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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翔, 번진 그리고 거란 / 白露節仲候玄鳥歸5日(陰8/11)戊辰

solpee 2021. 9. 16. 17:30

《後梁紀1 太祖 開平 元年》〈丁卯, 907年〉

 

 ⑮. 선무장서기· 대부경인 경상을 지승정원사(승정원 원장 즉 환관들의 추밀원으로 승정원으로 고침)로 삼아 황제의 고문을 맡겨서 모의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금중에서 황상의 뜻을 받들게 하고 재상에게 전달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⑮. 以宣武掌書記、太府卿敬翔知崇政院事,〈梁崇政院即唐樞密院之職,後遂癈區密院入崇政院。〉似備顧問,參謀議,於禁中承上旨,宣於宰相而行之。

 

 재상이 나아가서 마주하지 못하였을 때에 주청할 것과 이미 황상의 뜻을 받아서 응당 다시 요청할 것이 잇으면, 모두 구체적으로 일을 기록하여 승정원을 통하여 보고하게 하고, 황상의 뜻을 얻으면 다시 재상에게 전달하였다. 

 宰相非進對時有所奏請及已受旨應復請者,皆具記事因崇政院以聞,得旨則復宣於宰相。

 

경상은 사람됨이 매우 깊고 침착하며 지략이 있어서 막부에 20여 년을 있었고, 군모와 민정은 황제가 한결같이 그에게 위임하였다. 경상은 마음을 다하여 부지런히 수고하여 밤낮으로 잠자지 않고 스스로 말하기를, '오직 말 위에서만이 마침내 휴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翔為人沈深〈沈,持林翻。〉有智略,在幕府三十餘年,〈僖宗光啟間,敬翔入汴幕,至此時二十年,史誤以「二十」為「三十」耳。〉軍謀、民政,帝一以委以之 翔盡心勤勞,晝夜不寐,自言惟馬上乃得休息。

 

 황제의 성정은 포악하고 사나워서 헤아리기가 어려웠으므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었지만 오직 경상만이 그 의중을 알 수 있었다. 혹 옳지 않은 것이 있으면 경상은 일찍이 말로 표현하지 않고 다만 의심을 가지고 잇다고 조금만 표시해도 황제는 속으로 이미 깨닫고 대부분 그것 때문에 고쳤다. 선양으로 대신할 때에는 경상이 모의한 것이 많았다.

 帝性暴戾難近,〈近,其靳翻。〉人莫能測,惟翔能識其意趣。或有所不可,翔未嘗顯言,但微示持疑;帝意已悟,多為之改易。〈為,于偽翻。〉禪代之際,翔謀居多。

 

 ⑱. 4월 29일에 제를 내려 이극용의 곤작을 삭탈하였다. 이때에는 오직 하동· 봉상· 회남에서만 '天祐' 연호를 사용하였고, 서천에서는 '天復'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양의 정삭을 받고 신하임을 칭하면서 조공을 받들었다.

 ⑱. 乙亥,下制削奪李克用官爵。〈李克用稱唐官,用唐年號,豈梁得而削奪之哉!史姑書梁之初政耳。〉是時惟河東、鳳翔、淮南稱「天祐」,西川稱「天復」年號;〈天復四年,梁王劫唐昭宗遷洛,改元曰天祐。河東、西川黯劫天子遷都者梁也,天祐非唐號,不可稱,乃稱天復五年。是歲梁滅唐,河東稱天祐四年,西;川仍稱天復。〉餘皆稟梁正朔,稱臣奉貢。

 

 촉왕은 홍농왕과 더불어 여러 도에 격문을보내어 기왕(岐王:이무정)· 진왕(晉王: 이극용)과 더불어 군사들을 소집하여 당실을 부흥시키려고 하였는데, 끝내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촉왕이 마침내 칭제할 것을 모의하고 교서를 내려 관할 안에 있는 관리들과 백성들을 설득하였고, 또 진왕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였다.

 "청컨대 각기 한 곳에서 황제를 지칭학로 하고, 주온이 이윽고 평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당의 종실을 찾아 그를 세우고 물러나서 번진의 위치로 돌아가 복종하기로 합시다."

 진왕이 답서를 보내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여기서 맹세하고 나면 평생토록 감히 절개를 잃을 것이오."

 蜀王與弘農王移檄諸道,〈淮南楊渥爵弘農王。〉云欲與岐王、晉王會兵興復唐室,卒無應者。〈卒,子恤翻。〉蜀王乃謀稱帝,下教諭統內吏民;又遺晉王書云:〈還,唯季翻。〉「請各帝一方,俟朱溫既平,乃訪唐宗室立之,退歸藩服。晉王復書不許,曰:「誓於此生靡敢失節。」〈史言李克用雖出於夷狄而終身為唐臣,亦天性之忠純也。〉

 

 당 말기에 환관을 죽이면서 조서가 하동에 이르게 되자, 진왕은 감군 장승업을 곡률사에 숨기고 죄인의 목을 베어서 조서에 호응하였다. 이에 이르러 다시 감군으로 삼고, 그를 더욱 후하게 대우하니, 장승업 역시 그를 위하여 힘을 다하였다.

