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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되는 환관과 소종의 환궁/白露節初候鴻雁萊(18:53)2日(陰8/2)己未

solpee 2021. 9. 7. 11:02

《唐紀79 宗 天福 3年》〈癸亥, 903年

 

 ③. 정월, 6일에 이무정이 홀로 황상을 알현하였지만, 중위 한전회· 장언홍· 추밀사 원이간· 주경용은 모두 대면할 수 없었다. 이무정은 한전회 등을 주살하고 주전충과 화해하며, 거가를 모시고 경사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③. 戊申,李茂貞獨見上,〈見,賢遍翻。〉中尉韓全誨、張彥弘、樞密使袁易簡、周敬容皆不得對。〈易,以豉翻。〉茂貞請誅全誨等,與朱全忠和解,奉車駕還京。

 

 황상은 기뻐하며 즉시 내양을 파견하여 봉상의 병졸 40명을 거느리고 한전회 등을 잡아들여 그들을 참수하게 하였다. 어식사 제오가범을 좌군중위로 삼고, 왕지고를 상원추밀사로 삼고, 양건량을 하원추밀사로 삼았다. 이날 저녁에 또 이계균· 이계회· 이언필 그리고 내제사사 위저정 등 16명을 참수하였다. 7일에 한악과 조국부인을 파견하여 주전충의 군영에 가게 하고, 또 사신을 파견하여 한전회 등의 20여 명의 수급을 주머니에 넣어서 주전충에게 보여주게하고 말하였다.

 上喜,卽遣內養帥鳳翔卒四十人收全誨等,斬之。〈內養,亦宦者也。帥,讀曰率。〉以御食使第五可範爲左軍中尉,〈御食使,掌御膳,亦唐末所置內諸司使之一也。〉宣徽南院使仇承坦爲右軍中尉,王知古爲上院樞密使,楊虔朗爲下院樞密使。〈樞密分東西兩院,東院爲上院,西院爲下院。〉是夕,又斬李繼筠、李繼誨、李彥弼及內諸司使韋處廷等十六人。〈處,昌呂翻。〉己酉,遣韓偓及趙國夫人詣全忠營;又遣使囊全誨等二十餘人首以示全忠,〈《考異》曰︰《舊紀》︰「丁巳,蔣玄暉與中使押送全誨等二十人首級,告諭四鎭兵士回鑾之期。」《新紀》︰「正月,戊申,殺全誨等。」《唐太祖紀年錄》︰「正月,甲辰,鳳翔李茂貞殺其子繼筠、觀軍容韓全誨、張彥弘、樞密使袁易簡、周敬容等二十二人,皆斬首囊盛,押領出城,以示朱溫。」《金鑾記》︰「六日,誅全誨等。」《唐年補錄》︰「正月,癸卯,賜朱全忠詔。」《唐補紀》云︰「天復三年,二月,誅全誨等八人。」其全誨等伏誅日,今從《金鑾記》、《實錄》、《新紀》。按《金鑾記》、《唐年補錄》、《唐實錄》、《後唐紀年錄》載六日所誅宦官名,可見者全誨等四人,處廷等十六人,而《金鑾記》云,「是夜處置內官一十九人。」《唐年補錄》云,「全誨以下二十二人首級。」《紀年錄》云,「殺全誨等二十二人。」《北夢瑣言》亦云「二十二人首」。《新傳》云,「繼筠、繼誨、彥弼皆伏誅。是夜,誅內諸司使韋處廷等二十二人。」若幷繼筠等數之,則多一人;若共數宦官,則少二人;若如《金鑾記》,是夜又誅十九人,則多一人。或者二人名不見歟?〉曰︰

 

 "이전에 거가를 위협하여 머물게 하였고 죄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간질을 하며, 협력과 화해를 하지 않으려 하였던 것은 모두 이 사람들이오. 오늘 짐이 이무정과 더불어 뜻을 결정하여 그들을 주살하였으니, 경은 여러 군사들에게 알리고 타일러서 많은 사람들의 울분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오."

 9이레 주전충이 관찰판관 이진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가 사례를 하게 하였다.

