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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에 의한 소종 폐위 소동/處暑節末候禾乃登(마침내 벼가 익는다)1日(陰7/26)癸丑

solpee 2021. 9. 1. 16:18

《唐紀78 宗 光和 3年》〈庚申, 900年

 

 ㉕. 애초에, 최윤이 황제와 더불어 환관들을 전부 주살할 것을 비밀리에 모의하였는데, 송도필과 경무수가 죽게 되자, 환관들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황상이 화주로부터 돌아온 후에 홀홀 즐겁지 않아 대체로 멋대로 술을 마셨고 기쁨과 노여움이 일정하지 않아 좌우에 있는 사람들은 특히 스스로 위험을 느꼈다.

 ㉕. 初,崔胤與帝密謀盡誅宦官,及宋道弼、景務脩死,〈事見上六月。〉宦官益懼。上自華州還,〈光化元年,上還自華州,事見上卷。還,從宣翻,又如字。〉忽忽不樂,〈樂,音洛。〉多縱酒,喜怒不常,左右尤自危。

 

 이에 좌군중위 유계술· 우군중위 왕중선· 추밀사 왕언범· 설제악 등이 몰래 서로 함께 모의하며 말하였다.

 "주상께서는 경박하고 과다하게 변덕스럽고 속이니 받드는 일이 어려우며, 오로지 남사 사람들의 말만 믿고 임용하니 우리들은 결국 그 호에 걸릴 것이다. 태자를 받들어 그를 세우고 주상을 높여서 태상황으로 하고 기와 화의 군사를 끌어들여 후원자로 삼아 여러 번진을 통제하는 것만 못하니, 누가 우리들을 해칠 수 있겠는가?"

 於是左軍中尉劉季述、右軍中尉王仲先、樞密使王彥範、薛齊偓等陰相與謀曰︰「主上輕佻多變詐,難奉事;〈佻,土彫翻。〉專聽任南司,〈時宦官謂之北司,謂南牙百官爲南司。〉吾輩終罹其禍。不若奉太子立之,尊主上爲太上皇,引岐、華兵爲援,〈岐,李茂貞;華,韓建。華,戶化翻。〉控制諸藩,誰能害我哉!」

 

 11월에 황상이 어원에서 수렵을 하고, 이어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저녁이 되어 술이 취해 돌아와서 자기 손으로 황문(黃門: 환관)과 시녀 몇 명을 죽였다.

 다음날 아침에 시간이 진시와 사시가 되었는데도 궁문이 열리있지 않았다. 유계술이 중서성에 가서 최윤에게 보고하여 말하였다.

 "황궁 안에 반드시 변고가 있을 것인데, 나는 내신으로 형편에 따라서 일을 처리할 수 있으니, 청컨데 들어가 이를 살피게 해주십시오."

 마침내 금군 1천 명을 거느리고 문을 부수고 진입하여서 물어 조사한 후 그 상홍을 구체적으로 얻어 알게 되었다."

 十一月,上獵苑中,〈禁苑在宮城北。〉因置酒,夜,醉歸,手殺黃門、侍女數人。明旦,日加辰巳,宮門不開。季述詣中書白崔胤曰︰「宮中必有變,我內臣也,得以便宜從事,請入視之。」乃帥禁兵千人破門而入,〈帥,讀曰率。〉訪問,具得其狀。

 

 나와서 최윤에게 일컬어 말하였다.

 "주상께서 한 일이 이와 같은데, 어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아둔한 사람을 폐위시키고 명석한 사람을 세우는 일은 옛날부터 있어왔는데 사직을 위한 큰 계책이지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최윤은 죽게 될 것이 두려워 감히 거역하지 못하였다. 6일에 유계술이 문무백관들을 불러, 궁전의 뜰에 군사를 늘어놓고 최윤의 이름을 자필로 쓴 장문을 작성하게 하였는데, 태자를 청하여 감국하게 하여 이것을 보여준 후 서명하게 하였으며, 최윤과 백관들은 어쩔 수 없이 모두 그것에 서명하였다.

