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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사들에 휘둘려 파천한 소종/立秋節中候白露降5日(陰7/9)丙申

solpee 2021. 8. 16. 05:38

《唐紀75 宗 乾寧 2年》〈乙卯, 895年

 

 ㉖. 애초에, 靜難節度使왕행유가 상서령을 요구하였으나 얻지 못하니, 이로 부터 조정을 원망하였다. 경기 안에는 8진의 군대가 있는데 좌우신책군에 예속되어 있었다. 함양진은 화주와 가까워서 진국절도사 한건이 그곳을 요구하였고, 양원진은 빈주에 가까워서 왕행유가 그곳을 요구하였다. 환관이 말하였다.

 "이것은 천자의 금군인데, 어찌 가질 수 있겠는가!"

 ㉖. 初,王行瑜求尚書令不獲,〈見上卷景福二年。〉由是怨朝廷。畿內有八鎭兵,隸左右軍。〈左、右神策軍也。〉郃陽鎭近華州,韓建求之;〈郃陽,漢縣,唐屬同州。《九域志》︰縣在州東一百二十里。郃,音合。近,其靳翻;下同。〉良原鎭近邠州,王行瑜求之。〈良原縣,屬涇州。〉宦官曰︰「此天子禁軍,何可得也!」

 

 왕가와 왕공이 하중을 두고 다투자, 왕행유와 한건 그리고 이무정이 모두 왕공을 위하여 요청하였지만 얻을 수 없게 되어 이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왕공이 사람을 시켜 세 통수에게 말하였다.

 "왕가는 대신하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동과 혼인하였으므로 반드시 여러 공들에게 불리할 것이니, 청컨대 그를 토벌하여 주십시오."

 王珂、王珙爭河中,行瑜、建及李茂貞皆爲珙請,不能得,恥之。珙使人語三帥曰︰〈爲,于僞翻。語,牛倨翻。帥,所類翻。〉「珂不受代而與河東婚姻,必爲諸公不利,請討之。」

 

 왕행유는 그의 동생인 광국절도사 왕행약으로 하여금 하중을 공격하도록 하였고, 왕가는 이극용에게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왕행유는 마침내 이무정· 왕건과 함께 각기 정예병사 수천을 거느리고 조정으로 들어갔는데, 5월 8일에 경사에 도달하니,시장의 백성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

 황상은 안복문에 나아가 그들을 기다렸고, 세 통수들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배열하긴 하였지만 문 아래에서 무릎 꿇어 절을 하며 땅에 엎드리고 舞蹈(무도)의 예절(拜伏은 엎드려 절, 舞는 손으로 추는 춤, 蹈는 발로 추는 춤)을 갖추고 알현하였다.

 行瑜使其弟匡國節度使行約攻河中,〈時以同州爲匡國軍。《九域志》︰同州東至河中七十五里。〉珂求救於李克用。行瑜乃與茂貞、建各將精兵數千入朝,甲子,至京師,坊市民皆竄匿。上御安福門以待之,三帥盛陳甲兵,拜伏舞蹈於門下。

 

 황상이 안복문의 난간으로 나아가 친히 그들을 질책하여 말하였다.

 "경 등은 주청하고 나서 회답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갑자기 군사행동을 취하여 경성에 진입하였으니, 그 뜻이 무엇을 하고자 함이냐? 만약 짐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라면 오늘 현로를 피(물러남)하겠노라!"

 왕행유와 이무정이 땀을 흘리면서 말을 할 수 없었고, 오로지 한건만이 조정에 진입한 이유를 거칠게 진술하였다. 황상이 세 통수에게 연회를 베풀어주니, 세 통수가 주문을 올려 말하였다.

 上臨軒,親詰之曰︰〈宇末曰軒。詰,去吉翻。〉「卿等不奏請俟報,輒稱兵入京城,其志欲何爲乎?若不能事朕,今日請避賢路!」行瑜、茂貞流汗不能言,獨韓建粗述入朝之由。〈粗,坐五翻。〉上與三帥宴,三帥奏稱︰

 

 "남· 북사에서는 서로 붕당을 가지고 조정의 정치를 무너지고 문란하게 합니다. 위소도가 서천을 토벌하였던 것은 잘못된 책략이고, 이계가 재상이 된 것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 부합하지 않으니, 그들을 주살할 것을 요청합니다.

