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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소종 1/立秋節末候寒蟬鳴3日(陰7/13)庚子

solpee 2021. 8. 19. 14:35

《唐紀76 宗 乾寧 2年》〈乙卯, 895年

 

 64. 이극용이 장서기 이습길을 파견하여, 조정에 들어와서 은상에 감사하고 비밀리에 황상에게 말하게 하였다.

 "근년 이래로 관과 삼보가 평안하지 않은데, 이 승리의 기세를 타게 되면, 드디어 봉상을 빼앗게 되니, 한 번의 고생으로 영원히 평안하게 되는데 시기를 놓칠 수 없습니다. 신은 위수의 북쪽에 군대를 주둔하고, 오직 진격할지 정지할 지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64. 李克用遣掌書記李襲吉入謝恩,〈景鳳[龍]元年,行軍府置掌書記;開元以後,諸節鎭皆置之;掌朝覲、聘慰、薦祭祀、祈祝之文,與號令、升絀之事。〉密言於上曰︰「比年以來,〈比,毗至翻。〉關輔不寧,〈關,謂蒲、潼、隴、蜀、藍田諸關。輔,謂三輔。關內,卽漢三輔之地。〉乘此勝勢,遂取鳳翔,一勞永逸,時不可失。臣屯軍渭北,專俟進止。」

 

 황상은 귀하고 가까운 사람들과 상의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무정이 무너져 멸망하게 되면 사타가 크게 흥성하게 되어 조정이 위태롭게 됩니다."

 황상은 이에 이극용에게 조서를 내려 그의 충성을 칭찬하였고, 또 말하였다.

 "신하로 복종하지 않는 상황은 왕행유가 심각하다. 짐이 행차하여 나갔던 이래로 이무정과 한건은 자기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있고, 국가의 은혜를 잊지 않았으며, 직공이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또 마땅히 군사 행동을 중지하고 백성들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上謀於貴近,或曰︰「茂貞復滅,〈復,扶又翻;下同。〉則沙陀大盛,朝廷危矣!」上乃賜克用詔,褒其忠款,〈款,誠也。〉而言︰「不臣之狀,行瑜爲甚。自朕出幸以來,茂貞、韓建自知其罪,不忘國恩,職貢相繼,且當休兵息民。」

 

 이극용이 조서를 받들어 중지하였다. 이미 그렇게 하고 났으나 사석에서 조서를 전달한 사신에게 말하였다.

 "조정의 뜻을 보니, 마치 나 이극용이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 같소. 하지만 이무정을 제거하지 않으면 관중 일대는 평안할 날이 없게 될 것이오."

 또 조서를 내려 이극용의 입조를 허락하지 않자, 장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지금 궁궐과 조정에 가까이까지 와 있는데, 어찌하여 조정에 들어가서 천자를 알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克用奉詔而止。旣而私於詔使曰︰「觀朝廷之意,似疑克用有異心也。然不去茂貞,〈去,羌呂翻。〉關中無安寧之日。」〈其後李茂貞再犯京師,克用亦不能救矣。〉又詔免克用入朝,將佐或言︰「今密邇闕庭,豈可不入見天子!」〈見,賢遍翻。〉

 

 이극용이 미적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개우가 이극용에게 말하였다.

 "이전에 왕행유의 무리들이 군대를 멋대로 풀어서 미쳐 날뛰며 도리를 위반하여서, 난여가 외지로 떠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백성들은 도망쳐 흩어졌습니다. 지금 천자께서는 아직도 자리를 편안하게 생각지 않고 인심은 아직 위태로운 판국에 대왕께서 만약 병사를 이끌고 위수를 건넌다면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도읍들이 다시 몹시 놀라게 될까 두렵습니다.

 신하로서 충성을 다한다 함은 근왕하는데 있는 것이지, 들어가서 조근하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니, 바라건대, 그것을 곰곰이 도모하시기를 바랍니다."

 克用猶豫未決,蓋寓言於克用曰︰「曏者王行瑜輩縱兵狂悖,〈悖,蒲妹翻,又蒲沒翻。〉致鑾輿播越,百姓奔散。今天子還未安席,人心尚危,大王若引兵渡渭,竊恐驚駭都邑。〈蓋寓言李克用旣不可釋兵入朝,若以衆入,是復邠、岐、華三帥之事耳。〉人臣盡忠,在於勤王,不在入覲,願熟圖之!」

 

 이극용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개우가 오히려 내가 입조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데, 하물며 천하의 사람들이야!"

