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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의 전횡/白露節初候鴻雁萊4日(陰8/4)辛酉

solpee 2021. 9. 9. 17:07

《唐紀80 宗 天福 3年》〈癸亥, 903年

 

 ②. 2월 3일에 문하시랑· 동평장사인 육의가 책망을 받아서 기왕의 사부· 분사에 제수되었다. 거가가 경사로 돌아와서 여러 도에 조서를 내렸지만 오직 봉상에 만은 보내지 않았다. 육의가 말하였다.

 "이무정의 죄는 비록 크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와 아직 단절하지는 않고 있는데, 지금 홀로 조서를 보내지 않는 것은 사람들에게 도량이 넓지 않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②. 甲戌,門下侍郎、同平章事陸扆責授沂王傅、分司。〈沂王禮,皇子也。「禮」,一作「禋」。〉車駕還京師,賜諸道詔書,獨鳳翔無之。扆曰︰「茂貞罪雖大,然朝廷未與之絕;今獨無詔書,示人不廣。」〈《考異》曰︰《舊傳》︰「帝還京後赦諸道,皆降詔書,獨鳳翔無詔,扆奏」云云。按是時未赦,恐止是降詔書;或赦前扆議如此,故胤怒耳。〉

 

 최윤이 화가 나서 주문을 올려 그의 지위를 깎아내렸다."

 궁인인 송유 등 11명은 모두 한전회가 바쳤었는데, 승려와 도사들 가운데서 환관들과 가깝고 관계가 두터웠던 사람 20여 명에 이르러서는 나란히 경조에 보내져서 장형을 받고 죽었다.

 崔胤怒,奏貶之。宮人宋柔等十一人皆韓全誨所獻,〈獻宋柔等見上卷元年。〉及僧、道士與宦官親厚者二十餘人,並送京兆杖殺。

 

 ③. 황상이 한악에게 말하였다.

 "최윤은 비록 충성을 다하였지만 그러나 경에 비교한다면 자못 기민하게 술수를 쓰고 있소."

 대답하였다.

 "무릇 천하를 다스린다는 사람은 만국에서 모두 그에게 눈과 귀를 집중하고 있는데, 어찌 기민한 술수를 가지고 속일 수 있겠습니까! 정성으로 밀어주고 바르게 대해주는 것만 같지 못하니, 비록 매일 그것을 계산해보면 부족하나 해를 단위로 계산한다면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③. 上謂韓偓曰︰「崔胤雖盡忠,然比卿頗用機數。」對曰︰「凡爲天下者,萬國皆屬之耳目,〈屬,之欲翻。〉安可以機數欺之!莫若推誠直致,雖日計之不足而歲計之有餘也。」〈用《莊子》語。〉

 

 

 ④. 5일에 공부시랑· 동평장사인 소검과 이부시랑 노광계에게 나란히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6일에 중서시랑· 동평장사인 왕부를 태자빈객· 분사로 삼았는데, 모두가 최윤이 미워해서였다.

 ④. 丙子,工部侍郎、同平章事蘇檢,吏部侍郎盧光啓,並賜自盡;丁丑,以中書侍郎、同平章事王溥爲太子賓客、分司,皆崔胤所惡也。〈【自「丁丑」至「所惡也」二十六字,據章鈺《資治通鑑校宋記》增。】〉〈蘇檢、盧光啓皆鳳翔所命相,崔胤惡其黨附韓全誨、李茂貞,故殺之。《考異》曰︰《實錄》︰「檢、光啓並賜自盡。一說,檢長流環州。」《唐太祖紀年錄》︰「初從幸鳳翔,命盧光啓、韋貽範爲相,又命蘇檢平章事。及車駕還宮,胤積前事怒之,不一月,皆貶謫之,左遷陸扆沂王傅,王溥太子賓客,蘇檢自盡。」《續寶運錄》︰「二月五日,應是岐王駕前宰臣盧光啓等一百餘人,並賜自盡。」《新紀》︰「朱全忠殺蘇檢、盧光啓。」《舊‧胤傳》︰「昭宗初幸鳳翔,命盧光啓、韋貽範、蘇檢等作相,及還京,胤皆貶斥之。」《新‧光啓傳》云「檢長流環州,光啓賜死」,與《寶運錄註》同。「檢流環州」,不見本出何書。〉

 

 

 ⑤. 7일에 준전충에게 '회천재조갈충수정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그의 요좌인 경상 등에게는 '영란협찬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제장인 주우녕 등에게는 '영란과의공신'아라는 칭호를 내리고, 도두 이하에게는 '사진정난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⑤. 戊寅,賜朱全忠號回天再造竭忠守正功臣,賜其僚佐敬翔等號迎鑾協贊功臣,諸將朱友寧等號迎鑾果毅功臣,都頭以下號四鎭靜難功臣。〈難,乃旦翻。〉

 

 황상이 주전충을 칭찬하고 높이는 것을 논의하면서 황제의 아들 가운데서 제도병마원수로 삼고 주전충을 부원수로 삼고자 하였는데, 최윤은 휘왕 이조로 그것을 삼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황상이 말하였다.

 "복왕이 맏아들이오."

 최윤은 주전충의 밀지를 받고서 이조는 나이가 어린 것을 유리하게 생각하여 굳게 이를 요청하니, 8일에 이조를 제도병마원수로 삼았다.