 황상은 아직 허락하지 않았다.

 이날 왕행유 등이 위소도와 이계를 도정역(서안시내)에서 살해하였고, 또 추밀사 강성필과 환관 몇 명을 살해하였다

 「南、北司互有朋黨,墮紊朝政。〈墮,讀曰隳。紊,音問。〉韋昭度討西川失策,〈討西川事見二百五十七卷、二百五十八卷。〉李谿作相,不合衆心,請誅之。」上未之許。是日,行瑜等殺昭度、谿於都亭驛,〈都亭驛在朱雀門外西街,含光門北來第二坊。〉又殺樞密使康尚弼及宦官數人。

 

 또 말하였다.

 "왕가와 왕공은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지 말고, 청컨대 왕공에게 하중을 제수하고 왕행약을 섬주로 옮기며, 왕가를 동주로 이동시키십시오."

 황상은 그것들을 모두 허락하였다.

 애초에, 세 통수가 황상을 폐위시키고 길왕 이보를 옹립하려 하였으나, 이에 와서는 이극용이 이미 하동에서 병사를 일으켯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왕행유와 이무정은 각기 병력 2천명을 남겨놓아 경사를 수비하게 하고, 한건과 함께 모두 작별을 고하고 진으로 돌아갔다. 호부상서 양감을 깎아 내려서 아주 자사로 삼았다. 양감은 양우경의 아들이며, 위소도의 외삼촌이다.

 又言︰「王珂、王珙嫡庶不分,請除王珙河中,徙王行約於陝,王珂於同州。」上皆許之。始,三帥謀廢上,立吉王保;至是,聞李克用已起兵於河東,行瑜、茂貞各留兵二千人宿衞京師,與建皆辭還鎭。貶戶部尚書楊堪爲雅州刺史。堪,虞卿之子,〈楊虞卿見《文宗紀》。〉昭度之舅也。

 

 ㉚. 이극용이 번· 한의 군대를 크게 일으켜 남하하면서, 표문을 올려서 '왕행유· 이무정· 한건이 군사행동을 취하여 궁궐을 침범하고 대신들을 살해하였으니, 청컨대 그들을 토벌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또 격문을 세 진에 보내니 왕행유 등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극용의 군대가 강주(산서 신강)에 도착하자, 자사 왕요가 성문을 닫고 그를 저지하였지만, 이극용이 나아가 공격하여 열흘 남짓에 점령하고,  왕요를 군문에서 참수하였으며, 성 안에서 어기고 막은 사람 1천여 명을 죽였다. 가을, 7월 1일에 이극용이 하중(영제)에 도착하니 왕가가 길에서 영접하며 배알하였다.

 ㉚. 李克用大舉蕃、漢兵南下,上表稱王行瑜、李茂貞、韓建稱兵犯闕,賊害大臣,請討之,〈李克用實黨王珂,聲三帥之罪而表請致討。〉又移檄三鎭,行瑜等大懼。克用軍至絳州,刺史王瑤閉城拒之;克用進攻,旬日,拔之,斬瑤於軍門,殺城中違拒者千餘人。秋,七月,丙辰朔,克用至河中,王珂迎謁於路。

 

 광국절도사 왕행약이 조읍에서 패하였고, 3일에 왕행약은 동주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4일에 경사에 도착하였다. 왕행약의 동생인 왕행실이 당시 좌군지휘사였는데 무리를 인솔하여 왕행약과 함께 서시를 크게 약탈하였다. 왕행실이 주문을 올려서 '동주와 화주가 이미 침탈되었고, 사타가 곧 도착할 것이니, 거가가 빈주로 행차하시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5일에 추밀사 낙전관은 거가를 봉상으로 행차하기를 주청하였다.

 황상이 말하였다.