 出,謂胤曰︰「主上所爲如是,豈可理天下!廢昏立明,自古有之,爲社稷大計,非不順也。」胤畏死,不敢違。庚寅,季述召百官,陳兵殿庭,〈陳兵以脅百官也。〉作胤等連名狀,請太子監國,以示之,使署名;胤及百官不得已皆署之〈監,古銜翻。〉

 

 황상이 걸교루에 있는데, 유계술과 왕중선이 갑사 1천 명을 문 밖에 매복시켜 놓고 선무진주관 정암 등 10여 명과 함께 들어가 만나보기를 요청하였다. 유계술과 왕중선이 막 전각에 오르자, 장사들이 크게 소리치고 돌격하여 선화문으로 진입하였고, 사정전 앞에 도착하여서 궁내의 사람들을 만나자 번번이 그들을 죽였다.

 上在乞巧樓,〈按《劉季述傳》,乞巧樓在思玄門內,近思政殿。〉季述、仲先伏甲士千人於門外,〈卽宣化門外。〉與宣武進奏官程巖等十餘人入請對。季述、仲先甫登殿,將士大呼,〈呼,火故翻。〉突入宣化門,至思政殿前,逢宮人,輒殺之。

 

 황상이 군사들이 들어온 것을 보고 놀라서 평상 아래로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곧 도망가려 하는데, 유계술과 왕중선이 그를 겨드랑을 잡아서 앉도록 하였다.

 궁인들이 달려가 황후에게 보고하자, 황후가 달려와서 절하며 청하였다.

 "군용들은 택가를 놀라게 하지 마시오. 일이 있으면 군용들과 상의 하겠소."

 마침내 유계술 등이 백관의 장문을 꺼내어 황상에게 보고하며 말하였다.

 "폐하께서 큰 보배로운 자리에 싫증내고 피곤해하여 안팎에 있는 무리들의 마음은 바라건대 태자가 감국하게 하는 것이니, 청컨대 폐하께서는 동궁에서 보양토록 하십시오."

 上見兵入,驚墮牀下,起,將走,季述、仲先掖之令坐。宮人走白皇后,后趨至,拜請曰︰「軍容勿驚宅家,有事取軍容商量。」〈量,音良。今人謂議事爲商量。〉季述等乃出百官狀白上,曰︰「陛下厭倦大寶,中外羣情,願太子監國,請陛下保頤東宮。」〈頤,養也;言於少陽院自保也。〉

 

 황상이 말하였다.

 "어제 경들과 술을 즐긴 것은 나도 모르게 너무 지나쳤지만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오!"

 대답하였다.

 "이는 신 등의 행위가 아니고 모두가 남사에 있는 무리들의 마음이어서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또 동궁으로 가셔서 일이 조금 평정되기를 기다리다가 다시 영접하여 대내로 돌아오게 할 뿐입니다."

 황후가 말하였다.

 "택가께서는 빨리 군용들의 말에 의거하십시오."

 上曰︰「昨與卿曹樂飲,不覺太過,〈樂,音洛。〉何至於是!」對曰︰「此非臣等所爲,皆南司衆情,不可遏也。願陛下且之東宮,〈之,往也。〉待事小定,復迎歸大內耳。」后曰︰「宅家趣依軍容語!」〈趣,讀曰促。〉

 

 곧바로 전국보를 꺼내서 유계술에게 전하였고, 환관들이 황상과 황후를 부축하여 함께 연에 태우니, 빈어로 시종하는 사람은 겨우 10여 명이었고, 소양원에 갔다. 유계술이 은과로 땅에 그림을 그리면서 황상을 헤아리며 말하였다.

 "모시의 어떤 일은 네가 나의 말을 따르지 않았으니 그 죄의 첫 번째이다."

 이처럼 책망하기를 열을 헤아려도 그치지가 않았다. 마침내 손수 그 문을 잠그고 철을 녹여 그를 땜질시켰으며, 좌군부사 이사건을 파겨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곳을 포위하게 하니, 황상의 움직임은 번번이 유계술에게 보고되었으며, 담장에 구멍을 뚫어서 음식을 소통하게 하였다.