 「曏(向仝)來脅留車駕,懼罪離間,〈間,古莧翻。〉不欲協和,皆此曹也。今朕與茂貞決意誅之,卿可曉諭諸軍以豁衆憤。」辛亥,全忠遣觀察判官李振奉表入謝。〈朱全忠先此以李振爲天平節度副使,今蓋爲四鎭觀察判官。〉

 

 한전회 등이 이미 주살되었지만 주전충의 포위는 오히려 풀리지 않았다. 이무정은 최윤이 주전충을 교사하여 반드시 봉상을 빼앗으려 한다고 의심하여 황상에게 보고하여서 급히 최윤을 불고 명령을 내려 백관을 거느리고 행재로 오게 하였다. 무릇 네 번 조서를 내렸는데 세 번은 주필로 쓴 어찰이었고, 말씀은 심히 절실하고 지극하였으며, 모두 이전의 관작을 회복시켜 준다고 하였으나, 최윤은 끝내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이무정은 두려워하며 친히 최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말씨는 심히 낮추고 겸손하게 하였다. 주전충 역시 서신으로 최윤을 부르고 또 그에게 농담하며 말하였다.

 全誨等已誅,而全忠圍猶未解。茂貞疑崔胤敎全忠欲必取鳳翔,白上急召胤,令帥百官赴行在。〈帥,讀曰率。〉凡四降詔,三賜朱書御札,〈薛《史》載莊宗朝段徊奏曰︰「唐制,或歲時災歉,國用不足,天子將求經濟之要,則內出朱書御札以訪羣臣。」〉言甚切至,悉復故官爵,胤竟稱疾不至。茂貞懼,自致書於胤,辭甚卑遜。全忠亦以書召胤,且戲之曰︰

 

 "나는 아직 천자를 잘 알지 못하니, 마땅히 공이 와서 그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가려 주시오."

 최윤이 비로소 왔다.

 12일에 봉상이 비로소 성문을 열었다. 14일에 주전충이 여러 영채를 순시하다가 성의 북쪽에 도착하였는데 봉상의 군사가 북쪽 산에서 내려오자, 주전충은 그들이 자기를 압박할 것이라고 의심해서 군사를 파견하여 그들을 치게 하고 그들의 장수인 이계흠을 사로잡았다.

 「吾未識天子,須公來辨其是非。」胤始來。〈崔胤其初所以未敢來者,待朱全忠之命耳。然君命累召而不來,朱全忠一書而遽至,人臣事君者,必知所先後輕重矣。〉

甲寅,鳳翔始啓城門。丙辰,全忠巡諸寨,至城北,有鳳翔兵自北山下,全忠疑其逼己,遣兵擊之,擒其將李繼欽。

 

 황상이 조국부인과 풍익부인을 파견하여 주전충의 군영에 가게 해서 그 연고를 힐문하게 하자, 주전충은 가까이 하는 관리인 장현위를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가 아뢰게 하였다.

 이무정이 그의 아들인 이간을 평원공주를 모시고 살게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또 소검의 딸을 경왕 이비의 왕비로 삼아서 자기를 견고히 하려고 하였다. 평원공주는 하황후의 딸로 황후가 속으로 그것을 곤란해 하자, 황상이 말하였다.

 上遣趙國夫人、馮翊夫人詣全忠營詰其故,〈二夫人於內命婦爵秩有國郡之殊。詰者,詰其已和解而復遣兵相擊。〉全忠遣親吏蔣玄暉奉表入奏。

李茂貞請以其子侃尚平原公主,又欲以蘇檢女爲景王祕妃以自固。平原公主,何后之女也,后意難之,上曰︰

 

 "또 나로 하여금 나가게 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 너의 딸을 걱정하는가!"

 황후는 마침내 이를 따랐다. 20일에 평원공주는 송간(이간의 본명)에게 시집갔고, 경왕이 소씨를 비로 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且令我得出,〈嗚呼!唐昭宗惟幸於得出,徐令全忠取平原,茂貞必不敢距;豈知夫婦委命於全忠,不復有能取之者乎!〉何憂爾女!」后乃從之。壬戌,平原公主嫁宋侃;〈嫌於同姓嫁娶,故復侃本姓。〉納景王妃蘇氏。〈古者猶謂師婚爲非禮,唏矣!〉

 

 당시 봉상에서 주살된 환관들이 이미 72명이었는데, 주전충은 또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경조에서 치사하였거나 수행하여 따라오지 않은 자를 찾아내서 체포하여 90명을 주살하게 하였다.