 이에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신은 대군을 총괄 통솔하고 있어 감히 샛길로 조근할 수도 없고, 또 부락의 병사들이 위수 북쪽에 사는 주민들을 침범하여 소요를 일으키게 될까 겁납니다."

 克用笑曰︰「蓋寓尚不欲吾入朝,況天下之人乎!」乃表稱︰「臣總帥大軍,〈帥,讀曰率。〉不敢徑入朝覲,且懼部落士卒侵擾渭北居人。」

 

 29일에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 표문이 경사에 도착하자,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비로소 안심하였다. 조서를 내려 하동의 사졸들에게 돈 30만 민을 하사하였다. 이극용이 이미 떠나고 나자, 이무정의 거만과 횡포는 옛날과 같아서 하서의 주현은 대부분 이무정에게 점거되었고, 그의 장수인 호경장을 하서 절도사로 삼았다.

 辛亥,引兵東歸。表至京師,上下始安。詔賜河東士卒錢三十萬緡。克用旣去,李茂貞驕橫如故,〈橫,下孟翻。〉河西州縣多爲茂貞所據,〈河西,謂涼、瓜、沙、肅諸州。〉以其將胡敬璋爲河西節度使。

 

《唐紀76 宗 乾寧 3年》〈丙辰, 896年

 

 ⑱. 동창이 사람을 시켜서 전류의 군사를 정탐하도록 하였는데,  그 군사가 강성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노하여 그를 참수하였고, 군사가 지쳤고 식량이 소진되었다고 말하면 곧바로 그에게 상을 주었다.

 ⑱. 董昌使人覘錢鏐兵,〈覘,丑廉翻。〉有言其強盛者輒怒,斬之;言兵疲食盡,則賞之。

 

 4월, 27일에 원빈이 여요를 가지고 전류에게 항복하였으며, 고전무와 허재사가 군사를 전진시켜서 월주성의 아래에 도착하였다.

 戊寅,袁邠以餘姚降於鏐;顧全武、許再思進兵至越州城下。

 

 5월에 동창이 나가서 싸웠지만 실패하자 농성하며 스스로 지키니, 고전무 등이 그를 포위하였다. 동창은 비로소 두려워 황제의 칭호를 제거하고 다시 절도사라고 불렀다.

 五月,昌出戰而敗,嬰城自守,全武等圍之。昌始懼,去帝號,〈去,羌呂翻。〉復稱節度使。

 

 ㉔. 형남절도사 성예와 그의 장수인 허존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땅을 경락하여 강 연안의 주현들을 모두 탈취하였으며, 무대절도사 왕건조는 검주를 버리고 남은 무리를 수습하여 풍도를 지켰다. 허존이 또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유와 부 두 주를 탈취하였고, 성예는 그의 장수인 조무를 검중유후로 삼고, 허존을 만주 자사로 삼았다.

 ㉔. 荊南節度使成汭與其將許存泝江略地,盡取濱江州縣;武泰節度使王建肇棄黔州,收餘衆保豐都。〈豐都,漢巴郡枳縣地,後漢置平都縣,因山以名縣也。梁置臨江郡,隋廢郡爲縣。義寧二年,分臨江置豐都縣。唐屬忠州。《九域志》︰在州西九十里。〉存又引兵西取渝、涪二州,汭以其將趙武爲黔中留後,存爲萬州刺史。

 

 성예는 허존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알고, 사람을 파견하여 그를 엿보도록 하고 말하였다.

 "허존은 주의 업무를 처리하지는 않고 매일 나가서 축국을 하고 있습니다."

 성예가 말하였다.

 "허존이 장차 도망치려고 사전에 발의 힘을 단련하는 것이다."

 군사를 파견하여 그를 습격하자, 허존이 성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그의 병사들이 점점 그에게로 돌아와 모패에 주둔하였다. 조무가 자주 풍도를 공격하니 왕건조는 방어할 수 없어서 허존과 함께 모두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汭知存不得志,使人詗之,曰︰「存不治州事,日出蹴鞠。」汭曰︰「存將逃走,先勻足力也。」〈詗,古迥翻,又翾正翻。治,直之翻。蹴,子六翻。鞠,居六翻。蹴,蹋也;鞠,毬也。顏師古曰︰鞠以皮爲之,實以毛。崔豹曰︰蹴鞠起黃帝,習用兵之勢。勻,于倫翻。〉遣兵襲之,存棄城走;〈成汭不見容於張瓌,而己又不能容許存;忌賢疾能,常人之情也。〉其衆稍稍歸之,屯于茅垻。〈垻,必駕翻。蜀人謂平川爲垻。宋白曰︰渝州江津縣有茅垻驛。〉趙武數攻豐都,王建肇不能守,〈文德元年,王建肇得黔中節,今敗走。數,所角翻。〉與存皆降于王建。

 

 왕건은 허존의 용맹과 지략을 질투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자, 장서기 고촉이 말하였다.