 卽取傳國寶以授季述,宦官扶上與后同輦,嬪御侍從者纔十餘人,〈從,才用翻。〉適少陽院。季述以銀檛畫地數上曰︰〈檛,側加翻。數,所具翻,俗從上聲。〉「某時某事,汝不從我一言,其罪一也。」如此數十不止。〈歷數之,至數十不止。〉乃手鎖其門,鎔鐵錮之,〈錮,音固。〉遣左軍副使李師虔將兵圍之,上動靜輒白季述,穴牆以通飲食。

 

 무릇 무기와 침 그리고 칼은 모두 반입될 수 없었고, 황상이 전과 비단을 요구하였으나 모두 얻지 못하였으며, 종이와 붓을 요청하였으나 역시 주지 않았다. 당시 날씨가 대단히 추웠는데 빈어와 공주들은 의복과 이불이 없었으니 울부짖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유계술 등은 조서를 고쳐가지고 태자에게 감국하게 하고, 태자를 영접하여 궁궐로 돌아왔다.

 7일에 조서를 고쳐서 태자로 하여금 자리를 계승하게 하고, 이름을 바꾸게 하여 이진이라 하였다. 황상을 태상황으로 삼고 황후를 태상황후로 삼았다.

 10일에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나아갔고 소양원의 이름을 바꾸어 문안궁이라 하였다.

 凡兵器針刀皆不得入,上求錢帛俱不得,求紙筆亦不與。時大寒,嬪御公主無衣衾,號哭聞於外。〈號,戶刀翻。聞,音問。〉季述等矯詔令太子監國,迎太子入宮。〈《考異》曰︰按此月乙酉朔,己丑五日,庚寅六日也。廢立之日,《舊紀》云庚寅,《舊‧宦者傳》、《唐年補紀》皆云六日,無云五日者;而《實錄》、《新紀》云己丑,誤也。《唐太祖紀年錄》,先云六日,後云七日,尤誤也。崔胤所恃者昭宗耳,季述議廢立,安肯卽從之!《補錄》、《紀年錄》言脅之以兵,是也。《唐補紀》云「皇后穴牆取太子」,又云「令旨宣告大臣與社稷爲主」,又云「后白軍容,令聖上養疾。」皆程匡柔爲宦者諱耳,不可信也。〉辛卯,矯詔令太子嗣位,更名縝。〈更,工衡翻;下同。縝,止忍翻。〉以上爲太上皇,皇后爲太上皇后。甲午,太子卽皇帝位,更名少陽院曰問安宮。

 

 유계술이 백관들에게 작위와 품질을 덧붙여 주었는데, 장사오 더불어 모두 넉넉한 상을 받았으니 많은 사람드르이 비위를 맞추고자 한 것이었다. 목왕 이의를 죽이고, 무릇 궁인· 좌우· 방사· 승려· 도사들 가운데 항상이 총애하고 신뢰하는 사람은 모두 매질하여 그들을 죽였다.

 매일 밤에 사람을 죽이니 낮에는 10량의 수레를 가지고 시신을 싣고 나갔는데, 한 수레에 가녹 한두 구의 시신에 그쳤으니, 위엄을 세우려고 한 것이었다. 

 季述加百官爵秩,與將士皆受優賞,欲以求媚於衆。殺睦王倚;〈倚,上弟也。〉凡宮人、左右、方士、僧、道爲上所寵信者,皆榜殺之。〈榜,音彭。〉每夜殺人,晝以十車載尸出,一車或止一兩尸,欲以立威。

 

 곧 사천감 호수림을 죽이려 하자, 호수림이 말하였다.

 "군용께서는 군부를 유폐시키고, 다시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려 하고 있도다!"

 유계술은 그가 말한 것이 바른 것을 두려워하여 중지하였다. 유계술은 최윤을 살해하고자 하였으나 주전충을 꺼려서 단지 그의 탁지염철전운사를 해직시켰을 뿐이었다.