 22일에 거가가 봉상을 출발하여 주전충의 군영으로 행차하였다. 주전충은 소복 차림으로 대죄하였는데, 객성사에게 명령을 내려서 성지를 선포하여 죄를 풀어주게 하고, 삼장을 철수시키고 단지 평안을 알리게 하여, 공복 차림으로 들어가 감사함을 아뢰었다.

 時鳳翔所誅宦官已七十二人,朱全忠又密令京兆搜捕致仕不從行者,誅九十人。

甲子,車駕出鳳翔,幸全忠營。全忠素服待罪;命客省使宣旨釋罪,〈時客省使,蓋通知閤門事,故令宣旨釋罪。〉去三仗,止報平安,〈唐制,正衙有親、勳、翊三衞立仗,左、右金吾將軍以一人報平安。去三仗者,恐全忠以羽衞之嚴不敢入也。《考異》曰︰王禹偁《五代史闕文》曰︰「昭宗佯爲鞋系脫,呼梁祖曰︰『全忠爲吾繫鞋。』梁祖不得已,跪而結之,流汗浹背。時天子扈蹕尚有衞兵,昭宗意謂左右擒梁祖以殺之,其如無敢動者。自是梁祖被召多不至;其後盡去昭宗禁衞,皆用汴人矣。」按全忠時擁十萬之衆,昭宗方脫茂貞虎口,託身全忠,豈敢遽爲此謀!或者欲效漢高祖之折黥布,亦恐昭宗不能辦耳。今不取。去,羌呂翻。〉以公服入謝。〈唐章服之制,有朝服、公服。朝服,具服也;公服,從省服也。〉

 

 주전충이 황상을 알현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렸고, 황상은 한악에게 명령을 내려 그를 부축하여 일어나게 하였다. 황상 역시 흐느끼며 말하였다.

 "종묘와 사직은 경에게 의지하여 다시 평안해졌고, 짐과 종족들은 경에게 의지하여 다시 태어났소."

 친히 옥대를 풀어서 그에게 내렸다. 조금 쉬었다가 즉각 떠났다. 주전충이 단기로 앞에서 10여 리를 안내하자 황상은 긍개 사양하였다.

 주전충은 마침내 주우륜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홎ㅇ하게 하고, 스스로는 일부분의 후위군사를 남겨노하 여러 성채를 불사르고 철거하였다. 주우륜은 주론의 아들이다.

 全忠見上,頓首流涕;上命韓偓扶起之。上亦泣,曰︰「宗廟社稷,賴卿再安;朕與宗族,賴卿再生。」親解玉帶以賜之。少休,卽行。全忠單騎前導十餘里,上辭之;〈此皆朱全忠繆爲恭敬也。〉全忠乃令朱友倫將兵扈從,自留部分後隊,焚撤諸寨。〈從,才用翻;下同。分,扶問翻。〉友倫,存之子也。〈存,全忠仲兄也。〉

 

 이날 저녁에 거가는 기산에 머물렀다가, 23일에 흥평에 도착하였는데, 최윤이 비로소 백관을 거느리고 영접하고 알현하니, 다시 최윤을 사공· 문하시랑·동평장사로 삼고 삼사를 관장하는 것은 옛날과 같이 하도록 하였으며, 27일에 장안에 들어갔다.(901년 11월 4일 출궁하였다가 903년 1월 27일에 돌아옴)

  是夕,車駕宿岐山;丁卯,至興平,崔胤始帥百官迎謁,〈帥,讀曰率。〉復以胤爲司空、門下侍郎、同平章事,領三司如故;〈車駕至鳳翔,貶崔胤官,今復之。〉己巳,入長安

 

 28일에 주전충과 최윤이 함께 소대하였다. 최윤이 주문을 올렸다.

 "국가의 초기 승평시기에는 환관들이 군사를 관장하거나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천보 이래로 환관들이 점점 흥성하게 되었습니다. 정원 말기에 우림위를 나누어 좌·우신책군으로 하여 숙위와 수행을 편하게 하여서 비로소 환관들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되었고 2천 명을 가지고 고정된 제도로 삼았습니다.

