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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무도한 주전충/白露節初候鴻雁萊5日(陰8/5)壬戌

solpee 2021. 9. 11. 17:04

《唐紀81 昭宣帝 天祐 2年》〈乙丑, 905年

 

 ⑧. 2월, 이날은 사일(社日: 토지신에 제사지내는 날, 春秋 두 차례로 입춘과 입추 다음 다섯 번째 戊日로 春社, 秋社라 했다. 戊는 土다)이었는데, 주전충은 장현위로 하여금 소종의 여러 아들인 덕왕 이유· 채왕 이우· 건왕 이계· 기왕 이인· 수왕 이의· 경왕 이비· 기왕 이기· 아왕 이진· 경왕 이상 등을 초대하게 해서 구곡지에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그들을 모두 목졸라서 죽이고 시신을 연못에 내던졌다.

 ⑧. 是日社,〈自古以來,以戊日社。戊,土也。立春以後歷五戊則社日。〉全忠使蔣玄暉邀昭宗諸子德王裕、棣王祤、虔王禊、沂王禋、遂王禕、景王祕、祁王琪、〈【章︰十二行本「琪」作「祺」;乙十一行本同;孔本同。】〉雅王禛、〈禛,之人翻。〉瓊王祥,置酒九曲池,〈九曲池在洛苑中。〉酒酣,悉縊殺之,投尸池中。

 

 ⑩. 20일에 화릉에 성목경문효황제를 장사지내고 묘호를 소종이라 하였다.

 ⑩. 己酉,葬聖穆景文孝皇帝於和陵,〈和陵在河南緱氏縣懊來山,是年更名太平山。〉廟號昭宗。

 

 ⑳. 6월, 1일에 배추· 독고손· 최원· 육의· 왕부· 조숭· 왕찬 등에게 칙령을 내려서 나란히 거주하는 것에서 자진하라고 하였다.

 당시 주전충은 배추 등과 조정의 관원 가운데 관작이 깎아내려진 30여 명을 백마역에 모아놓고 하룻저녁에 그들을 모두 살햏고 시신을 하에 내던졌다.

 ⑳. 六月,戊子朔,敕裴樞、獨孤損、崔遠、陸扆、王溥、趙崇、王贊等並所在賜自盡。

時全忠聚樞等及朝士貶官者三十餘人於白馬驛,〈白馬驛在滑州白馬縣。〉一夕盡殺之,投尸于河。

 

 애초에, 이진은 누차 진사시험에 참여하였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하였던 연고로 진신인 선비들을 매우 미워하여서 주전충에게 말하였다.

 "이 무리들은 항상 스스로 청류(淸流: 권세와 당쟁에 물들지 않는 고결한 선비)라고 부르는데 의당 그들을 하에 내던져서 탁류(濁類: 사악하고 비열하며 군세와 매관매직에 물든 비열한 선비)가 되게 해야 합니다."

 주전충이 웃으면서 그를 따랐다.

 初,李振屢舉進士,竟不中第,〈中,竹仲翻。〉故深疾搢紳之士,言於全忠曰︰「此輩常自謂清流,宜投之黃河,使爲濁流!」全忠笑而從之。

 

 이진이 매번 변주에서 낙양에 이르게 되면 조정에는 반드시 유배 보내거나 내쫒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치효(鴟梟: 鴟는 올빼미과로 밤에 가축을 잡아 먹고, 梟는 애미를 잡아먹는 올빼미로 흉조를 뜻함)라 불렀다.

 조정의 인사를 보면 모든 것을 턱으로 지시하고 기색으로 부렸으며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

 振每自汴至洛,朝廷必有竄逐者,時人謂之鴟梟。〈朝,直遙翻;下同。梟,堅堯翻。〉見朝士皆頤指氣使,〈以頤指麾,以氣使令,言其怙朱全忠之勢而肆其驕豪也。〉旁若無人。

 

 주전충은 일찍이 요좌와 유객들과 더불어 큰 버드나무 아래에서 앉아 있었는데 주전충이 혼자 중얼거리며 말하였다.

 "이 버드나무는 의당 차곡을 만들어야 한다."

 무리들이 호응하지 않았다. 몇 명의 유객들이 일어나 화답하여 말하였다.

 "의당 차곡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전충이 갑자기 화난 목소리로 말하였다.

