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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소종 2/處暑節(06:35)初候鷹祭鳥1日(陰7/16)癸卯

solpee 2021. 8. 21. 16:32

《唐紀76 宗 乾寧 3年》〈丙辰, 896年

 

 ㉗. 애초에, 이극용 위수의 북쪽에 주둔하면서, 이무정과 한건은 그를 꺼려서 조정을 섬기는 예의가 대단히 겸손하였다. 이극용이 떠나자, 두 진에서 공물을 헌납하는 것이 점차 소원해졌고 표장의 언사는 거만하였다. 황상은 석문으로 부터 돌아와서, 신책양군 이외에 안성· 봉신· 보령· 선화 등의 군을 두고, 수만 명을 선발 보충하여 여러 친왕들로 하여금 그들을 거느리도록 하였는데, 사연왕 이계비와 사담왕 이사주도 또 스스로 모집하여 휘하가 수천 명이었다.

 ㉗. 初,李克用屯渭北,〈謂自邠寧還屯渭北時也。〉李茂貞、韓建憚之,事朝廷禮甚恭。克用去,〈謂歸河東也。〉二鎭貢獻漸疏,表章驕慢。上自石門還,於神策兩軍之外,更置安聖、捧宸、保寧、宣化等軍,選補數萬人,使諸王將之;嗣延王戒丕、嗣覃王嗣周又自募麾下數千人。

 

 이무정은 자기를 토벌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였으니 싫어하는 틈은 나날이 만들어졌다. 이무정은 역시 군사를 챙기면서 겉으로 궁궐에 가서 억울한 죄를 소송하겠다고 떠벌렸는데, 경사에 사는 사민들이 앞을 다투어 도망하여 산골짜기로 숨었다. 황상은 통왕 이자와 이사주· 이계비에게 명령을 내려서 여러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고 경기 부근을 방위하도록 하니, 이계비는 삼교에 주둔하였다.

 茂貞以爲欲討己,語多怨望,嫌隙日構。茂貞亦勒兵揚言欲詣闕訟冤;京師士民爭亡匿山谷。上命通王滋及嗣周、戒丕分將諸軍以衞近畿,戒丕屯三橋。

 

 이무정이 마침내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연왕은 아무 연고도 없이 군사행동을 취하여 신을 토벌하고 있으니, 신이 오늘 군사를 챙겨서 조정에 들어가 죄받기를 청하겠습니다."

 황상은 급히 사신을 파견하여 하동에 긴급함을 알렸다.  6월17일에 이무정이 군사를 이끌고 경기를 압박해서 담왕이 더불어 누관에서 싸웠으나, 관군의 패배가 누적되었다.

 茂貞遂表言「延王無故稱兵討臣,臣今勒兵入朝請罪。」〈《考異》曰︰薛居正《五代史》︰「五月,制授茂貞東川節度使,仍命通王、覃王治禁軍於闕下,如茂貞違詔,卽討之。茂貞懼,將赴鎭。王師至興平,夜,自驚潰,茂貞因出乘之,官軍大敗。」《唐補紀》曰︰「五月,朝廷除覃王爲鳳翔節度使,除茂貞爲興元節度使。茂貞拒命不發,亦無向闕之心,自是京國人心驚憂,出投郊坰,京城爲之一空,上潛謀行幸。」按《實錄》、《新》、《舊紀》諸書,茂貞未嘗除東川,薛《史》誤。移鎭興元,乃景福二年事,《唐補紀》誤。今從《實錄》。〉上遽遣使告急於河東。丙寅,茂貞引兵逼京畿,覃王與戰於婁館,官軍敗績。〈婁館,蓋在京兆興平縣西。《考異》曰︰《舊紀》︰「是月,茂貞請入覲,上令通王、覃王、延王分統四軍以衞近畿。丙寅,鳳翔軍犯京畿,覃王拒之於婁館,接戰不利。」《實錄》︰「命延王部神策諸軍於三橋防遏。茂貞上言︰『延王稱兵討臣,臣有何罪!』言將朝覲。丙寅,李茂貞大軍犯京師,覃王拒之於婁館,王師戰不利。」《新紀》︰「六月,庚戌,李茂貞犯京師,嗣延王戒丕禦之,丙寅,及茂貞戰于婁館,敗績。」今從《舊紀》。〉

 

 가을, 7월에 이무정이 진격하여 경사를 압박하자, 연왕 이계비가 말하였다.

 "오늘날 관중의 번진들 중에는 의탁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부주에서부터 하를 건너 태원으로 행차함만 같지 못하니, 청컨대 신이 먼저 가서 그것을 알리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12일에 부주로 행차한다는 조서를 내렸고, 13일에 황상은 출발하여 위수의 북쪽에 도착하였으며, 한건이 그의 아들인 한종윤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화주로 행차하기를 요청하였으나, 황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한건을 경기도지휘· 안무제치 그리고 통개사면도로· 최촉재도강운 등사로 삼았다.