 "짐은 이극용의 표문을 받았는데 아직 하중에 주둔하고 있다. 설사 사타가 여기에 이른다 하여도, 짐이 스스로 枝梧(할 것이니, 경 등은 단지 각자 본군을 어루만져서 동요하지 말도록 하게 하라."

 匡國節度使王行約敗於朝邑,〈朝,直遙翻。〉戊午,行約棄同州走,己未,至京師。行約弟行實時爲左軍指揮使,〈神策左軍非此。〉帥衆與行約大掠西市。〈朱雀街西,謂之西市。〉行實奏稱同華已沒,沙陀將至,請車駕幸邠州。庚申,樞密使駱全瓘奏請車駕幸鳳翔。上曰︰「朕得克用表,尚駐軍河中。就使沙陀至此,朕自有以枝梧,卿等但各撫本軍,勿令搖動。」

 

 우군지휘사 이계붕은 이무정의 가자인데, 본래의 성명은 염규이고 낙전과과 함께 황상을 겁주어서 봉상으로 행차하도록 꾸몄으며, 중위 유경선은 왕행실과 더불어 이를 알고서 황상을 겁주어 빈주로 행차하도록 하려 하였는데, 공위가 면전에서 유경선을 꺾으며, 가볍게 궁궐을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저녁이 될 무렵 이계붕이 계속해서 주문을 올려서 거가를 출발시킬 것을 요청하니, 이에 왕행약이 좌군을 이끌고 우군을 공격하였는데 북소리와 함성소리가 땅을 진동시켰다.

 右軍指揮使李繼鵬,茂貞假子也,〈程大昌《雍錄》曰︰北軍左、右兩軍,皆在苑內。左三軍在內東苑之東,大明宮苑東也。右三軍在九仙門之西,九仙在內東苑之西北角。左三軍,左神策、左龍武、左羽林軍也。右三軍,右神策、右龍武、右羽林軍也。余按《雍錄》所云左、右六軍,代、德以後宿衞者也。僖宗廣明幸蜀,此六軍潰散,田令孜於成都募新軍五十二都,分屬左、右神策軍;自時厥後,凡所謂左、右軍者,皆此軍也,分營於京城內外,又不專在苑中。若此時王行實、李繼鵬爲左、右軍指揮使,疑是邠、岐二帥所留兵以宿衞者自分爲左、右也。〉本姓名閻珪,與駱全瓘謀劫上幸鳳翔;中尉劉景宣與王行實知之,欲劫上幸邠州;孔緯面折景宣,以爲不可輕離宮闕。〈折,之舌翻。離,力智翻。〉向晚,繼鵬連奏請車駕出幸,於是王行約引左軍攻右軍,鼓譟震地。

 

 황상은 변란의 소식을 듣고 승천루에 올라 유지를 내려 그것을 중지하려고 하였는데, 봉일도두 이균이 본래의 군대를 거느리고 누의 앞에서 시위하였다. 이계붕이 봉상의 군대를 가지고 이균을 공격하였는데, 화살이 황상의 옷을 스쳐 지나 누각의 서까래에 박히자, 좌우에서 황상을 부축하여 누각에서 내려왔으며, 이계붕이 다시 불을 놓아 궁문을 불사르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가렸다. 

 上聞亂,登承天樓,欲諭止之,捧日都頭李筠將本軍,於樓前侍衞。李繼鵬以鳳翔兵攻筠,〈王行約以李繼鵬欲先劫車駕幸岐,故攻右軍。李繼鵬當與行約戰,而乃攻李筠者,以筠衞上,不得而劫幸也。〉矢拂御衣,著于樓桷,〈著,直略翻。桷,榱也。椽方曰桷。〉左右扶上下樓;繼鵬復縱火焚宮門,煙炎蔽天。

 

 당시에 염주 육도의 군사가 경사에 주둔하고 있었고, 평소 양군은 그들을 두려워하였으니, 황상은 긴급히 불러서 궁내로 들어와 호위하도록 하였고, 이미 그렇게 하자, 양군은 물러나 도주하여 각기 빈주와 봉상으로 돌아갔다. 성 안은 대단히 혼란하여 서로 약탈하고 강탈하니 황상은 여러 친왕들과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이균의 군영으로 행차하였고, 호필도두 이거실이 무리를 인솔하여 이어서 도착하였다.

