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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에 의한 소종 폐위 소동2/處暑節末候禾乃登(마침내 벼가 익는다)3日(陰7/28)乙卯

solpee 2021. 9. 3. 17:34

《唐紀78 宗 光和 3年》〈庚申, 900年

 

 ㉙. 태자가 즉위한 지 몇십일이 지나도번진들의 전문과 표문 등이 대부분 도달하지 않았다. 왕중선의 성품은 가혹하며 자세히 살펴서 평소 좌· 우군 안에 폐단이 많이 누적된 것을 알아서 중위가 되기에 이르자, 군대 안의 전곡을 걸어서 비교하여 숨기거나 몰입한 간악한 사람들을 붙잡아서 그들을 아프게 채찍질하여서 빚진 것을 급히 징수하니, 장사들은 자못 불안해 하였다.

 ㉙. 太子卽位累旬,藩鎭牋表多不至。王仲先性苛察,素知左、右軍多積弊,及爲中尉,鉤校軍中錢穀,得隱沒爲姦者,痛捶之,〈捶,止橤翻。〉急徵所負;將士頗不安。

 

 염주의 웅의군사인 손덕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좌신책지휘사였고, 유계술이 폐립하면서부터 항상 분개와 탄식으로 마음이 평온치 않았다. 최유이 그 소식을 듣고 판관 석진을 보내 그와 교류하게 하였다. 손덕소는 술이 취하면 언제나 눈물을 흘렷고 석진은 그의 진실함을 알아서 마침내 비밀리에 최윤의 뜻을 가지고 그에게 유세하였다.

 有鹽州雄毅軍使孫德昭爲左神策指揮使,自劉季述廢立,常憤惋不平。〈捥,烏貫翻。〉崔胤聞之,遣判官石戩與之遊。〈判官,度支鹽鐵判官也。戩,卽淺翻。〉德昭每酒酣必泣,戩知其誠,乃密以胤意說之曰︰

 

 "상황께서 유폐된 이래로 안팎의 대신들에서부터 행군 중에 있는 사졸들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가 이를 갈지 않겠소! 오늘 반역을 한놈은 단지 유계술과 왕중선일 뿐인데 공은 진실로 이 두 사람을 주살하여 상황을 영접하여 직위를 회복시킬 수 있다면 부귀함은 일시에 끝까지 갈 것이고 충의는 천고에 흘러내리게 될 것인데, 만약 여우처럼 의심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공로는 다른 삶의 손에 떨어지게 될 것이오!"

 「自上皇幽閉,中外大臣至於行間士卒,孰不切齒!〈說,式芮翻。行,戶剛翻。〉今反者獨季述、仲先耳,公誠能誅此二人,迎上皇復位,則富貴窮一時,忠義流千古;苟狐疑不決,則功落他人之手矣!」

 

 손덕소가 감사해하면서 말하였다.

 "나 덕소는 소교이니 국가의 대사를 어찌 감히 오로지하겠소! 만약 상공께서 명령이 있다면 감히 죽음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德昭謝曰︰「德昭小校,〈校,戶敎翻。〉國家大事,安敢專之!苟相公有命,不敢愛死。」

 

 석진이 그것을 최윤에게 보고하였다.

 최윤이 옷을 묶는 혁대를 베어내어 손수 편지를 써서 그에게 주었다. 

 손덕소는 다시 우군청원도장 동언필· 주승희와 결탁하고, 제야에 안복문 밖에 군사를 매복시켜서 그들을 기다릴 것을 모의하였다.

 戩以白胤。胤割衣帶,手書以授之。德昭復結右軍清遠都將董彥弼、周承誨,〈清遠都,亦神策五十四都之一。復,扶又翻。〉謀以除夜伏兵安福門外以俟之。

 

《唐紀78 宗 天福 元年》〈辛酉, 901年

 

 ①. 봄, 정월 초하루 을유에 왕중선이 들어가 조현하면서 안복문에 도착하자, 손덕소가 그를 사로잡아 참수하고, 말을 달려 소양원에 가서 문을 두들기며 큰소리로 말하였다.

 "역적이 이미 주살되었으니 청컨대 폐하께서는 나오셔서 장수와 병사들을 위로해 주십시오!"

 하황후가 믿지 아니하고 말하였다.

 "과연 그러하다면 그의 수급을 가지고 와라!"

 손덕소가 그의 수급을 바치자, 황상은 마침내 황후와 함께 문짝을 부수고 나왔다. 최윤이 황상을 영접하여 장락문의 누각으로 모시고 백관을 거느리고 칭송하고 축하하였다.

