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桀燕의 멸망/秋分節(04:21)初候雷始收聲2日(陰8/18)乙亥

solpee 2021. 9. 23. 16:32

《後梁紀3 均王 乾化 3年》〈癸酉, 913年〉

 

 ㊷. 노룡(今 高碑店)에 속하였던 것이 모두 진에 들어가니 연황 유수광이 홀로 유주성(今 涿州)을 지키며 거란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거란에서는 그에게 신용이 없어서 끝내 구원하지 않았다. 유수광은 누차 진에 항복을 받아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진인들이 그가 속인다고 의심하여 끝내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유수광은 성에 올라 주덕위에게 말하였다.

 ㊷. 盧龍巡屬皆入于晉,燕主守光獨守幽州城,求援於契丹;契丹以其無信,竟不救。守光屢請降於晉,晉人疑其詐,終不許。至是,守光登城謂周德威曰:

 

 "진왕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즉시 문을 열고 진흙을 머리에 바르고(泥首: 죄인을 표시하는 의식)

명령을 받을 것이오."

 주덕위가 진왕에게 아뢰게 하였다.

 11월 6일에 진왕은 감군 장승업을 권지군부사로 삼고, 스스로 유주에 가서, 23일에 단기로 성 아래에 도착하여 유수광에게 말하였다.

 "주온이 찬탈하여 반역하자 나는 본래 공과 더불어 하삭 오진의 군사를 합하여 당조를 부흥시키고자 하였소. 공은 그것을 잘 생각하여 꾀를 내지 않았고 마침내 저 사람이 미쳐서 참칭한 일을 모방하였소.

 진· 정 이수가 모두 머리를 숙이고 공을 섬겼으나 공은 일찍이 그들을 구휼하지 않았으므로 이리하여서 오늘의 전역이 있게 되었소. 장부의 성패가 모름지기 향하는대로 결정되는 것이니 공은 장차 어찌 하겠소?"

 「俟晉王至,吾則開門泥首聽命。」德威使白晉王。十一月,甲辰,晉王以監軍張承業權知軍府事,自詣幽州,辛酉,單騎抵城下,謂守光曰:「朱溫篡逆,余本與公合河朔五鎮之兵興復唐祚。〈五鎮,潞、鎮、定、幽、滄。「本」字下當有「欲」字。〉〈【章:十二行本正有「欲」字;孔本同。】〉公謀之不臧,乃效彼狂僭。鎮、定二帥皆俛首事公,〈鎮帥,王鎔;定帥,王處直。俛,音免。〉而公曾不之恤,是以有今日之役。〈守光攻易定,晉王救之;遂伐守光,事見上年。〉丈夫成敗須決所向,公將何如﹖」

 

 유수광이 말하였다.

 "오늘은 도마 위에 놓인 고기일 뿐이니, 오직 왕께서 판단하여 주시오."

 왕이 그를 더불어 불쌍히 여겨서 궁시를 꺾고 맹세하며 말하였다.

 "다만 나와서 서로 만나러 왓을 뿐이고, 보증하건데, 다른 생각은 없소."

 유수광이 다른 날을 기약하자고 말하였다.

 守光曰:「今日俎上肉耳,惟王所裁。」王憫之,與折弓矢為誓,〈折,而設翻。〉曰:「但出相見,保無怹也。」〈言不殺之。〉守光辭以他日。

 

 이보다 먼저 유수광이 아끼는 장수인 이소희가 대부분 유수광의 약정을 찬성하였으며, 말을 듣고 계책을 좇자 권력이 그 경내에서 그에게 기울었다. 이때에 이르러 유수광이 장차 나가서 항복하려고 하니 이소희가 이를 중지하게 하였다. 이날 저녁에 이소희는 성을 넘어 진 군영에 가서 또 성 안에서는 힘을 다할 것을 말하엿다.

 先是,守光愛將李小喜多贊成守光之惡,言聽計從,權傾境內。〈先,悉薦翻。〉至是,守光將出降,小喜止之。是夕,小喜踰城詣晉軍,〈【章:十二行本「軍」下有「降」字;孔本同;張校同。】〉且言城中力竭。

 

 24일에 진왕은 여러 군대를 독려하여 사면에서 성을 공격하여 그곳에서 이기고 유인공과 그의 처첩들을 사로잡았으며, 유수광은 처와 자식들을 인솔하고 도망하였다.

 25일에 진왕이 유주에 들어갔다.