 唐末之誅宦官也,訒書至河東,晉王匿監軍張承業於斛律寺,斬罪人以應訒。〈見二百六十四卷唐昭宗天復三年。斛律寺,蓋高齊建霸府於晉陽,斛律氏貴監時所立。〉至是,復以為監軍,待之加厚,承業亦為之竭力。〈為,于偽翻。〉

 

 기왕이 군사를 다스리면서 심히 관대하고 사졸들을 대우함이 간결하고 편안하였다. 부장인 부소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고한 사람이 있었는데, 기왕은 곧바로 그의 집에 가서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더니, 이로 말미암아 무리들의 마음이 기뻐하며 복종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군사를 통솔하는 데는 기강과 군율이 없었다. 당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군사들은 파리하고 토지는 척박하였기 때문에 감히 칭제할 수 없었고, 다만 기왕부를 열어 백관을 두고 그가 살고 있는 곳을 이름 하여 궁전이라 하고, 처를 황후라 칭하였으며, 장리들이 편지를 올리는 것을 牋· 表라 하였고, 鞭· 扇· 號령은 대부분 황제의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岐王治軍甚寬,待士卒簡易。〈治,直之翻。易,以鼓翻。〉有告部將符昭反者,岐王直詣其家,悉去左右,熟寢經宿而還;〈還,從宣翻。〉由是眾心悅服;然御軍無紀律。及聞唐亡,以兵羸地蹙,〈羸,倫為翻。〉不敢稱帝,但開岐王府,置百官,名其所居為宮殿,妻稱皇后,〈李茂貞自為岐王,而妻稱皇后,妻之貴踰於其夫矣。卒伍之雄,乘時竊號,私立名字以相署置,豈可與之言禮乎哉!〉將吏上書稱牋表,鞭、扇、號俴多擬帝者。〈鞭,鳴鞭;扇,雉尾扇也。唐制:天子視朝,從禁中出則鳴鞭傳警;既出西序門索扇,扇合,天子升御座;扇開,百官畢朝。〉

 

 진해(항주)절도판관 나은은 오왕 전류를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켜 양을 토벌하려고 하여 말하였다.

 "설령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물러나서 항· 월을 지키면서 스스로 동제라 할 것이니. 어찌 서로 희생하며 도적을 섬겨서 영원한 수치를 만들겠습니까?"

 전류는 처음에 나은이  당에 합치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여 반드시 원망스런 마음이 잇을 것이라고 생각하엿다가 그의 말을 듣게 되자 비록 등용은 할 수 없지만 마음으로 그를 심히 의롭게 생각하였다.

鎮海節度判官羅隱說吳王鏐舉兵討梁,〈說,式芮翻。〉曰:「縱無成功,猶可退保杭、越,自為東帝;柰何交臂事賊,為終古之羞乎!」鏐始以隱為不遇於唐,必有怨心,及聞其言,雖不能用,心甚義之。

 

 ㉑. 거란이 그들의 신하로 포홀한 매노를 파견하여 와서 통호하자고 하니, 황제가 태부경인 고기를 파견하여 이에 보빙하게 하였다.

 애초에, 거란에는 팔부가 있었는데, 부에는 각기 대인이 있어서 서로 더불어 약속하여 한 사람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으며, 기고를 세우고 여러 부에 호령하게 하고 3년마다 순서대로 서로 교대하였다.(초기 신라와 똑 같다)