 ①. 春,正月,乙酉朔,王仲先入朝,至安福門,孫德昭擒斬之,馳詣少陽院,叩門呼曰︰〈呼,火故翻。〉「逆賊已誅,請陛下出勞將士。」〈勞,力到翻。〉何后不信,曰︰「果爾,以其首來!」德昭獻其首,上乃與后毀扉而出。〈扉,門扇也。〉崔胤迎上御長樂門樓,〈《新書‧儀衞志》︰太極宮端門曰承天門,承天門分爲東西廊下門,自東廊下入長樂門,自西廊下入永安門。凡朝會之仗,門內各有挾門隊。樂,音洛。〉帥百官稱賀。〈帥,讀曰率。〉

 

 주승회는 유계술과 왕언범을 사로잡아서 잇달아 도착하였는데, 바야흐로 책망하였지만 이미 마구 때린 몽둥이에 죽어 있었다.

 설제악이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였으나 그를 꺼내어 참수하였다. 네 명의 가족들을 이멸하고 아울러 그들의 무리 20여 명을 주살하였다. 환간들이 태자를 모시어 좌군에 숨기고 건국보를 헌납하였다.

 황상이 말하였다.

 "이유는 어리고 나약한데 흉악한 환관들에 의해 옹립되었으니 그의 죄는 아니다!"

 周承誨擒劉季述、王彥範繼至,方詰責,已爲亂梃所斃。〈詰,去吉翻。梃,徒鼎翻。〉薛齊偓赴井死,出而斬之。滅四人之族,幷誅其黨二十餘人。宦官奉太子匿於左軍,獻傳國寶。上曰︰「裕幼弱,爲凶豎所立,非其罪也。」

 

 명령을 내려 동궁으로 돌아가게 하고 축출하여 덕왕으로 삼았으며 이름을 유로 회복시켰다. 3일에 손덕소를 동평장사로서 정해(하노이)절도사로 충임하고 성씨와 이름을 하사하여 이계소라 하였다.

 4일에 최윤은 직위를 사도로 승진시켰는데, 최윤이 고사하자, 황상이 최윤을 총애하고 대우하는 것이 더욱 두텁게 되었다.

 命還東宮,黜爲德王,復名裕。〈裕之爲宦官所立也,更名縝,今復其舊名。〉丙戌,以孫德昭同平章事,充靜海節度使,〈靜海軍,安南;孫德昭遙領也。〉賜姓名李繼昭。

丁亥,崔胤進位司徒,胤固辭;上寵待胤益厚。

 

 6일에 주전충은 유계술 등이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암의 발을 절단하여 형구를 채워 경사로 보내고 아울러 유희도와 이봉분 등을 모두 도성의 시장에서 참수하며 이때부터 이진을 더욱 중시하였다.

 己丑,朱全忠聞劉季述等誅,折程巖足,〈折,而設翻。薛《史‧梁紀》曰︰昭宗之廢也,汴之邸吏程巖牽昭宗衣下殿。帝召巖至汴,折其足,至長安,殺之。〉械送京師,幷劉希度、李奉本等皆斬於都市,由是益重李振。〈李振請誅劉季述等見上。〉

 

 7일에 주승희를 영남서도(옹주)절도사로 삼고 성명을 하사하여 이계희라 하고, 동언필을 녕원절도사로 삼고 성을 하사하여 이씨라 하였고, 나란히 동평장사로 삼았으며, 이계소와 함께 모두 궁궐에 머물고 숙직하며 호위하다가 열흘이 되자 비로소 빠져나와 집에 돌아갔고, 은상은 부고를 기울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삼사상(三使相: 재상 직위 절도사 이계희, 이언필, 이계소)이라 불렀다.

 庚寅,以周承誨爲嶺南西道節度使,賜姓名李繼誨,董彥弼爲寧遠節度,賜姓李,並同平章事;與李繼昭俱留宿衞,十日乃出還家,〈卽旬休之制也。〉賞賜傾府庫,時人謂之「三使相」。〈未幾,周承誨、董彥弼復朋比宦官,獨孫德昭不肯爾。〉

 

 10일에 주전충의 작위를 승진시켜 동평왕으로 하였다.

 癸巳,進朱全忠爵東平王。〈《考異》曰︰《舊紀》︰「二月,以全忠守中書令,進封梁王。」薛居正《五代史‧梁紀》︰「正月,癸巳,進封帝爲梁王,酬返正之功也。」《實錄》︰「癸巳,沛郡王朱全忠加定謀宣力功臣,進封東平王。」《新紀》︰「二月,辛未,封全忠爲梁王。」按《編遺錄》,此年二月辛未表讓梁王。三年二月制云︰「兔苑名邦,睢陽奧壤,光膺簡册,大啓封疆;可守太尉、中書令,進封梁王。」或者今年已曾封梁王,全忠讓不受,改封東平王,至三年乃進封梁王。而三年制辭,前官爵已稱梁王,蓋誤也。今從《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