 時有鹽州六都兵屯京師,〈炎,讀與燄同。鹽州六都兵,孫德昭等所領兵也。〉素爲兩軍所憚,上急召令入衞;旣至,兩軍退走,各歸邠州及鳳翔。城中大亂,互相剽掠,〈剽,匹妙翻。〉上與諸王及親近幸李筠營,護蹕都頭李居實帥衆繼至。〈護蹕都亦神策五十四都之一,或曰卽扈蹕都。帥,讀曰率。〉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왕행유와 이무정이 스스로 와서 거가를 영접하려 한다고 하자, 황상은 협박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6일에 이균과 이거실 두 도의 군대로 스스로 호위하면서, 계하문을 나와 남산으로 향하다가사성진에서 묵었다. 사민들 가운데 거가를 따르는 사람들이 수십만 명이었는데 산곡의 입구에 도달하였을 즈음에는 더위를 먹어 죽은 사람(喝死者)이 셋에 하나였으며, 밤에는 다시 도적들에게 약탈당하여 울음소리가 산골짜기를 흔들었다. 당시에 백관들 대부분이 호종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엿는데, 호부상서· 판탁지 그리고 염철전운사인 설왕 이지유 만이 유일하게 먼저 도착하였으며, 황상은 명령하여 권지중서사· 치돈사로 임명하였다.

 或傳王行瑜、李茂貞欲自來迎車駕,上懼爲所迫,辛酉,以筠、居實兩都兵自衞,出啓夏門,〈啓夏門,長安城南面東來第一門。〉趣南山,宿莎城鎭。〈莎城鎭在長安城南,近郊之地也。趣,七喻翻。〉士民追從車駕者數十萬人,比至谷口,暍死者三之一,〈谷口,南山谷口也。暍,於歇翻。暍死者,中熱而死。比,必寐翻。〉夜,復爲盜所掠,哭聲震山谷。時百官多扈從不及,〈從,才用翻。〉戶部尚書、判度支及鹽鐵轉運使薛王知柔獨先至,〈知柔,薛王業之曾孫。〉上命權知中書事及置頓使。

 

 7일에 이극용이 동주로 들어갔다. 최소위· 서언약· 왕부가 사성에 도착하였다.

 9일에 황상은 석문진으로 이동하여 행차하고, 설왕 이지유와 지추밀원 유광유에게 명하여 경성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조서를 내려 황궁 수비 부대를 설치하게 하였다.

 11일에 이극용이 절도판관 왕괴를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기거(起居: 일상생활 즉 문안)를 물었다.

 12일에 황상은 내시 치정욱을 파견하여 조서를 싸 가지고 이극용의 군대에 도착하여, 왕가와 더불어 각각 1만의 기병을 출동하여 같이 신평으로 가도록 하였다. 또 조서를 내려서 장의절도사 장번이 경원의 군대를 가지고 봉상을 봉쇄하도록 하였다.

 壬戌,李克用入同州,崔昭緯、徐彥若、王摶至莎城。甲子,上徙幸石門鎭,〈路振《九國志》︰昭宗出啓夏門,駐華嚴寺,晡晚,出幸南山之莎城,駐于石門山之佛寺。與此稍異。〉命薛王知柔與知樞密院劉光裕還京城,制置守衞宮禁。丙寅,李克用遣節度判官王瓌奉表問起居。丁卯,上遣內侍郗廷昱〈《新書‧百官志》︰內侍在內侍監之下,內常侍之上,員四人,從四品上。郗,丑之翻。〉齎詔詣李克用軍,令與王珂各發萬騎同赴新平。〈赴新平以討王行瑜。邠州新平郡。〉又詔彰義節度使張鐇以涇原兵控扼鳳翔。

 

 이극용은 군대를 파견하여 화주를 공격하였는데 한건이 성에 올라 소리쳐 말하였다.

 "저는 일찍이 이공에게 아직 실례한 일이 없었는데, 어찌하여 공격을 하는 것이오?"

