁步卒凡七萬,晉兵環而擊之,敗卒登木,木為之折,〈環,音宦。為,于偽翻。折,而設翻。〉追至河上,殺溺殆盡。鄩收散卒自黎陽渡河,保滑州。

 

 匡國(공국: 치소 허주)절도사 왕단이 은밀히 상소를 올려 關西(관서)의 군사를 징발하여 진양을 기습할 수 잇게 해 달라고 요청하니, 황제가 이를 좇았는데, 河中(하중)· 陝(섬)· 同華(동화)의 여러 진의 군사 도합 3만 명을 징발하여 陰地關(음지관: 산서 영석 서남)을 나가서 갑자기 진양성 아래에 도착하게 하여 밤낮으로 신속히 공격하였으며, 성 안에서는 대비하지 않아서 여러 관사에 있는 정장을 징발하고 시장 사람들을 몰아서 성에 올라 저항하며 지키게 하였으나 성이 거의 함락될 지경이 된 적이 서너 차례 되니 장승업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匡國節度使王檀密疏請發關西兵襲晉陽,〈去年五月王檀代牛存節屯河上。〉帝從之,發河中、陝、同華諸鎮兵合三萬,出陰地關,奄至晉陽城下,晝夜急攻;城中無備,發諸司丁匠及驅市人乘城拒守,城幾陷者數四,〈幾,居依翻。〉張承業大懼。

 

 代北(대북: 산서 대현 북쪽)의 옛 장수인 안금전이 물러나서 태원에 머물고 있었는데 가서 장승업을 만나서 말하였다.

 "진양은 근본이 되는 땅이니 만약 이곳을 잃는다면 대업이 떠나게 되오. 제가 비록 늙고 병들었으나 가정과 국가를 겸하여 걱정하니, 청컨대 창고에 있는 갑옷을 있는 대로 주신다면 공을 위하여 그들을 공격할 것이오."

 장승업이 즉시 그에게 주었다.

 代北故將安金全退居太原,〈安金全從晉王克用起於代北,故云故將。〉往見承業曰:「晉陽根本之地,若失之,則大事去矣。僕雖老病,憂兼家國,〈言晉陽若陷,則國破家亡。〉請以庫甲見授,為公擊之。」〈為,于偽翻。〉承業即與之。

 

 안금전은 그의 자제들과 퇴역한 장수의 가문에서 얻은 수백 명을 인솔하고 밤중에 북문을 나가서 양의 군사를 양마성 안에서 공격하니 양의 군사는 크게 놀라서 이끌고 물러갔다. 昭義(소의: 치소 노주)절도사 이사소는 진양에 침략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장 석군립을 파견하여 500의 기병을 거느리고 그곳을 구원하게 하엿는데, ㅓ군립은 아침에 上黨(상당)을 출발하여 저녁에 진양에 도착하였다.

 金全帥其子弟及退將之家得數百人,〈帥,讀曰率。將,即亮翻。〉夜,出北明,擊梁兵於羊馬城內;梁兵大驚,引卻。昭義節度使李嗣昭聞晉陽有寇,遣牙將石君立將五百騎救之;君立朝發上黨,夕至晉陽。〈按九域志,上黨至晉陽五百餘里。輕騎疾馳,朝發夕至,何其速也!〉

 

 양의 군사들이 汾河橋(분하교: 태원 남쪽 분수교)를 꽉 잡아 조였지만 석군립이 그들을  쳐서 격파하고 지름길로 성 아레에 도착하여 크게 소리 질러 말하였다.

 "소의시중의 대군이 도착하였다."

 드디어 성으로 들어갔다.

 방중에 안금전 등과 더불어 여러 문으로 나누어 나가서 양의 군사를 공격하니, 양의 군사들 가운데 죽거ㅏ 부상을 당한 병사가 열에 두셋이었다.

 梁兵扼汾河橋,〈汾橋在晉陽城東南汾水上。〉君立擊破之,徑至城下大呼曰:「昭義侍中大軍至矣。」〈呼,火故翻。李嗣昭鎮昭義,官侍中,故稱之。〉遂入城。夜,與安金全等分出諸門擊梁兵,梁兵死傷什二三。

 

 이튿날 아침에 왕단이 군사를 이끌고 크게 노략질을 하고 돌아왔다. 진왕은 뽐내는 성격이어서 책략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안금전 등에게 상을 모두 내리지 않았다.