 ㉑. 契丹遣其臣袍笏梅老來通好,〈好,呼到翻。〉帝遣太府少卿高頎報之。〈頎,渠希翻。〉

初,契丹有八部,〈歐陽修曰:契丹君長曰大賀氏,後分為八部:一曰但利皆部,二曰乙室活部,三曰實活部,四日納尾部,五曰頻沒部,六曰內會雞部,七曰集解部,八曰奚嗢部。部之長號大人。路振九國志:契丹,古匈奴之種也。代居遼澤之中,潢水南岸,南距愉關一千一百里,榆關南距幽州七百里。考異曰:蘇逢吉漢高祖實錄曰:「契丹本姓大賀氏,後分八族:一曰利皆邸,二曰乙失活邸,三曰實活邸,四曰納尾邸,五曰頻沒邸,六曰內會雞邸,七曰集解邸,八曰奚嗢邸。管縣四十一,縣有令。八族之長,皆號大人,稱刺史,常推一人為王,建旗鼓以尊之。每三年,第其名以相代。」莊宗列傳曰:「咸通末,其王曰習爾,疆士稍大,累來朝貢,光啟中,其王曰欽德,乘中原多故,北邊無備,遂蠶食諸部,達靼、奚、室韋之屬,咸被驅役。」漢高祖實錄、唐餘錄皆曰:「僖、昭之際,其王邪律阿保機怙強恃勇,距諸族不受代,自號天皇王。後諸族邀之,請用舊制。保機不得已,傳旗鼓,且曰:『我為長九年,所得漢人頗眾,欲以古漢城領本族,率漢人守之,自為一部。』諸族諾之。俄設策復併諸族,僭稱皇帝,土地日廣。大順中,後唐武皇遣使與之連和,大會於雲州東城,延之帳中,約為昆弟。」莊宗列傳又曰:「及欽德政衰,阿保機族盛,自稱國王。天祐二年,大寇我雲中。太祖遣使連和,因與之面會於雲州東城,延入帳中,約為兄弟,謂曰:『唐室為賊臣所篡,吾以今冬大舉,弟助我精騎二萬,同收汴、洛。』保機許諾。保機既還,欽德以國事傳之。」賈緯備史云:「武皇會保機故雲州城,結以兄弟之好。時列兵相去五里,使人馬上持盃往來,以展酬酢之禮。保機喜,謂武皇曰:『我蕃中酋長,舊法三年則罷,若他日見公,復相禮否﹖』武皇曰:『我受朝命鎮太原,亦有遷移之制,但不受代則可,何憂罷乎!』保機由此用其教,不受諸族之代。」趙志忠虜庭雜紀云:「太祖諱億,番名阿保謹,又諱斡里。太祖生而智,八部落主愛其雄勇,遂退其舊主阿輦氏歸本部,立太祖為王。」又云:「凡立王,則眾部酋長皆集會議,其有德行功業者立之。或災害不生,群牧孳盛,人民安堵,則王更不替代;苟不然,其諸酋會眾部別選一名為王;故王以番法,亦甘心退焉,不為眾所害。」又曰:「有韓知古、韓穎、康枚、王奏事、王郁,皆中國人,井勸太祖不受代。」新唐書載契丹八部名與漢高祖實錄所載八部名多不同,蓋年祀相遠,虜語不常耳,其實一也。阿保機云「我為長九年」,則其在國不受代久矣,非因武皇之教也。今從漢高祖實錄。又唐餘錄前云「乾寧中,劉仁恭鎮幽州,保機入寇,仁恭擒其妻兄述律阿揼,由此十餘年不能犯塞」,下乃云「大順中與武皇會於雲中」,按大順在乾寧前,乾寧二年仁恭方為幽州節度,天順中未也。又武皇謂曰:「唐室為賊臣所篡,吾以今冬大舉。」此非大順中事,唐餘錄誤也。又編遺錄:「開平二年五月,契目王阿保機及前國王欽德貢方物。」然則於時七部猶在也。〉部各有大人,相與約,推一人為,建旗鼓以號令諸部,每三年則以次相代。

 

 함통 말년에 습이라는 사람이 왕이 되었는데, 토우가 비로소 커졌다. 그 후에 흠덕이 왕이 되어 중원의 많은 변고를 틈타고 때때로 들어와서 변경에서 도적질하였다. 아보기가 왕이 되자, 더욱 웅건하고 용맹하여 오성해와 칠성실위· 달단 모두가 그에게 복속되었다.

 咸通末,有習爾者為王,土宇始大。其後欽德為王,乘中原多故,時入盜邊。及阿保機為王,尤雄勇,五姓奚〈五姓奚,一阿會部,二處和部,三奧失部,四度稽部,五元俟折部,各有辱紇主為之酋領。歐陽修曰:奚當唐末居陰涼川,在營府之西,幽州之西北,皆數百里,分居陰涼川,東去營府五百里,西南去幽州九百里,東南接海,山川三千里。後徙居琵琶川。〉及七姓室韋、〈室韋本有二十餘部,其近契丹者七姓。〉達靼咸役屬之。

 

 아보기의 성은 야율씨인데 그가 강성하다는 것을 믿고 교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래 지나서 야율아보기는 황두실위를 치고 돌아오는데 칠부의 사람들이 변경에서 그를 겁박하며 맹약과 같이 할 것을 요구하였다.

 阿保機姓邪律氏,〈歐史四夷附錄曰:阿保機以其所居棋帳地名為姓,曰世里。世里,譯者謂之邪律。〉恃其強,不肯受代。久之,阿保機擊黃頭室韋還,七部劫之於境上,求如約。〈如三年一代之約。〉

 

 야율아보기는 마지못해 하며 기고를 전하고 또 말하였다.

