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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建의 稱帝, 拔隊斬 폐지/ 白露節末候群鳥養羞(새 양식 저장)1日(陰8/12)己巳

solpee 2021. 9. 17. 10:41

《後梁紀1 太祖 開平 元年》〈丁卯, 907年〉

 

 ㊷. 촉왕 왕건이 장좌들과 만나서 칭제하는 것을 논의하였는데, 모두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비록 당에 충성했으나 당은 이미 망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하늘이 주어도 갖지 않는 것'입니다."

 풍연이 홀로 촉왕에게 칭제할 것을 청하며 말하였다.

 "조정이 부흥한다면 아직은 칭신하는 것을 어기지 말아야 하며, 도적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똑같이 악을 저지르는 것은 아닙니다."

 왕이 좇지 않자 풍연이 두문불출하였다.

 ㊷. 蜀王會將佐議稱帝,皆曰:「大王雖忠於唐,唐已亡矣,此所謂『天與不取』者也!「馮涓獨獻議請以蜀王稱制,曰:「朝興則未爽稱臣,〈朝,直遙翻。爽,乖也。言若唐朝復興,則為臣之節未乖也。〉賊在則不同為惡。」王不從,涓杜門不出。〈馮涓,馮宿之孫,於唐室既亡之後,義存故主,視韋莊、張格輩有間矣。〉

 

 왕은 안무부사· 장서기인 위장의 모의를 채용하여 이민들을 인솔하고 사흘 동안 애곡하였다.

 9월 25일에 황제의 자리에 나아가고, 국호를 '대촉'이라 하였다.

 27일에 옛날에 동천절도사· 겸시중이었던 왕종길을 중서령으로 삼고, 위장을 좌산기상시· 판중서문하사로 삼았으며, 낭주방어서 당도습을 내추밀사로 삼았다. 위장은 위견소의 손자이다.

 王用安撫副使、掌書記韋莊之謀,帥吏民哭三日;〈帥,讀曰率。〉己亥,即皇帝位,〈王建字光圖,許州舞陽人。考異曰:莊宗列傳:「太祖厭代,建自帝於成都,年號武成。」薜史、唐餘錄:「天祐五年九月,建自帝於成都,年號武成。」九國志:「此年七月即皇帝位,明年改元。」宋揅紀年通譜:「天祐四年秋稱帝,次年改元。」歐陽史、十國紀年:「天復七年九月即位,明年改元。」今從之。〉國號大蜀。辛丑,以前東川節度使兼侍中王宗售為中書令,韋莊為左散騎常侍、判中書門下事,閬州防禦使唐道襲為內樞密使。莊,見素之孫也。〈韋見素,天寶之末為相。〉

 

 촉황은 비록 눈으로는 책을 보아 알지 못하였으나 서생들과 담론하는 것을 좋아하여 거칠게나마 이치를 대강 알았다. 이때에 당의 의관지족(衣冠之族: 당의 귀족, 사대부)은 대부분 난리를 피하여 촉에 있었는데, 촉황은 그들을 예우하고 등용하여 고사를 닦아서 드러내니 그러므로 그 전장문물(당의 전장제도)에는 당의 유풍이 있었다.

 蜀主雖目不知書,好與書生談論,〈好,呼到翻。〉粗曉其理。〈粗,坐五翻。〉是時唐衣冠之族多避亂在,蜀主禮而用之,使脩舉故事,故其典章文物有唐之遺風。〈史言蜀主起於卒伍而能親用儒生。〉

 

 촉황의 맏아들인 교서랑 왕종인이 어려서 질병으로 버려지고 그의 둘째아들인 비서소감 왕종의를 세워서 수왕으로 삼았다.

 蜀主長子校書郎宗仁幼以疾廢,立其次子祕書少監宗懿為遂王。

 

 ㊸. 겨울, 10월에 형남절도사 고계창이 그의 장수인 예가복을 파견하여 초의 장수인 진언휘와 회합하여 낭주를 공격하게 하니, 무정절도사 뇌언공이 사신을 파견하여 회남에 항복을 받아주기를 요구하고 또 긴급한 상황을 보고해 왔다.

 홍농왕이 장수 영업을 파견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평강에 주둔하고 이요는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유양에 주둔하고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자, 초왕 마은이 악주 자사 허덕훈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막게 하였다.

 ㊸. 冬,十月,高季昌遣其將倪可福會楚將秦彥暉攻朗州,雷彥恭遣使乞降於淮南,且告急,弘農王遣將泠業將水軍屯平江,〈泠,盧經翻,姓也。平江縣本漢羅縣地,後漢分立漢昌縣,孫吳立漢昌郡,後又為吳昌縣,隋省。唐神龍元年分湘陰置昌江縣,屬岳州,五代改曰平江。蓋後唐既滅梁,楚人為之避廟諱昌字也。九域志:平江縣在岳州東南二百五十七里。〉李饒將步騎屯瀏陽以救之,楚王殷遣岳州刺史許德勳將兵拒之。

 

 영업이 나아가거 낭구에 주둔하자 허덕훈이 수영을 잘하는 병사 50명으로 하여금 나눗가지와 낙엽으로 그들의 머리를 덮고 긴 칼을 들고서 강을 따라 떠내려가 밤중에 그들의 군영을 침범하고 또 불을 들어 보이니 영업의 군대 안에서는 놀라서 소란해졌다. 허덕훈이 대군을 가지고 나아가 공격하여 그들을 대파하고 뒤따라서 녹각진에까지 가서 영업을 사로잡앗으며, 또 유양의 영채를 파괴하고 이요를 사로잡았으며, 상고· 당연을 노략질하고서 돌아왔다.