 壬戌,晉王督諸軍四面攻城,克之,擒劉仁恭及其妻妾,守光帥妻子亡去。癸亥,晉王入幽州。〈唐昭宗乾寧二年劉仁恭據幽州,至是父子俱敗亡。帥,讀曰率。

 

 ②. 12월 3일에 진왕이 주덕위를 노룡절도사· 겸시중으로 삼고서 이사본을 진무절도사로 삼았다.

 걸연의 황제 유수광이 장차 창주로 도망하여 유수기에게 가려고 하는데 차가운 물을 건너다가 발이 동상에 걸렸으며, 또 길을 잃어 연락(밀운)의 경계에 도착하여서는 낮에는 구덩이와 계곡에 숨어 잇다가 여러 날 동안 먹지 못하자, 아내인 축씨로 하여금 농사꾼인 장사조의 집에서 먹을 것을 구걸하게 하였다. 장사조는 부인의 특이한 모습을 괴상하게 여겨서 유수광이 있는 곳을 물어 알아내어 그의 세 아들과 함께 그를 사로잡았다.

 ②. 庚午,晉王以周德威為盧龍節度使,兼侍中,以李嗣本為振武節度使。〈先是,周德威以破夾寨之功帥振武,今以平燕之功徙帥盧龍,以李嗣本代帥振武。歐史義兒傳,嗣本本鴈門張氏子。〉

燕主守光將奔滄州就劉守奇,〈劉守奇藉兵於梁以取滄州,事見上卷上年。〉涉寒,足腫,〈史炤曰:釋名曰:腫,鍾也,寒熱氣聚也。〉且迷失道,至燕樂之境,〈燕樂縣,後魏置,治白檀古城。唐長壽二年徙治新興城,屬檀州。宋白曰:燕樂、密雲二縣皆漢虒奚縣地。樂,音洛。〉晝匿阬谷,數日不食,令妻祝氏乞食於田父張師造家。師造怪婦人異狀,詰知守光處,〈詰,去吉翻。〉并其三子擒之。

 

 6일에 진왕이 바야흐로 연회를 베풀려고 하는데, 장리들이 유수광을 사로잡아 바로 그때에 도착하니, 왕이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이 어찌하여 손님을 피하여 깊은 곳에 간 것이오?"

 유인공과 아룰러 그를 관사에 두고 그릇과 의복 그리고 음식을 그들에게 하사하였다.

 왕이 장서기 왕함에게 명령하여 노포(露布: 戰勝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포백에 써서 장대에 걸고 돌아다니게 하는 것)를 기초하게 하였으나 왕함이 고사를 알지 못하여 그것을 포에 써서 사람을 파견하여 그것을 끌고 다니게 하였다.

 癸酉,晉王方宴,將吏擒守光適至,王語之曰:〈語,牛倨翻。〉「主人何避客之深邪!」并仁恭置之館舍,以器服膳飲賜之。王命掌書記王緘草露布,緘不知故事,書之於布,遣人曳之。〈魏、晉以來,每戰勝則書捷狀,建之漆竿,使天下皆知之,謂之露布。露布者,暴白其事而布告天下,未嘗書之於布而使人曳之也。文心雕龍曰:露布者,蓋露皮不封,布諸觀聽也。〉

 

 진왕이 운· 대에서부터 돌아가려고 하면서 조왕 왕용과 왕처직이 중산· 진정을 경유하여 정형에 갈 것을 요청하자, 왕이 이를 좇았다.

 13일에 진왕이 유주를 출발하는데 유인공 부자는 모두 노포 아래에서 형틀을 메고 있었다.

 晉王欲自雲、代歸,〈自幽州取山後路,歷雲、代等州至晉陽。〉趙王鎔及王處直請由中山、真定趣井陘,〈王處直,王鎔欲晉王取道中山、真定,各展迎賀之禮。趣,七喻翻。〉王從之。庚辰,晉王發幽州,劉仁恭父子皆荷校於露布之下。〈荷,下可翻,又音何。校,爻教翻。易曰:荷校滅耳。註云:校者,以木絞校者也,即械也;校者取其通名也。〉

 

 유수광의 부모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에게 욕을 하면서 말하였다.

 "역적 놈아, 우리 집안을 박살내고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유수광은 머리를 숙일 뿐이었다.

 守光父母唾其面而罵之曰:「逆賊,破我家至此!」守光俛首而已。〈俛,音免。〉

 

 17일에 정주에 도착하여 관성에서 묵었다.

 19일에 진왕은 왕처직과 함께 북악묘에 알현하였고, 이날에 행당에 도착하니 조왕 왕용이 길에 나와서 영접하고 알현하였다.