 "내가 왕이 된 지 9년이 되어 한인들을 많이 얻었으니, 청컨대 같은 종족 부락을 인솔하고 옛 한성(에 살면서 한인들과 더불어 그곳을 지키며 별도로 스스로 한 부를 만들게 하여 주시오."

 칠부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한성은 옛날의 후위의 활염현이다. 토지는 오곡을 기르기에 적당하고 염지에서 나는 이익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에 야율아보기는 점차 군사를 가지고 칠부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다시 병합하여 한 나라를 이루었다.

 阿保機不得已,傳旗鼓,且曰:「我為王九年,得漢人多,請帥種落〈帥,讀曰率。種,章勇翻。〉居古漢城,與漢人守之,別自為一部。」七部許之。漢城,故後魏滑鹽縣也。〈漢志,滑鹽縣屬漁陽郡。後漢明帝改曰鹽田。水經註:大榆河自密雲城南東南流,逕後魏安州舊漁陽邵之滑鹽縣南。滑鹽,世謂之斛鹽城,西北去禦夷鎮二百里。歐陽修曰:漢城城在炭山東南欒河上。宋白曰:契丹居遼澤之中,潢水南岸。遼澤去渝關一千一百三十里,渝關去幽州一百七十四里。其地東南接海,東際遼河,西包冷陘,北界松陘山。東西三千里,地多松柳,澤多蒲葦。阿保機居漢城,在檀州西北五百五十里。城北有龍門山,山北有炭山,炭山西是契丹、室韋二界相連之地。其地濼河上源,西有鹽泊之利,則後魏滑鹽縣也。〉地宜五縠,有鹽池之利。其後阿保機稍以兵擊滅七部,復併為一國。

 

 또 붇쪽으로는 실위와 여진을 침범하고 서쪽으로는 돌궐의 옛 땅을 빼앗고 해를 공격하여 그곳을 멸망시키고, 다시 해왕을 세우고 거란으로 하여금 그들의 군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동북의 여러 이족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又北侵室韋、女真,〈女真,肅慎氏之遺種,黑水靺鞨即其地也。入遼東著籍者號熟女真,界外野處者號生女真,極邊遠者號黃頭女真。〉西取突厥故地,擊奚,滅之,復立奚王而使契丹監其兵。〈監,古銜翻。〉東北諸夷皆畏服之。

 

 이 해에 야율아보기가 무리 30만을 인솔하고 운주를 침구하자 진왕은 그와 더불어 화친을 맺고 동성에서 면회하여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고 그의 장중으로 이끌어서 술을 진탕 먹으며 손을 잡고 기쁨을 다하면서 이번 겨울에 양을 함께 도모하자고 약속하였다.

 是歲,阿保機帥眾三十萬寇雲州,晉王與之連和,面會東城,約為兄弟,延之帳中,縱酒,渥手盡歡,約以今冬共擊梁。〈考異曰:唐太祖紀年錄:「太祖以阿保機族黨稍盛,召之。天祐二年五月,阿保機領其部族三十萬至雲州東城,帳中言事,握手甚歡,約為兄弟,旨日而去。留男骨都舍利、首領沮稟梅為質,約冬初大舉渡河反正,會昭宗遇盜而止。」歐陽史曰:「梁將篡唐,晉王李克用使人聘于契丹,阿保機以兵三十萬會克用於雲州東城,握手約為兄弟,期共舉兵擊梁。」如此則應在天祐元年昭宗崩已前,不應在二年也。且昭宗遇盜則尤宜興兵討之,何故止也。按武皇云「唐室為賊臣所篡」,此乃四年語也;其冬武皇寢疾,蓋以此不果出兵耳。今從之。〉

 

 어떤 사람이 진왕에게 권고하였다.

 "그가 오는 것을 이용하여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수적이 아직 멸망하지 않았는데 이적에게 신뢰를 잃는 것은 스스로 멸망하는 길이다."

 야율아보기는 열흘 머물렀다가 마침내 떠나갔고, 진왕은 금과 비단 수만을 선물로 주엇다. 야율아보기는 말 3천 필을 남기고 잡축 1만을 헤아려서 그에게 보답하였다. 야율아보기가 돌아와서 맹약을 배반하고 다시 양에 귀부하니 진왕이 이로 말미암아 그를 원망하였다.

 或勸晉王:「因其來,可擒也,」王曰:「讎敵未滅而失信夷狄,自亡之道也。」阿保機留旨日乃去,晉王贈以金繒數萬。阿保機留馬三千匹,雜畜萬計以酬之。阿保機歸而背盟,更附于梁,〈繒,慈陵翻。畜,許救翻。背,蒲妹翻。更,工銜翻。遣使通好,是附梁也。〉晉王由是恨之。〈通鑑於唐紀書「李克用」,君臣之分也;於梁紀書「晉王」,敵國之體也。吳、蜀義例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