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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우정의 쿠데타 /白露節末候群鳥養羞5日(陰8/16)癸酉

solpee 2021. 9. 22. 05:52

《後梁紀3 太祖 乾化 2年》〈壬申, 912年〉

 

 ㉞. 영왕 주우규가 이미 찬탈하고 등극하니, 여러 오래된 장수들이 대부분 분노하였으므로 비록 굽혀서 은례를 덧붙여 주었으나 끝내는 기뻐하지 않았다. 고애사가 하중에 도착하자 호국절도사인 기왕 주우겸이 울면서 말하였다.

 "선황께서 수십 년 동안 기업을 개창하였는데, 전날에 궁액에서 변란이 일어나서 들려오는 소문이 심히 좋지 않았는데도 나는 번진의 자리만 지키고 있었으니 마음속으로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오."

 주우규는 주우겸에게 시중· 중서령을 덧붙여 주고 조서를 내려서 스스로 변호하고 또 그를 징소하였다.

 ㉞. 郢王友珪既篡立,諸宿將多憤怒,雖由加恩禮,終不悅。告哀使至河中,護國節度使冀王朱友謙泣曰:「先帝數十年開創基業,前日變起宮掖,聲聞甚惡,〈聞,音問。〉吾備位藩鎮,心竊恥之。」〈朱友謙本陝州牙將朱簡也,唐末附朱溫,賜名友謙,列於諸子,故因此聲友珪弒逆之罪。律以支法,臣弒君,子弒父,凡在官者殺無赦,則友珪之罪,凡為梁之臣子者皆得而誅之也。〉友珪加友謙侍中、中書令,以詔書自辨,且徵之。

 

 주우겸이 사자에게 말하였다.

 "세워진 사람이 누구인가? 선황의 안가가 처리되지 않았고 나는 또 낙양에 가서 죄를 심문해야 하는데 어찌하여서 징소한단 말인가?"

 8월 23일에 시위제군사 한경을 서면행영초토사로 삼고 모든 군대를 감독하여 주우겸을 토벌하게 하였다. 주우겸은 하중을 가지고 진에 귀부하여 구원을 요구하니, 9월 3일에 감화절도사 강희정을 하중초토사로 삼고 다시 한경으로 하여금 그를 돕도록 하였다.

 友謙謂使者曰:「所立者為誰﹖先帝晏駕不以理,吾且至洛陽問罪,何以徵為!」戊戌,以侍衛諸軍使韓勍為西面行營招討使,督諸軍討之。友謙以河中附於晉以求救,九月,丁未,以感化節度使康懷貞為河中都招討使,更以韓勍副之。

 

 ㊵. 양사후는 이미 위박의 무리를 얻었고, 또 도초토사를 겸임하였으며, 숙위하던 굳센 군사가 대부분 휘하에 있었고, 여러 진의 군사들을 모두 움직여 징발할 수 있었으므로 위엄과 기세가 심히 무거워서 마음으로 영왕 주우규를 경시하여 일을 만날 적마다 혼자서 행동하며 돌아보지 않았다.  주우규가 이를 걱정하여 조서를 보내어 그를 소환하며 말하였다.

 ㊵. 楊師厚既得魏博之眾,又兼都招討使,宿衛勁兵多在麾下,諸鎮兵皆得調發,〈調,徒釣翻。〉威勢甚重,心輕郢王友珪,遇事往往專行不顧。友珪患之,發詔召之,云

 

 "북쪽 변방의 군사기밀이 있는데, 경과 더불어 얼굴을 맞대고 논의하려고 하오."

 양사후가 장차 떠나려고 하는데, 그의 심복들이 모두 간하였다.

 "가시면 반드시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양사후가 말하였다.

 "나는 그의 사람됨을 아는데 비록 간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어떻게 하겠느냐?"

 마침내 정예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하를 건너 낙양으로 향해 가니, 주우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有北邊軍機,欲與卿面議。」師厚將行,其腹心皆諫曰:「往必不測。」師厚曰:「吾知其為人,雖往,如我何!」乃帥精兵萬餘人,渡河趣洛陽,〈帥,讀曰率。趣,七喻翻。〉友珪大懼。

 

 13일에 도문(都門: 성 외곽 높은 문)에 도착하여 군사를 밖에 머물게 하고, 10여 명과 더불어 들어와 알현하자, 주우규가 기뻐하여 달콤한 말과 겸손한 말로써 그를 기쁘게 하고 거만을 하사해 주었다.

 19일에 돌려 보냈다.