 이극용이 그에게 말하였다.

 "공은 신하가 되어 천자를 압박하여 쫓아냈는데 공 스스로 예의가 있다고 하면서 누가 예의가 없는 사람이요!"

 마침 치정욱이 도착하여 '이무정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주질에 도착하였고, 왕행유는 병력을 거느리고 흥평에 도착하여, 모두가 거가를 영접하려고 하고 있다.'고 하자, 이극용은 마침내 화주의 포위를 풀고 군대를 이동하여 위교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李克用遣兵攻華州;韓建登城呼曰︰〈呼,火故翻。〉「僕於李公未嘗失禮,何爲見攻?」克用使謂之曰︰「公爲人臣,逼逐天子,公爲有禮,孰爲無禮者乎!」會郗廷昱至,言李茂貞將兵三萬至盩厔,王行瑜將兵至興平,皆欲迎車駕,克用乃釋華州之圍,移兵營渭橋。〈《考異》曰︰《唐太祖紀年錄》︰「王師攻華州,俄而郗廷昱至,且言茂貞領兵三萬至興平,欲往石門迎駕,乃解華圍,進營渭橋。」按《實錄》,八月延王戒丕至河中,克用已發前鋒至渭北。己丑克用進營渭橋。又《紀年錄》載詔曰︰「省表,已部領大軍,前月二十七日離河中。」蓋克用不親圍華州,但遣別將將兵往,及聞邠、岐謀迎駕,乃遣華兵詣渭橋,卽所謂前鋒者也。克用旣以七月二十七日離河中,則戒丕至彼必在其前,《實錄》云八月至河中,誤也。今從《紀年錄》。〉

 

 설왕 이지유를 청해절도사· 동평장사로 삼고, 이어서 권지경조윤· 판탁지로 삼아 염철전운사에 충임하고, 올바로 돌아올 날을 기다렸다가 진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황상이 남산에 열흘 남짓 머무르니, 사민들 가운데 거가를 따라 난을 피한 사람들이 날마다 서로 놀라면서 말하였다.

 "빈과 기의 군대가 도착하였다."

 황상은 연왕 이계비를 파견하여 하중에 가서 이극용에게 재촉하여 군대를 전진하도록 하였다.

 27일에 이극용이 하중을 출발하였다. 황상은 공봉관 장승업을 파견하여 이극용의 군대에 가게 하였다. 장승업은 동주 사람으로 누차 이극용에게 사자로 갔었으며, 이어서 머물면서 그의 군대를 감독하였다.

 以薛王知柔爲清海節度使、〈是年,賜嶺南節度使軍額曰清海。〉同平章事,仍權知京兆尹、判度支,充鹽鐵轉運使,俟反正日赴鎭。

上在南山旬餘,士民從車駕避亂者日相驚曰︰「邠、岐兵至矣!」上遣延王戒丕詣河中,趣李克用令進兵。〈延王邠,玄宗子,戒丕其後也。趣,讀曰促。〉壬午,克用發河中。上遣供奉官張承業詣克用軍。〈張承業,內供奉官也。〉承業,同州人,屢奉使於克用,因留監其軍。〈爲張承業盡心於李克用父子張本。〉

 

 8월 5일에 이극용이 나아가서 위교에 진을 치고 그의 장수인 이존정을 선봉으로 삼았으며, 7일에 영수를 점령하고 또 사엄을 파견하여 3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석문에 가서 시위하게 하였다.

 9일에 이존신과 이존심을 파견해서 보대절도사 이사효와 모여서 왕행유의 여원채를 공격하게 하여 그 장수인 왕령도 등을 사로잡아 행재소에 바쳤다.