 將殺司天監胡秀林,〈武德四年,改太史監曰太史局,有令、有丞。高宗龍朔二年,改太史局曰祕書閣,局令曰祕書閣郎中。武后光宅元年,改太史局曰渾天監,俄改曰渾儀監,長安二年,復曰太史局。中宗景龍二年,改太史局曰太史監,乾元元年,改曰司天臺。置監一人,正三品,掌察天文,稽曆數。〉秀林曰︰「軍容幽囚君父,更欲多殺無辜乎!」季述憚其言正而止。季述欲殺崔胤,而憚朱全忠,但解其度支鹽鐵轉運使而已。〈【章︰十二行本「已」下有「崔胤密致書全忠,使興兵圖返正」十三字;乙十一行本同;張校同;退齋校同;孔本同,「返」作「反」。】〉〈《考異》曰︰《舊傳》︰「劉季述畏朱全忠之強,不敢殺崔胤,但罷知政事,落使務,守本官而已。胤復致書於全忠,請出師返正,故全忠令張存敬急攻晉、絳、河中。」按《舊紀》、《新紀》、《新‧宰相表》,此際皆無胤罷相事。全忠攻晉、絳、河中,乃在明年返正後,今不取。〉

 

 좌복야로 치사한 장준은 장수에 거쳐하였는데, 낙양에서 장전의를 만나서 그에게 광복을 권고하고, 또 여러 번진들에게 서신을 보내 이를 권고하였다.

 진사인 무체 사람 이우가 화주에서 세객으로 있으면서 한건에게 서신을 올렸는데, 그 대략이다.

 左僕射致仕張濬在長水,〈乾寧三年,上復欲相張濬,以李克用言而止,濬遂致仕居長水。宋白曰︰長水,本漢盧氏縣地,後魏延昌二年,分盧氏東境庫谷已西、沙渠谷已東,爲南陝縣。北有陝縣,故名南陝。廢帝元年,改爲長淵,以縣東洛水長淵爲名。唐以犯唐祖諱,改名長水。《九域志》︰在河南府西二百四十里。〉見張全義於洛陽,勸之匡復;又與諸藩鎭書勸之。

進士無棣李愚客華州,上韓建書,略曰︰

 

 "내가 매번 책을 읽으면서 부자와 군신 사이에 교화를 손상시키거나 예의를 해치는 사람들이 있을 적마다 그들을 시장거리에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습니다. 명공은 관에 근접한 중요한 진에 거처하는데, 군부께서 유폐와 모욕을 당하신 지 한 달이 넘어서도 안장서 흉폭하고 반역한 자들을 구경만 하고 있으며 근왕하는 거동도 잊어버리고 있으니, 제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가만히 계상해 보건대 조정 안에서 보필하는 신하는 비록 뜻은 있지만 병권이 없고 밖에서 진수하는 제후들은 비록 병권은 있지만 뜻이 없습니다.

 「僕每讀書,見父子君臣之際,有傷敎害義者,恨不得肆之市朝。〈上,時掌翻。朝,直遙翻;下並同。〉明公居近關重鎭,〈蓋謂華州控扼潼關,距關爲近。〉君父幽辱月餘,坐視凶逆而忘勤王之舉,僕所未諭也。僕竊計中朝輔弼,雖有志而無權;外鎭諸侯,雖有權而無志。

 

 오직 명공의 충성과 의로움에만 사직이 의존할 따름입니다. 예전에 거로가 파천하면 큰소리로 흐느껴 울며 받들어 영접하였고, 몇 년 동안 공급하고 선사하여 다시 묘· 조를 히복하여서 의로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지금까지 읊조려 노래하고 있습니다.