 丁亥,至都門,〈城外郭門曰都門。〉留兵於外,與十餘人入見,〈見,賢遍翻。〉友珪喜,甘言遜詞以悅之,賜與巨萬。癸巳,遣還。

 

《後梁紀3 均王 乾化 3年》〈癸酉, 913年〉

 

 ⑥. 영왕 주우규는 이미 뜻을 얻자 갑자기 거칠고 음란하고 안팎의 사람들이 분노하였으며, 주우규가 황금과 비단으로 유혹하였으나 끝내는 그에게 귀부핮 않았다. 부마도위인 조암은 조주의 아들이며, 태조의 사위이다. 좌용호통군· 시위친군도지휘사인 원상선은 태조의 외손자이다.

 ⑥. 郢王友珪既得志,遽為荒淫,內外憤怒,友珪雖啗以金繒,終莫之附。〈啗,徒濫翻。繒,慈陵翻。〉駙馬都尉趙巖,犨之子,〈趙犨守陳州,拒黃巢有功,見唐僖宗紀。〉太祖之伲也;〈巖尚太祖女長樂公主。〉左龍虎統軍、侍衛親軍都指揮使袁象先,太祖之甥也。〈袁象先父敬初,尚太祖妹萬安大長公主。〉

 

 조암이 사신이 되어 대량에 도착하니, 균왕 주우정이 비밀리에 그와 더불어 주우규를 죽일 것을 모의하자, 조암이 말하였다.

 "이 일의 성패는 초토인 양령공(양사후)에게 있을 뿐입니다. 그가 한 마디의 말로 금군을 달랠 수 있다면 우리의 일은 즉각 처리할 수 있습니다."

 巖奉使至大梁,〈使,疏吏翻。〉均王友貞密與之謀誅友珪,巖曰:「此事成敗,在招討楊令公耳。〈楊師厚官中書令,為北面都招討使,故稱之。〉得其一言諭禁軍,吾事立辦。」〈時梁重兵皆在楊師厚之手,又勳名為眾所服,故欲得其言諭禁軍。〉

 

 균왕이 마침내 심복 마신교를 파견하여 위주에 가서 양사후에게 유세하게 하였다.

 "영왕이 찬탈하려고 시해하여,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대량에 귀속되었는데, 공이 만약 이를 이용하여 성공시킨다면 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큰 공로가 될 것이오."

 均王乃遣腹心馬慎交之魏州說楊師厚曰:「郢王篡弒,人望屬在大梁,說,式芮翻。屬,之欲翻。}}公若因而成之,此不世之功也。」

 

 또 일이 성공하는 날에는 호군으로 전 50만 민을 하사하겠다고 허락하였다. 양사후가 장좌들과 더불어 이를 모의하며 말하였다.

 "바야흐로 영왕이 시해하고 반역하였지만 우리는 즉시 토벌할 수 없었고, 지금 임금과 신하의 명분이 이미 확정되었는데, 연고 없이도 고쳐서 도모하는 것이 가능하겠소?"

 且許事成之日賜犒軍錢五十萬緡。〈犒,苦到翻。〉師厚與將佐謀之,曰:「方郢王弒逆,吾不能即討;今君臣之分已定,〈分,扶問翻。〉無故改圖,可乎﹖」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영왕은 군왕이신 아버지를 시해하였으니, 역적입니다. 균왕이 군사를 일으켜서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의로운 것입니다. 의로움을 받들어 역적을 토벌하는데 어찌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있겠습니까? 저들이 만약 하루아침에 역적을 격파한다면 공께서는 장차 어찌 스스로 처신하겠습니까?"

 양사후가 말하였다.

 "내가 거의 잘못 생각하였다."

 或曰:「郢王親弒君父,賊也;均王舉兵復讎,義也。奉義討賊,何君臣之有!彼若一朝破賊,公將何以自處乎﹖」〈處,昌呂翻。〉師厚曰:「幾誤計。」〈幾,居依翻。〉

 

 마침내 그의 장수인 왕순현을 파견하여 낙양에 도착하여 원상선과 더불어 모의하게 하였고, 초토마보우후인 초 사람 주한빈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활주에 주둔하고 밖에서 호응하게 하였다. 조암이 낙양으로 돌아와서 역시 원상선과 더불어 비밀리에 계책을 확정하였다.

 乃遣其將王舜賢至洛陽,陰與袁象先謀,遣招討馬步都虞候譙人朱漢賓將兵屯滑州為外應。〈譙,漢縣,唐帶亳州。〉趙巖歸洛陽,亦與象先密定計。

 

 주유규가 용양군 가운데 궤란한 사람을 징치하면서 그의 패거리를 찾아서 체포하여 잡히는 사람은 그들을 멸족시켰는데, 1년이 지나도 그치지 않았다. 당시 용양군 가운데 대량을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주우규가 그를 징소하니, 균왕이 이를 인용하여 사람을 시켜서 그의 물를 격노케 하여 말하였다.