 己丑,克用進軍渭橋,遣其將李存貞爲前鋒;辛卯,拔永壽,又遣史儼將三千騎詣石門侍衞。癸巳,遣李存信、李存審會保大節度使李思孝攻王行瑜棃園寨,〈棃園寨在京兆雲陽縣。《九域志》︰雲陽在華州西北九十里。《考異》曰︰《莊宗列傳》曰︰「三鎭亂長安,李存信從太祖入關,以前軍先自夏陽渡河,攻同華屬邑,下之。時太祖在渭北,伶官羣小或勸太祖入朝自握兵柄。太祖亦以全忠圖己,朝廷不能斷,心微有望,月餘不進軍。存信與蓋寓乘間密啓曰︰『大王家世效忠,此行討逆,上爲邠、鳳不臣,但令臣節爲天下所知,卽三賊不足平也。而悠悠之徒,不達大體,或以弗詢之畫苟悅台情,雖俳優之言,不宜縱其如此。京師咫尺,天聽非遙,實無益於英德也。今三凶正蹙,須速圖之,事留變生,無宜猶豫。』太祖曰︰『公言是也。』卽日出師,下棃園砦。」按克用謀大事,固非伶官所豫。又《實錄》,己丑克用進營渭橋,癸巳克棃園,中間四日耳,無月餘不進事。且旣云羣小勸入朝,卽當詣行在,不當留渭北。此特李存信之人欲歸功於存信耳。今不取。〉擒其將王令陶等,獻於行在。

 

 이사효는 본래 성이 탁발이고, 이사공의 동생이다. 이무정은 두려워서 이계봉을 참수하고, 수급을 행재소에 전하고, 표문을 올려 죄를 내려달라고 청하며 또 사신을 파견하여 이극용과 화해를 요구하였다. 황상은 다시 연왕 이계비와 단왕 이윤을 파견하여 이극용에게 유시하고 또 이무정을 사면하도록 하고, 힘을 합쳐 왕행유를 토벌하게 하였으며, 그가 다 죽어 평정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경과 함께 그 일을 논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두 왕에게 명령을 하여 이극용에게 절하여 형으로 삼게하였다.

 思孝本姓拓跋,思恭之弟也。李茂貞懼,斬李繼鵬,傳首行在,〈李茂貞委劫乘輿之罪於繼鵬。〉上表請罪,且遣使求和於克用。上復遣延王戒丕、丹王允諭克用,〈丹王逾,代宗子,允其後也。復,扶又翻。〉令「且赦茂貞,倂力討行瑜,俟其殄平,當更與卿議之」,且命二王拜克用爲兄。

 

 ㉜. 14일에 왕행유의 관작을 지우고 빼앗았다. 19일에 이극용을 빈녕사면행영도초토사로 삼고, 보대절도사 이사효를 북면초토사로 삼고, 정난절도사 이사간을 동면초토사로 삼고, 창의절도사 장빈을 서면초토사로 삼았다.

 이극용이 그의 아들인 이존욱을 파견하여 행재소로 보냈는데, 열한 살이었으며, 황상은 그의 \모습을 기이하게 여겨 그를 어루만지면서 말하였다.

 "아이응 바야흐로 국가의 동량이 될 것이니 다른 날에 의당 우리집안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㉜. 戊戌,削奪王行瑜官爵。癸卯,以李克用爲邠寧四面行營都招討使,保大節度使李思孝爲北面招討使,定難節度使李思諫爲東面招討使,〈難,乃旦翻。〉彰義節度使張鐇爲西面招討使。〈命李克用自南臨討之。〉克用遣其子存勗詣行在,〈李存勗始此。《考異》曰︰《實錄》作「存貞」。據《後唐實錄》、薛居正《五代史》,莊宗未嘗名存貞。《實錄》蓋誤。〉年十一,上奇其狀貌,撫之曰︰「兒方爲國之棟梁,他日宜盡忠於吾家。」

 

 이극용이 표문을 올려서 황상에게 경사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자, 황상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극용으로 하여금 기병 3천을 파견하여 삼교에 주둔하면서 방비와 방어를 하게 하였다. 27일에 거가가 경사로 돌아왔다.

 28일에 사공· 겸문하시랑· 동평장사인 최소위를 파직시켜서 우복야로 삼았다.

 克用表請上還京;上許之。令克用遣騎三千駐三橋爲備禦。辛亥,車駕還京師。

壬子,司空兼門下侍郎、同平章事崔昭緯罷爲右僕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