 양의 군사가 진양성 아래에 있었을 적에 대동(운주)절도사 하덕륜의 부하 군사들 대부분이 도망하여 양의 진영으로 들어갔는데, 장스업은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하덕륜을 검거하여 그의 목을 베었다.

 詰朝,王檀引兵大掠而還。〈詰,去吉翻。還,從宣翻,又如字。〉晉性矜伐,以策非己出,故金全等 賞皆不行。〈虞書曰:汝惟不矜,天下莫與汝爭能;汝惟不伐,天下莫與汝爭功。晉王矜伐而有功者不賞,此其所以能取天下而不能守天下也。〉

梁兵之在晉陽城下也,大同節度使賀德倫部兵多逃入梁軍,張承業恐其為變,收德倫,斬之。〈張承業之權略,烏可以宦者待之哉。

 

 ⑥. 3월 1일에 진왕이 衛州(위주: 하남 위휘)를 공격하니, 8일에 자사인 미소가 그에게 항복하였다. 또 惠州(혜주: 하북 자현)를 공격하자 자사인 근소가 도주하였으나, 그를 사로잡아 목을 베고, 혜주를 회복시켜 磁州(자주)라 하였다. 진왕이 魏州로 돌아갔다.

 ⑥. 三月,乙卯朔,晉王攻衛州,壬戌,刺史米昭降之。又攻惠州,刺史靳紹走,擒斬之,復以惠州為磁州。〈唐天祐三年以「磁」「慈」聲相近,改磁州為惠州,是時政在朱氏。晉既取之,因復舊州名。靳,居焮翻。〉晉王還魏州。

 

 ⑪. 6월에 진인들이 邢州(형주: 하북 형대)를 공격하니, 保義(형주)절도사 염보가 막으며 지켰는데, 황제가 착생도지휘사 장온을 파견하여 군사 500을 거느리고 그들을 구원하게 하였으나 장온은 그의 무리를 데리고 진에 항복하였다.

 ⑪. 六月,晉人攻邢州,保義節度使閻寶拒守;帝遣捉生都指揮使張溫將兵五百救之,溫以其眾降晉。

 

 ⑰. 진왕이 스스로 거느리고 邢州를 공격하자 昭德(소덕:상주)절도사 장균이 相州(상주)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진인들이 다시 상주를 천웅군에 예속시키고 이사원을 자사로 삼았다.

 ⑰. 晉王自將攻邢州,昭德節度使張筠棄相州走;晉人復以相州隸天雄軍,〈去年梁分相州為昭德軍。相,息亮翻。〉以李嗣源為刺史。〈考異曰:劉恕廣本云筠奔東都,授左衛上將軍。莊宗實錄:「命李存審入城招撫,除昭德軍額,仍舊隸魏州,徙洺州刺史袁建豐為相州刺史。」按上四月,筠已遣人納款于晉,此復云走者,蓋始者文降,今為晉兵所迫故走耳。筠既降晉,今還猶得將軍者,蓋潛通款於晉,梁朝不知耳。明宗實錄云:「八月,張筠走,移帝為相州刺史,九月為安國節度使。」而莊宗實錄云:「時袁建豐為相州刺史。」按明宗實錄建豐傳云戰胡柳陂,建豐猶為相州,乃是天祐十五年十二月。蓋明宗初為相州,移邢州後方除建豐,莊宗錄誤書在張筠走下耳。〉

 

 진왕은 사람을 보내어 염보(후량의 보의절도사)에게 '상주가 이미 점령되었다.'는 것을 알리게 하고, 또 장온을 파견하여 원병을 인솔하고 성 아래에 도착하여 그를 달래게 하니, 염보가 성을 들어 항복하였으며, 진왕이 염보를 동남면초토사로 삼고 영천평절도사· 동평장사로 삼아 邢州를 진수하게 하였다.

 晉王遣人告閣寶以相州已拔,又遣張溫帥援兵至城下諭之,寶舉城降;〈告之以相州已拔,則彼知邢州之勢孤;示之以張溫已降,則彼知援兵之望絕;閻寶於是不能守矣。帥,讀曰率;下同。〉晉王以寶為東南面招討使,領天平節度使、同平章事;〈天平時屬梁,晉命閻寶遙領。〉以李存審為安國節度使,鎮邢州。〈邢州,梁保義軍;既入于晉,自此遂改為安國軍。考異曰:王溥五代會要、薛史地理志、樂史寰宇記皆云「梁建保義軍,唐同光元年改為安國軍。」而莊宗、明宗實錄列傳、薛史存審傳皆云「此年授安國節度使。」恐是纔屬晉即改軍額,會要等書誤云同光元年。

 

 ⑳. 진인들이 滄州(창주 동남)를 압박하자 順化(순화: 치소 창주)節度使 대사원이 성을 버리고 동도(개봉)로 도망하였는데, 창주의 장수인 모장이 성을 점거하고 진에 항복하였으며 진왕이 이사원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곳에서 진수하며 어루만지게 하니 이사원이 모장을 보내어 진양으로 가게 하였다.