 "공께서는 바야흐로 한창 영웅들을 널리 끌어안아 패업을 꾀하고 있는데, 그가 궁색하여 와서 우리들에게 귀순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를 죽이십니까?"

 왕건은 촉주를 지키도록 하고, 몰래 지촉주 왕종관으로 하여금 그를 관찰하도록 하였다. 왕종관이 비밀리에 '허존은 충성하고 용맹하며 겸손하고 근면하니 훌륭한 장수의 재능이 있습니다.' 라고 하니, 왕건은 마침내 그르 내버려두고, 그의 성명을 바꾸어 왕종파라 불렀는데, 그러나 왕종관은 뜻밖에 왕종파로 하여금 그가 자기를 면하게 해준 것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建忌存勇略,欲殺之,掌書記高燭曰︰「公方總攬英雄以圖霸業,彼窮來歸我,柰何殺之!」建使戍蜀州,陰使知蜀州王宗綰察之。宗綰密言存忠勇謙謹,有良將才,建乃捨之,更其姓名曰王宗播,〈更,工衡翻。〉而宗綰竟不使宗播知其免己也。

 

 왕종파의 처음 수행원인 공목관(문서수발) 유수업이 매번 왕종파에게 신중하고 냉정하라고 권고하여 화를 모면하게 하였다. 그 후에 왕종파는 왕건의 장수가 되었는데 강한 적수를 만나 제장들이 두려워할 때에는 자기 자신이 그들의 선두에 나섰고, 공로를 세우게 되면 번번이 병을 핑계로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니, 이로 인해 공로와 명예를 가지며 끝까지 가질 수 있었다.

 宗播元從孔目官柳修業,每勸宗播愼靜以免禍。〈從,才用翻。〉其後宗播爲建將,遇強敵,諸將所憚者以身先之,〈先,悉薦翻。〉及有功,輒稱病,不自伐,由是得以功名終。

 

 ㉕. 14일 밤에 고전무가 월주를 급하게 공격하고, 15일 아침에 그 외곽에서 이겼는데, 동창은 여전히 아성을 점거하고 그를 막았다. 18일에 전류가 동창의 옛날 장수인 낙단을 파견하여 동창을 기만하여 말하였다.

 "조서를 받들고 왔는데 대왕으로 하여금 치사하여 임안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㉕. 甲午,夜,顧全武急攻越州,乙未旦,克其外郭,董昌猶據牙城拒之。戊戌,鏐遣昌故將駱團紿昌云︰「奉詔,令大王致仕歸臨安。」

 

 동창은 마침내 명령을내리는 패인을 보내고, 빠져나와 청도방에 거처하였다. 19일에 고전무는 무용도감사 오장을 파견하여 배로 동창을 실어서 항주로 가게 하였고, 소강의 남쪽에 이르러 그를 참수하였고, 아울러 그의 가족 300여 명과 재상인 이막과 장괴 이하 10여 명을 나란히 하였다.

 昌乃送牌印,出居清道坊。〈今越州牙城外東街猶有橋曰清道橋。〉己亥,全武遣武勇都監使吳璋以舟載昌如杭州,至小江南,斬之,〈據《新書‧董昌傳》,小江,西江也,蓋錢清江也,源出諸曁縣界,東流過錢清鎭,又東入于海,去越州四十五里,又西至杭州八十里。光啓二年,董昌得越州,至是而亡。監,古銜翻。〉幷其家三百餘人,宰相李邈、蔣瓌以下百餘人。

 

 동창이 성 안에 포위되면서 탐욕과 인색함이 날로 심해져 사람 수에 의거하여 백성들의 돈과 직물을 징수하고, 병사의 양식을 줄였다.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렀는데, 곳간에는 잡화를 넣은 500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고, 창고에는 양식 300만 곡을 가지고 있었다. 전류는 동창의 수급을 경사에 보내고 금백을 장사들에게 상금으로 흩어주고, 창고를 열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진휼하였다.

 昌在圍城中,貪吝日甚,口率民間錢帛,〈計口而率之。〉減戰士糧。及城破,庫有〈【章︰十二行本「有」下有「金帛」二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退齋校同。】〉雜貨五百間,倉有糧三百萬斛。錢鏐傳昌首於京師,散金帛以賞將士,開倉以振貧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