 秋,七月,茂貞進逼京師。〈果如李克用之言。〉延王戒丕曰︰「今關中藩鎭無可依者,不若自鄜州濟河,幸太原,〈自鄜州濟河,道汾、隰至太原,路甚回遠,以韓建在華州,李茂貞養子繼瑭在同州,不敢由同州出河中也。鄜,音夫。〉臣請先往告之。」辛卯,詔幸鄜州;壬辰,上出至渭北;韓建遣其子從允奉表請幸華州,上不許。〈華,戶化翻。〉以建爲京畿都指揮、安撫制置及開通四面道路、催促諸道綱運等使。

 

 그러나 한건이 표문을 받드는 것이 계속해서 이어지니, 황상과 수행하는 관리들 역시 무서워서 멀리로 갔는데, 14일에 부평에 도착하여, 선휘사 원공신을 파겮여 한건을 불러서 마주보며 떠날 것인지 아니면 머무를 것인지를 상의하도록 하였다.

 15일에 한건이 부평에 와서 황상을 알현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而建奉表相繼,上及從官亦憚遠去,〈從,才用翻。〉癸巳,至富平,遣宣徽使元公訊召建,面議去留。甲午,建詣富平見上,頓首涕泣言︰

 

 "바야흐로 지금 번진의 신하 가운데 발호하는 사람이 이무정에 그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만약 종묘와 원릉을 떠나 변방 시골을 순행하신다면, 신은 거가가 하를 건넜다가 다시는 돌아올 기약이 없을까 걱정입니다. 지금 화주의 군사력은 비록 미약하지만 관보일대를 통제하여 거느리고 있으니 역시 스스로 고수하기에는 충분합니다. 신이 물자를 모아 축적하며 훈련하고 무기를 잘 갈고 있는 것이 15년이고, 서쪽으로 장안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 그곳에 왕림하시어 부흥할 일을 도모하십시오."

 황상은 이에 그를 따랐다.

 「方今藩臣跋扈者,非止茂貞。陛下若去宗廟園陵,遠巡邊鄙,臣恐車駕濟河,無復還期。今華州兵力雖微,控帶關輔,亦足自固。臣積聚訓厲,十五年矣,〈按韓建從鹿晏弘至興元之時,僖宗在蜀,遂奔行在,中和四年也。僖宗還長安,光啓元年也。建刺華州,當在此時,至是纔十二年耳。〉西距長安不遠,〈《九域志》︰華州西至長安一百五十里。〉願陛下臨之,以圖興復。」上乃從之。

 

 16일에 하규에 유숙하고 17일에 화주에 도착하여, 부사를 행궁으로 삼았고, 한건은 용흥사에서 업무를 보았다. 이무정이 마침내 장안에 진입하여 중화 이래 수리, 보수하였던 궁실과 시사를 모두 불태워 없앴다.

 26일에 중서시랑· 동평장사인 최윤을 동평장사로 하여 무안절도사에 충임하였다. 황상은 최소위의 무리라고 생각하였으니, 그런 고로 그를 축출한 것이다.

 乙未,宿下邽;丙申,至華州,〈《九域志》︰自富平至下邽三十五里。自下邽至華州六十五里。〉以府署爲行宮;建視事於龍興寺。茂貞遂入長安,自中和以來所葺宮室、市肆,燔燒俱盡。〈黃巢之亂,宮室燔毀,中和以來,留守王徽補葺粗完。襄王之亂,又爲亂兵所焚,及僖宗還京,復加完葺。上出石門,重罹燒爇,還又葺之,至是爲茂貞所燔。〉

乙巳,以中書侍郎、同平章事崔胤同平章事,充武安節度使。上以胤,崔昭緯之黨也,故出之。

 

 ㉛. 양행밀이 표문ㅇㄹ 올려서 황상에게 감회로 천돟ㄹ 것을 요청하였고, 왕건은 황상에게 성도로 행차할 것을 요청하였다.

 ㉛. 楊行密表請上遷都江淮,王建請上幸成都。〈皆欲迎天子,挾之以令諸侯。

 

 ㊱. 황상은 천하가 혼란한 것을 분개하여, 기특하고 걸출한 인사를 얻어 이를 차례를 지키지 아니하여 임용하고자 생각하였다. 국자박사 주박이 스스로 말하였다.

 "재상이 돌 수만 있다면, 1개월 만에 태평하게 할 수 있습니다."

 황상도 그러하다고 생각하였다.

 17일에 주박을 좌간의대부· 동평장사로 삼았다. 주박의 사람됨이 평범하고 비열하며 진부하고 괴퍅하며 다른 장점이 없었다. 제서가 나가자 안팎에서 크게 놀랐다.

 ㊱. 上憤天之亂,思得奇傑之士不次用之。國子博士朱朴自言︰「得爲宰相,月餘可致太平。」上以爲然。乙丑,以朴爲左諫議大夫、同平章事。〈《考異》曰︰《舊傳》曰︰「朴腐儒,木強無他才伎。道士許巖士出入禁中,常依朴爲姦利,從容上前,薦朴有經濟才。昭宗召見,對以經義,甚悅,卽日拜平章事。在中書,與名公齒,筆札議論,動爲笑端。」《唐補紀》曰︰「朴亦有文詞,託識諸王下吏人以通意旨,言︰『方今宰相皆非時才,致令宗社不安,頻有傾動;若使朴在相位,月餘能致太平。』諸王以爲然,乃奏天聽。翌日,宣喚,顧問機宜,便入中書,令參知政事。諸相座愕然莫測,聽其籌謨;經四五月,並無所聞,遂貶出嶺外。」按朴雖庸鄙,恐不如《舊傳》所云。《唐補史》亦恐得之傳聞,非詳實。今從《新傳》。〉朴爲人庸鄙迂僻,無他長。制出,中外大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