 영업· 이요를 장사의 저자에서 목을 베었다.

 泠業進屯朗口,〈朗水西南自辰、錦州入朗州界,經州城入大江,謂之朗口。〉德勳使善游者五十人,以木枝葉覆其首,〈覆,扶又翻。〉持長刀浮江而下,夜犯其營,且舉火,業軍中驚擾。德勳以大軍進擊,大破之,追至鹿角鎮,擒業;又破瀏陽寨,擒李饒;掠上高、唐年而歸。〈唐天寶二年開山洞,置唐年縣,屬鄂州。〉斬業、饒於長沙市

 

 ㊹. 11월 11일에 협마지휘사 윤호가 진의 강저령에 있는 영채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다.

 ㊹. 十一月,甲申,夾馬指揮使尹皓攻晉江潜嶺寨,拔之。〈梁西都有夾馬營。江潜嶺在潞州長子縣西,由北路達鵰窠嶺。〉

 

 ㊺. 의창절도사 유수문은 그의 동생인 유수광이 그 아버지를 유폐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장리들을 소집하여 큰 소리로 통곡하며 말하였다.

 "생각지도 아니하게 우리 가문에 이런 효경(梟獍: 올빼미는 출산 후에 애미를 잡아먹고, 개오지는 출산하자마자 그 애비를 잡아 먹는 다고 함)을 낳았소. 내가 살아 있어도 죽은 것만 같지 못하니, 맹세코 여러분과 더불어 그를 토벌하겠소."

 마침내 군사를 발동하여 유수광을 공격하니,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였다.

 ㊺. 義昌節度使釗守文聞其弟守光幽其父,集將吏大哭曰:「不意吾家生此梟獍!〈梟,堅堯翻,不孝鳥也,食母;獍,讀如鏡。破獍,惡獸也,食父。〉吾生不如死,誓與諸君討之!「乃發兵擊守光,互有勝負。

 

 천웅절도사인 업왕 나소위가 그의 부하들에게 말하였다.

 "유수광이 곤궁하고 위급하여 나라로 돌아왔는데, 유수문은 고립되어 구원받을 수 없으니, 창주는 싸우지 않고도 굴복할 것이다."

 마침내 유수문에게 편지를 보내어 화와 복을 가지고서 유세하였다. 유수문 역시 양이 빈틈을 타고서 그의 후방을 습격할까 두려워서 11월15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을 받아주기를 요청하고 아들 유연우를 인질로 삼게 하였다.

 天雄節度使王鄴王紹威謂其下曰:「守光以窘急歸國,〈窘,巨隕翻。謂上七月劉守光遣使請命也。〉守文孤立無援,滄州可不戰服也。」乃遺守文書,〈遣,唯季翻。〉諭以禍福。守文亦恐梁乘虛襲其後,戊子,遣使請降,以子延祐為質。

 

 황제가 손을 붙잡고 말하였다.

 "나소위의 절간이 10만 군사보다 낫도다!"

 유수문에게 중서령을 덧붙여 주고 그를 위무하며 받아들였다.

 帝拊手曰:「紹威折簡,勝十萬兵!」〈質,音致。折,之舌翻。〉加守文中書令,撫納之。

 

 ㊻. 애초에, 황제가 번진에 있으면서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장교 가운데 싸우다가 죽은 사람이 있으면 그 거느리는 부하 군사들을 모두 목을 베었는데, 이를 '발대참(拔隊斬)이라고 말하였으니, 사졸 가운데 주장을 잃은 사람들은 대부분 도망하여서 감히 돌아가지 못하였다.

 ㊻. 初,帝在藩鎮,用法嚴,將校有戰沒者,所部兵悉斬之,謂之跋隊斬,〈將,即亮翻。校,戶教翻。跋,卜末翻,又蒲末翻。〉士卒失主將者,多亡逸不敢歸。

 

 황제가 마침내 무릇 군사글을 모두 그들의 얼굴에 입묵하여 군호를 표기하도록 명령하였다. 군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고향으로 도망가려고 생각하여도 관진에서 번번이 붙잡아서 소속된 곳으로 압송시키자 죽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 고향에서도 또한 감히 수용하지 아니하였다.

 帝乃命凡軍士皆文其面以記軍號。軍士或思鄉里逃去,關津輒執之〈關,往來必由之要處;津,濟度必由之要處。〉送所屬,無不死者,其鄉里亦不敢容。

 

 이로 말미암아 도망한 사람들이 모두 산택에 모여 도적이 되었으며, 큰 것은 주현의 우환이 되기도 하였다.

 29일에 조서를 내려서 그들의 죄를 사면해 주고 지금으로부터 비록 얼굴에 입묵되어 있다고 하여도 또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도적은 열에 아홉일고여덟이 줄었다.

 由是亡者皆聚山澤為盜,大為州縣之患。壬寅,詔赦其罪,自今雖文面亦聽還鄉里。盜減什七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