 上議褒崇全忠,欲以皇子爲諸道兵馬元帥,以全忠副之;崔胤請以輝王祚爲之,上曰︰「濮王長。」〈帥,所類翻。濮,博木翻。長,知兩翻。〉胤承全忠密旨,利祚沖幼,固請之,己卯,以祚爲諸道兵馬元帥。〈《考異》曰︰《金鑾記》︰「上曰︰『朕以濮王處長。』」云云。《新傳》︰「帝十七子,德王裕、棣王祤、虔王禊、沂王禋、遂王禕、景王祕、輝王祚、祁王祺、雅王禎、瓊王祥、端王禛、豐王祁、和王福、登王禧、嘉王祜、潁王禔、蔡王祐。何皇后生裕及祚,餘皆失其母之氏位。」《舊傳》云昭宗十子,無端王禎以下七人。按《新》、《舊傳》,昭宗諸子皆無濮王。孫光憲《續通曆》︰「濮王名紃,昭宗之子,母曰太后王氏。哀帝被殺,朱全忠册紃爲天子,改元天壽;明年,禪位於梁。」此乃光憲傳聞謬誤也。昭宗亦無王皇后。《金鑾記》所云濮王,蓋德王改封耳。〉

 

 9일에 주전충에게 수태위를 덧붙여주어 부원수에 충임하고 작위를 올려서 양왕으로 하였다. 최윤을 사도 겸 시중으로 삼았다.

 庚辰,加全忠守太尉,充副元帥,進爵梁王。以胤爲司徒兼侍中。

 

 최윤이 주전충의 세력을 믿고 권력을 오로지하고 제멋대로 방자하게 하니, 천자의 움직임은 모두 그에게 보고되어 올려졌다.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황상을 수행하여 봉상으로 행차하였던 사람들로 무릇 깎여서 내쫒긴 사람은 30여 명이었다. 형상(刑賞: 형벌과 상)은 그의 애증에 달려 있으니, 안팎에서는 그를 두려워하여 두 발을 포개고서 한 발로 걷듯 하였다.

 胤恃全忠之勢,專權自恣,天子動靜皆稟之。〈稟,筆錦翻。〉朝臣從上幸鳳翔者,凡貶逐三十餘人。〈黨附宦官者可罪,扈從天子者何罪邪!朝,直遙翻。〉刑賞繫其愛憎,〈愛者賞之,憎者刑之。〉中外畏之,重足一迹。〈重,直龍翻。史言崔胤怙權,不知死期將至。〉

 

 경상을 수태부경으로 삼고, 주우녕에게 녕원절도사의 직책을 관장하게 하였다. 주전충이 표문을 올려서 부도소를 동평장사로 하여 천웅절도사에 충임하게 하였으며, 군사를 파견하여 멀리 진주로 호송하였으나, 도착할 수 없어서 돌아왔다.

 以敬翔守太府卿,朱友寧領寧遠節度使。〈寧遠軍,容州,時爲龐巨昭所據。五季以來有名號節度使,此類是也。〉全忠表符道昭同平章事,充天雄節度使,遣兵援送之秦州,〈之,往也。〉不得至而還。〈岐兵塞道,故不得至。還,從宣翻,又如字。〉

 

 

 ⑥. 애초에, 한림학사승지 한악이 진사에 급제할 때 어사대부 조숭은 지공거였다. 황상이 봉상에서 돌아오자 한악을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한악은 조숭과 병부시랑 왕찬을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황상이 그것을 따르려고 하였으나, 최윤이 그들이 작의 권력을 분산시키게 될 것을 싫어하여 주전충으로 하여금 들어와서 그것을 다투게 하였다. 주전충이 황상을 알현하고 말하였다.

 ⑥. 初,翰林學士承旨韓偓之登進士第也,御史大夫趙崇知貢舉。上返自鳳翔,欲用偓爲相,偓薦崇及兵部侍郎王贊自代;上欲從之,崔胤惡其分己權,〈惡,烏路翻。〉使朱全忠入爭之。全忠見上曰︰〈見,賢遍翻。〉

 

 "조숭은 경ㅂㄱ한 사람드르이 우두머리이고 왕찬은 재능과 쓸모가 없는데, 한악이 어찌 경망되게 추천하여 재상으로 삼게 하려 할 수 있습니까!"

 황상은 주전충이 화가 난 것이 심한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12일에 한악을 깎아내려서 복주사마로 삼았다.

 「趙崇輕薄之魁,王贊無才用,韓偓何得妄薦爲相!」上見全忠怒甚,不得已,癸未,貶偓濮州司馬。

 

 황상이 몰래 한악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하였는데, 한악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앞서 왔었던 사람들과는 다시는 비교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먼 곳으로 좌천되어 죽게 된 것은 오히려 다행일 뿐이며, 차마 찬시하는 치욕은 보지 못하겠습니다!"

 上密與偓泣別,偓曰︰「是人非復前來之比,〈謂朱全忠也。〉臣得遠貶及死乃幸耳,不忍見篡弒之辱!」〈鳴呼!韓偓何見之晚也!然昭宗聞偓此言,亦何以爲懷哉!惟有縱酒而已。

 

 ⑪. 이극용의 사자가 진양에서 돌아와 최윤의 횡포함을 말하자, 이극용이 말하였다.

 "최윤은 신하의 신분으로 밖으로는 도적의 세력에 의지하고 안으로는 그 군주를 위협하면서, 이미 조정의 정권을 잡았고, 또 병권도 손아귀에 넣었다.

 권력이 무거워지면 원망이 많아지고 세력이 대등해지면 불화가 생기는데, 가정이 깨지고 국가가 망하게 될 것이 눈앞에 있구나!"

 ⑪. 李克用使者還晉陽,言崔胤之橫,〈橫,戶孟翻。〉克用曰︰「胤爲人臣,外倚賊勢,內脅其君,旣執朝政,又握兵權。權重則怨多,勢侔則釁生,破家亡國,在眼中矣!」〈史言李克用有識。朝,直遙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