 "천자는 회주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들이 배반하였기 때문에 너희들을 추적하여 이를 모조리 죽여서 파묻어 버리려고 한다."

 그 무리가 두려워서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友珪治龍驤軍潰亂者,〈去年懷州龍驤軍亂。治,直之翻。〉搜捕其黨,獲者族之,經年不已。時龍驤軍有戍大梁者,友珪徵之,均王因使人激恕其眾曰:「天子以懷州屯兵叛,追汝輩欲盡阬之。」〈考異曰:莊宗列傳、朱友貞傳及薛史、歐陽史末帝云:「左、右龍驤都戍汴,友貞偽作友珪詔,追還洛下。」莊宗實錄云:「友珪疑而召之。」按梁太祖實錄云:「丙戌,東京言龍驤軍准詔追赴西京,軍情不肯進發。」實友珪徵之,非友貞偽作詔,但激怒言阬之耳。〉其眾皆懼,莫知所為。

 

 2월 13일에 균왕은 주문을 올려서 용양군이 의심하면서 두려워서 아직 앞서 출발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15일에 용양장교가 균왕을 알현하고 울면서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하니, 균왕이 말하였다.

 "선황은 너희들과 더불어 30여 년을 정벌하며 싸우고 왕업을 경영하였다. 지금에는 선황께서도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시해되었는데 너희들이 어느 곳에서 죽음을 벗어날 수 있겠느냐?"

 이어서 태조의 화상을 꺼내어 그들에게 보이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너희가 스스로 낙양에 가서 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는다면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무리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만세를 부르면서 병장기를 요청하니, 왕이 그들에게 주었다.

 丙戌,均王奏龍驤軍疑懼,未肯前發。戊子,龍驤將校見均王,泣請可生之路,〈將,即亮翻。校,戶教翻。〉王曰:「先帝與汝輩三十餘年征戰,經營王業。今先帝尚為人所弒,汝輩安所逃死乎!」因出太祖畫像示之而泣曰:「汝能自趣洛陽雪讎恥,〈趣,七喻翻。〉則轉禍為福矣。」眾皆踊躍呼萬歲,請兵仗,王給之。

 

 17일 아침에 원상선 등이 금병 수천 명을 인솔하고 궁중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주우규가 변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처인 장씨와 풍정악과 더불어 북쪽 담장 누각 아래로 달려가서 장차 성을 넘으려고 하다가 스스로 모면하지 못한다고 헤아리고 풍정악으로 하여금 먼저 처를 죽이고 후에 자기를 죽이고서 풍정악도 역시 자결하게 하였다.

 庚寅旦,袁象先等帥禁兵數千人突入宮中。〈帥,讀曰率。〉友珪聞變,與妻張氏及馮廷諤趨北垣樓下,將踰城,自度不免,〈趨,七喻翻。度,徒洛翻。〉令廷 諤先殺妻,後殺己,廷諤亦自剄。〈剄,古頂翻,斷首也。〉

 

 여러 군대 10여만이 대대적으로 도실 약탈하니 백사는 흩어졌으며 중서시랑· 동평장사인 두효와 시강학사인 이정이 모두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하엿고, 문하시랑· 동평장사인 우긍과 선정사인 이진이 부상을 입었으며, 포시에 이르러 마침내 평정되었다.

 諸軍十餘萬大掠都市,〈汴兵未至洛陽,禁衛諸軍已殺友珪矣。〉百司逃散,中書侍郎、同平章事杜 曉、侍講學士李珽皆為亂兵所殺,〈珽,他鼎翻。〉門下侍郎、同平章事于兢、宣政使李振被傷。至晡乃定。

 

 원상선과 조암이 전국보를 가지고 대량에 가서 균왕을 영접하니 균왕이 말하였다.

 "대량은 국가가 창업한 땅인데, 어찌 반드시 낙양이어야만 하겠소?"

 마침내 대량에서 황제의 자리에 나아가고, 다시 건화 3년이라 칭하고, 주유규를 추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박왕 주우문의 작위와 관직을 회복시켰다.

 象先、巖齎傳國寶詣大梁迎均王,王曰:「大梁國家創業之地,〈梁祖自宣武節度使并諸鎮。〉何必洛陽!」乃即帝位於大梁,復稱乾化三年,追廢友珪為庶人,復博王友文官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