 "서생들이 구미에 맞추어 사람을 놀리기를 좋아하는 것이 모두 이런 것이다. 차곡은 반드시 느릅나무를 끼워서 사용해야 하는데 버드나무로 어찌 그것을 만들 수 있겠느냐!"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아직 무엇을 기다리고 있느냐?"

 좌우에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의당 차곡을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말한 사람들의 머리채를 잡고 그들을 때려서 모두 죽였다.

 全忠嘗與僚佐及遊客坐於大柳之下,全忠獨言曰︰「此柳宜爲車轂。」〈轂,古鹿翻。〉衆莫應。有遊客數人起應曰︰「宜爲車轂。」全忠勃然厲聲曰︰「書生輩好順口玩人,皆此類也!〈好,呼到翻。言順口附和以玩狎人。〉車轂須用夾榆,〈《說文》︰榆,白枌。所謂夾榆,乃今之田榆也,生田塍間,其皮類槐,其肉理堅緻而赤,鋸以爲器,堅而耐久。車轂衆輻所湊,其木宜堅緻者。呂俛曰︰櫅榆宜作車轂。《爾雅》云,白棗也。櫅,相稽翻。〉柳木豈可爲之!」顧左右曰︰「尚何待!」左右數十人,捽言「宜爲車轂」者悉撲殺之。〈捽,昨沒翻。撲,弼角翻。〉

 

 2일에 사공으로 치사한 배지를 청주사호로 깎아내리고 조금 후에 죽음을 내렸다.

 유찬의 남아잇는 화가 퍼부어진 사람들은 오히려 십수 명뿐이 아니었는데, 장문율이 힘이 다하여 그를 이해시켜서 마침내 그쳤다.

 당시 사대부들은 환난을 피해 대부분이 조정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는데, 5일에 그들이 소재하는 주현에 칙령을 내려서 보내라고 독촉하고 머물러 있을 수 없게 하였다.

 乙丑,司空致仕裴贄貶青州司戶,尋賜死。

柳璨餘怒所注,猶不啻十數,張文蔚力解之,乃止。

時士大夫避亂,多不入朝,壬辰,敕所在州縣督遣,無得稽留。

 

 전에 사훈원외랑이었던 이연길은 이덕유의 손자로 관직을 떠나 평원장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조서가 내려졌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하여 책망하고 위위시주부를 제수하였다.

 가을, 7월 6일에 태자빈객으로 치사한 유손은 조주사마로 깎였다.

 前司勳員外郎李延古,德裕之孫也,去官居平泉莊,〈李德裕有平泉莊,在河南府界。德裕《平泉記》曰︰先公眺想,屬注伊川,吾於是有退居河洛之志。於龍門得喬處士故居,翦荊棘,驅狐狸而爲之。康騈曰︰平泉莊去洛城三十里。〉詔下未至,〈【章︰十二行本「至」下有「戊申」二字;乙十一行本同;退齋校同。】〉責授衞尉寺主簿。

秋,七月,癸亥,太子賓客致仕柳遜貶曹州司馬。

 

 ㉖. 애초에, 예부원외랑· 지제고인 사공도가 관직을 버리고 우향에 있는 왕관곡에 거주하였는데, 소종이 누차 그를 징소하자, 사공도는 두려워서 낙양에 들어가 알현하였는데, 겉으로 쇠약하고 거친 체하면서 홀을 떨어뜨리고 예의를 잃어버린 것처럼 하였다.

 ㉖. 初,禮部員外郎知制誥司空圖棄官居虞鄕王官谷,〈王官谷在虞鄕縣中條山。〉昭宗屢徵之,不起。柳璨以詔書徵之,圖懼,詣洛陽入見,〈見,賢遍翻。〉陽爲衰野,墜笏失儀。

 

 유찬이 마침내 다시 조서를 내렸는데, 그 대략이다.

 "이미 고상함을 당대에 오만하게 구는 것이 마치 산을 옮겨서 명성을 낚시질하는 것과 유사하다."

 또 말하였다.

 "백이도 아니고 유하혜도 아니어서 공정한 조정에 거처하기가 힘들 것 같다. 산으로 돌아가도록 풀어줘도 좋다."

 사공도는 임회 사람이다.

 璨乃復下詔,略曰︰「旣養高以傲代,類移山以釣名。」又曰︰「匪夷匪惠,難居公正之朝。〈復,扶又翻。柳璨言司空圖旣非伯夷之清,又非柳下惠之和。且朝政如彼,而自謂公正。《通鑑》直敍其辭而微惡自見。〉可放還山。」圖,臨淮人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