 惟明公忠義,社稷是依。往年車輅播遷,號泣奉迎,累歲供饋,再復廟、朝,〈謂乾寧三年建[迎]上駐蹕華州,光化元年歸長安也。廟、朝,謂宗廟、朝廷也。號,戶刀翻。〉義感人心,至今歌詠。

 

 이때의 사태오 형세는 이전의 날들과는 아주 다른데, 명공이 거처하는 땅은 요충지이고 직위는 장상을 겸하고 있습니다. 궁위에서의 변고는 이미 열흘 남짓의 시간이 경과하였는데도 만약 호령을 내려 ㅅㄹ선하여 올바른 상태로 복위하도록 도모하지 않고 망설이며 결정하지 않는다면 어느 날 아침에 산동의 후백들이 의를 표명하고 연형하여 북을 치며 서쪽으로 행군한다면, 명공께서는 자기 스스로가 안전하고자 하기를 구한다 하여도 장차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此時事勢,尤異前日;明公地處要衝,〈處,昌呂翻。〉位兼將相。自宮闈變故,已涉旬時,〈旬時,卽旬日也。〉若不號令率先以圖反正,遲疑未決,一朝山東侯伯唱義連衡,〈衡,讀曰橫。〉鼓行而西,明公求欲自安,其可得乎!〈言山東勤王之師若至華州,韓建亦不得安其位矣。其後朱全忠攻岐,遂徙建許州,卒如李愚之言。〉此必然之勢也。

 

 사방각지에 말을 달려 격문을 보내어 거역하는 것과 따르는 것의 차이를 알게 하여 군사이 명성을 한 번에 떨치게 하는 것만 못하니, 원흉들이 간이 떨어져서 순협(旬浹: 甲에서 癸까지 즉 열흘) 안에 두 녀석(유계술, 왕중선)의 머리를 천하에 전달하게 될 것이니, 계략 중에 이보다 더 간편한 것은 없습니다."

 한건은 비록 채용하지는 않았지만 두텁게 그를 대우해주었다. 이우는 굳게 사양하고 떠나갔다.

 不如馳檄四方,諭以逆順,軍聲一振,則元凶破膽,旬浹之間,二豎之首傳於天下,〈旬浹,謂一日、二日至于十日。浹,卽協翻。二豎,謂劉季述、王仲先。〉計無便於此者。」建雖不能用,厚待之。愚堅辭而去。

 

 주전충은 정주의 행영에 있으면서 변란의 소식을 들었고, 23일에 남쪽으로 돌아왔고, 12월 14일에 대량에 도착하였다. 유게술이 양자인 유희도를 파견하여 주전충에게 가서 당의 사직을 그에게 주겠다는 것을 허락하고, 또 공봉관 이봉본을 파견하여 태상황의 고명을 주전충에게 보여주었다. 주전충은 미적미적하며 아직 어떤 결정을 낼지 못하고 요좌들을 모아 그 일을 논의하게 하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朱全忠在定州行營,聞亂,丁未,南還;十二月,戊辰,至大梁。季述遣養子希度詣全忠,許以唐社稷輸之;又遣供奉官李奉本以太上皇誥示全忠。〈劉季述矯爲之誥也。〉全忠猶豫未決,會僚佐議之,或曰︰

 

 "조정의 큰일은 번진들이 의당 간여하여 처리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천평절도사 이진이 홀로 말하였다.

 "왕실에 환란이 있으니 이는 패권을 잡을 사람의 밑천입니다. 오늘날 공께서는 당대의 환(제 환공)과 문(진 문공)이시니, 안위가 귀속된 바입니다. 유계술은 한의 환관일 뿐이지만 마침내 감히 천자를 구금하여 유폐시켰으니, 공께서 토벌할 수 없다면 무엇으로 다시 제후들을 호령하시겠습니까? 또 어린 주상의 잘가 확정되었으니 천하의 권력은 모두 환관에게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이는 태아(구야자와 간장이 만든 보검)의 자루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朝廷大事,非藩鎭所宜預知。」天平節度副使李振獨曰︰「王室有難,〈難,乃旦翻。〉此霸者之資也。今公爲唐桓、文,安危所屬。〈李振以齊桓、晉文諂朱全忠。屬,之欲翻。〉季述一宦豎耳,乃敢囚廢天子,公不能討,何以復令諸侯!〈復,扶又翻。〉且幼主位定,則天下之權盡歸宦官矣,是以太阿之柄授人也。」

 

 주전충이 크게 깨닫고 즉시 유희도와 이봉본을 구금하고 이진을 파견하여 경사에 가서 정탐하게 하였다.