 ⑳. 晉人以兵逼滄州,順化節度使戴思遠棄城奔東都;〈河朔盡歸于晉,滄州孤絕,戴思遠不能守。〉滄州將毛璋據城降晉,晉王命李嗣源將兵鎮撫之,嗣源遣璋詣晉陽。

 

 진왕이 이존심을 옮겨서 횡해절도사로 삼고 창주에서 진수하게 하고서 이사원을 안국절도사로 삼았다. 이사원이 안중회를 중문사로 삼고 심복으로 일을 맡기니, 안중회도 역시 이사원을 위하여 힘을 다하였다. 안중회는 응주(산서 응현)의 호인이다.

 晉王徙李存審為橫海節度使,鎮滄州,〈滄德自此屬晉,復改順化為橫海,從唐舊也。〉以嗣源為安國節度使。嗣源以安重誨為中門使,〈晉王封內,凡節鎮皆有中門使,其任即天朝樞密使也。〉委以心腹,重誨亦為嗣源盡力。重誨,應州胡人也。〈為,于偽翻。為安重誨為嗣源佐命張本。薛史曰:安重誨,其先本北部酋豪,父福遷,為河東將,救兗、鄆而沒。

 

 ㉒. 진인이 貝州를 포위하고서 해를 넘겼는데, 장원덕(패주자사)이 하북의 여러 주가 모두 진의 소유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하자고 하여 그의 무리들과 모의하니, 물들은 힘이 다한 후에 항복을 하자고 하였으나 죽음을 면하지 못할까 하여 두려워서 좇지 않고, 함께 장원덕을 죽이고 농성하며 굳게 지켰다.

 ㉒. 晉人圍貝州踰年,〈去年八月晉圍貝州。〉張源德聞河北諸州皆為晉有,欲降;謀於其眾,眾以窮而後降,恐不免死,不從;共殺源德,嬰城固守。

 

 성 안에서는 먹을 것이 다하여서 사람을 씹어서 양시을 삼으니 마침내 진의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나가서 항복을 하려해도 죽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갑옷을 입고 병기를 들고 항복하게 해주면 일이 안정된 다음에 그것을 풀겠소."

 城中食盡,噉人為糧,乃謂晉將曰:「出降懼死,請擐甲執兵而降,〈噉,徒濫翻。擐,音宦。〉事定而釋之。」

 

 진의 장수들이 이를 허락하자 그 무리 3천이 나와서 항복하였고, 이미 그렇게 하고 나서 갑옷을 벗자 그들을 포위하여서 전부 죽였다. 진왕은 모장을 패주 자사로 삼았다. 이에 하북은 모두 진에 들어갔으며 오직 黎陽(여양: 하남 준현) 만이 양을 위하여 지키고 있었다. 

 晉將許之,其眾三千出降,既釋甲,圍而殺之,盡殪。〈殪,壹計翻。考異曰:莊宗實錄:「賊將張源德固守貝州,既聞河北皆平而有翻然之志,詢謀於眾;群賊皆河南人;懼其歸罪,不從,因殺源德,噉人為糧,固守其城。王師歷年攻圍,賊既食竭,呼我大將曰:『今欲請罪,懼晉王不我赦。我將衿甲持兵而見,已即解之,如何﹖』報曰:『無便於此者。』賊眾三千,衿甲出降。我將甘言喻之,俱釋兵解甲。既而四面陳兵,皆殺之。」歐陽史死事傳曰:「晉王入魏,河北六鎮數十州之地皆歸晉,獨貝一州,圍之踰年不可下。城中食且盡,貝人勸源德出降,源德不從,遂見殺。」按源德若以不降而死,其眾當即降於晉,豈得猶拒守與晉邀約而後出哉!明是眾懼死不降耳。今從莊宗實錄。余謂若如通鑑去取,則張源德非一心守死者,不得與於死事傳。〉晉王以毛璋為貝州刺史。於是河北皆入於晉,惟黎陽為梁守。〈黎陽臨河,梁兵聲援猶接,又劉鄩守之,所以能自固。為,于偽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