 甲申,至定州,舍于關城。丙戌,晉王與王處直謁北嶽廟;〈北嶽廟在恆山之大茂山;恆山在定州曲陽縣西北。〉是日,至行唐,〈行唐,漢南行唐縣,後魏曰行唐,唐屬鎮州。九域志:在州北五十五里。〉趙王鎔迎謁于路。

 

《後梁紀4 均王 乾化 4年》〈甲戌, 914年〉

 

 ③. 정월 15일에 유인공 부자를 결박하고 개서가를 부르며 진양에 들어가서, 19일에 태묘에 바치고, 스스로 유수광이 목을 베는 데에 나아갔다. 유수광이 큰소리로 말하였다.

 "나 유수광은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그러나 나 유수광에게 항복하지 말라고 가르친 사람은 이소희요."

 ③. 壬子,晉王以練膤劉仁恭父子,凱歌入于晉陽,〈膤,充夜翻,縶縛之也。戰勝得國而歸,故奏凱歌。〉丙辰,獻于太廟,自臨斬劉守光。守光呼曰:「守光死不恨,〈呼,火故翻。〉然教守光不降者,李小喜也。」〈事見上卷上年。〉

 

 왕이 이소희를 불러 그에게 증명하게 하니 이소희가 눈을 부릅뜨고 유수광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너는 안으로는 혼란하게 하고 금수같은 행위도 역시 내가 가르쳤다고 하느냐?"

 진왕은 그의 무례에 화가 나서 먼저 그의 목을 베었다.

 "나 유수광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는데 왕께서 패업을 이루려고 하신다면 어찌 나를 남겨두어서 스스로 보답하게 하지 않소?"

 王召小喜證之,小喜瞋目叱守光曰:〈瞋,昌真翻。〉「汝內亂禽獸行,亦我教邪!」〈行,下孟翻。〉王怒其無禮,先斬之。〈怒其無禮於舊君也。〉守光曰:「守光善騎射,王欲成霸業,何不留之使自效!」

 

 그의 두 아내인 이씨와 축씨가 그를 책망하며 말하였다.

 "황제께서는 일이 이미 이와 같이 되었는데, 살아도 무슨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즉시 목을 빼니 곧바로 죽였다. 유수광이 죽기에 이르자 울부짖는 소리와 애곡하며 기원하는 모습이 그치지 않았다.

 왕은 절도부사 노여필 등에게 명령하여 유인공을 형틀에 채워서 대주에 가게 하여 그의 심장을 잘라 피를 내어 선왕의 묘에 제사(유인공이 이극용을 배반하였다)를 지내게 하고, 그런 후에 그의 목을 베도록 하였다.

 其二妻李氏、祝氏讓日之曰:〈讓,責也。〉「皇帝,事已如此,生亦何益!」〈【章:十二行本「益」下有「妾請先死」四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退齋校同。】〉即伸頸就戮。守光至死號泣哀祈不已。〈史言劉守光畏死,婦人之不若。號,戶高翻。〉王命節度副使盧汝弼等械仁恭至代州,刺其心血以祭先王墓,然後斬之。〈以劉仁恭叛其父也。晉王葬其先王於代州鴈門縣,後名為建極陵。刺,七亦翻。〉

 

 어떤 사람이 조왕 왕용에게 유세하였다.

 "대왕께서 칭한 상서령은 바로 양의 관직입니다. 대왕께서는 이미 양과 더불어 원수가 되었으니 그 관직을 칭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또한 태종께서 천조한 이래로 감히 그 이름을 사용한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진왕이 맹주가 되어 있는데, 훈공은 높으나 지위가 낮으니 상서령을 그에게 양보함만 같지 못합니다."

 왕용이 말하였다.

 "좋다"

 或說趙王鎔曰:〈說,式芮翻。〉「大王所稱尚書令,乃梁官也,大王既與梁為讎,不當稱其官。且自太宗踐阼已來,無敢當其名者。〈唐太宗自尚書令即帝位,後之臣下率不敢當其名;唐之將亡,始以授藩帥。〉今晉王為盟主,勳高位卑,不若以尚書令讓之。」〈讓,遜也。〉鎔曰「善!」

 

 마침내 왕처직고 더불어 각기 사자를 파견하여 진왕을 추대하여 상서령으로 삼게 하자, 진왕이 세 번이나 사양하고 그런 후에 이를 받아들이고, 비로소 부를 열고 행대를 설치하니, 태종의 옛날 일과 같게 하였다.

 乃與王處直各遣使推晉王為尚書令,晉王三讓,然後受之,始開府置行臺如太宗故事。〈唐太宗置行臺事見高祖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