 이미 돌아오고 나서 다시 가까이 하는 관리인 장현위를 파견하여 경사로 가서, 최윤과 함께 이를 모의 하게하였고, 또 정암을 불러 대량으로 가게 하였다.

 全忠大悟,卽囚希度、奉本,遣振如京師詗事。〈詗,火迥翻,又翾正翻。〉旣還,又遣親吏蔣玄暉如京師,與崔胤謀之;又召程巖赴大梁。〈《考異》曰︰薛居正《五代史‧李振傳》︰「十一月,太祖遣振入奏於長安,邸吏程巖白振曰︰『劉中尉命其姪希貞來計大事。』旣至,巖乃先啓曰︰『主上嚴急,內官憂恐,左中尉欲行廢黜,敢以事告。』振顧希貞曰︰『百歲奴事三歲主,亂國不義,廢君不祥,非敢聞也。況梁王以百萬之師匡輔天子,幸熟計之!』希貞大沮而去。振復命,劉季述果作亂,程巖率諸道邸吏牽帝下殿以立幼主。振至陝,陝已賀矣。護軍韓彝範言其事,振曰︰『懿皇初昇遐,韓中尉殺長立幼以利其權,遂亂天下;今將軍復欲爾邪!』彝範,卽文約孫也,由是不敢言。」《編遺錄》︰「上雖聞其事,未知摭實,但懷憤激。丁未,上離定州軍前,十二月,戊辰,達大梁,欲潛謀返正,乃遣李振偵視其事。振回,益詳其宜也,尋馳蔣玄暉與崔胤密圖大義。」薛《史‧梁紀》︰「季述幽昭宗,立德王裕爲帝,仍遣其養子希度來言,願以唐之神器輸於帝。時帝方在河朔,聞之,遽還于汴,大計未決。會李振自長安使回,因言於帝云云。帝悟,因請振復使于長安,與時宰潛謀返正。」按季述廢立之前,李振若已嘗立異,今豈敢復入長安與崔胤謀返正乎!今從《編遺錄》。(《註》曰︰貞明中,史臣李琪、張袞、郗殷象、馮錫嘉修撰《太祖實錄》,事多漏略,敬翔別纂成三十卷補其闕,號曰《大梁編遺錄》。)又按《唐太祖紀年錄》及《舊‧張濬傳》皆云濬勸諸藩匡復,而《梁實錄》及《李振傳》皆云濬勸全忠附中官,與《紀年錄》及《舊傳》相違,恐《梁實錄》誤,《振傳》據《實錄》也。《唐補紀》曰︰「自監國居位,將及五旬,牋表不來,朝野驚虞,亢旱時多,虹蜺背璚。崔胤覩其不祥,便謀內變,潛行書檄於關外,播揚辭舌於街衢。朱全忠封崔胤檄書併手札等與季述云︰『彼已翻覆,早宜別圖。』無何,季述以此書示于崔胤曰︰『比來同匡社稷,卻爲鬬亂藩方,不審相公何至於此!』胤唯云︰『無此事,遭人反圖。刻蠟僞名,自古乃有。軍容若行怪怒,則乞俯存家族。』季述乃與言,哲相保始終。胤其夜便致書謝全忠云︰『昨以丹誠諮撓尊聽,卻蒙封示左軍劉公,其人已知意旨。今日與胤設盟,不相損害,然遠託令公爲主,方應保全,兼送女僕二人,細馬兩匹。』全忠覽書大詬曰︰『劉季述,我與伊同王事十二三年,兄弟如故,特令報渠;不能自謀,卻示崔相,道我兩頭三面,實是難容!我若不殺此公,不姓朱也!』乃擲於地,囚其使者,走一健步直申崔公,從茲與大梁同謀大事。」按崔胤曏來內倚昭宗,外挾全忠,與宦官爲敵。今昭宗旣廢,胤所以得未死者,以與全忠親密故也,全忠安肯以書示季述!季述恨胤深入骨髓,若得此書,立當殺胤,豈肯復以示胤而與之盟誓也!此殊不近人情,皆由程匡柔黨宦官,疾胤之亂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