 庚午,全忠、崔胤同對。胤奏︰「國初承平之時,宦官不典兵預政。天寶以來,宦官浸盛。貞元之末,分羽林衞爲左、右神策軍以便衞從,始令宦官主之,以二千人爲定制。〈神策軍入衞苑中,自代宗魚朝恩始。德宗貞元末始分爲左、右。從,才用翻。〉

 

 이로부터 기밀에 참여하여 관장하며 백사의 직권을 빼앗았고, 상하는 미봉하여 함께 불법을 행하니, 크게는 번진들을 모함하거나 선동하여 국가를 기울이고 위태롭게 하였고, 작게는 관직을 팔고 뇌물을 받고 옥사를 처리하여 조정의 정치를 좀먹고 해롭게 하였습니다.

 왕실이 쇠약하고 호난한 것은 책임이 연고이니, 그 뿌리를 잘라내지 않으면 화는 끝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여러 사사(司使: 환관들의 직위)를 전부 철폐하시고 그들의 사무는 성시에게 모두 돌려주시고 여어 도의 감군은 모두 불러서 궁궐의 아래로 돌아오게 하십시오."

 황상이 그것을 따랐다.

 自是參掌機密,奪百司權,上下彌縫,共爲不法,大則構扇藩鎭,傾危國家;小則賣官鬻獄,蠹害朝政。〈朝,直遙翻。〉王室衰亂,職此之由,不翦其根,禍終不已。請悉罷諸司使,其事務盡歸之省寺,諸道監軍俱召還闕下。」上從之。

 

 이날 주전충이 군사를 가지고 환관인 제오가범 등 수백 명을 내시성에 몰아넣고 그들을 전부 살해하니, 억울하다고 부르짖는 소리가 안팎으로 울려퍼졌다. 그들 가운데 외부로 사신으로 떠나 밖에 있는 사람은 조서를 내려 소재하는 곳에서 체포하여 그들을 주살하고 단지 황의를 입은 어리고 쇠약한 환관들 30명을 남겨놓아서 물을 주거나 청소를 하는 것을 대비하게 하였다.

 是日,全忠以兵驅宦官第五可範等數百人於內侍省,盡殺之,〈《考異》曰︰《舊紀》︰「辛未,內官第五可範已下七百人,並賜死於內侍省。」《金鑾記》︰「二十八日,處置第五可範已下四百五十人。」《太祖紀年錄》︰「內諸司百餘人及隨駕鳳翔羣小二百餘人,一時斬首于內侍省。」《舊傳》與《紀年錄》同。《新傳》︰「胤、全忠議誅第五可範等八百餘人於內侍省。」《梁太祖實錄》︰「己巳翌日,誅宦官第五可範等五百餘人于內侍省,仍命畿內及諸道搜索處置以盡厥類。」《唐年補錄》云︰「誅宦官七百一十人。」按《舊紀》、《編遺錄》皆云「正月辛未,誅可範等」。而《梁實錄》、《唐補紀》、《續寶運錄》、《金鑾記》、《唐年補錄》、薛居正《五代史‧梁紀》、《新唐紀》,或云己巳翊日,或云二十八日,今從之。蓋全忠、胤雖奏云罷諸司使務,追監軍赴闕,其實卽日已擅誅之,至二月癸酉始下詔賜死,故昭宗哀而祭之耳。〉冤號之聲,徹於內外。〈號,戶刀翻。徹,敕列翻。〉其出使外方者,詔所在收捕誅之,〈使,疏吏翻;下同。〉止留黃衣幼弱者三十人以備洒掃。〈宦官品秩之卑者衣黃。洒,所賣翻,又如字。掃,蘇報翻,又如字。〉

 

 또 성덕절도사 왕용에게 조서를 내려서 50명을 선발하여 진급시켜 칙사로 충당하게 하였는데, 그 땅의 풍속이 깊으며 두텁고 인성이 삼가고 순박한 사람들로 뽑았다. 황상은 제오가범 등 혹 죄가 없는 자들을 불쌍히 여겨 글을 써서 그들에게 제사 지냈다. 이로부터 조명을 선포하고 전달하는 것은 모두 궁인들로 하여금 출입하게 하였고, 그 양군의 안팎 8진군사는 모두 6군에 예속되었고, 최윤에게 판6군12위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又詔成德節度使王鎔選進五十人充敕使,取其土風深厚,人性謹樸也。上愍可範等或無罪,爲文祭之。自是宣傳詔命,皆令宮人出入;其兩軍內外八鎭兵悉屬六軍,〈謂左、右神策所統內外八鎭兵也。〉以崔胤兼判六軍十二衞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