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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勝節度使 董昌 稱帝 /立秋節中候白露降4日(陰7/8)丙申

solpee 2021. 8. 15. 06:00

《唐紀75 乾寧 元年》〈甲寅,894年

 

 ㉟. 의승(절강 소흥)절도사 동창은 가혹하고 잔학하였는데, 일상적인 부세 외에도 더 징수하는 것이 몇 배여서, 공물로 헌납하는 것과 안팎에 선물로 보내는데 충당하였으며, 매 열흘마다 하나의 鋼(강:대규모 화물 운수 조직)을 출발시켰는데, 황금 1만 냥과 백은 5천 鋌(정: 은 중량 단위 1괴 50량) 그리고 월의 비단 1만5천 필이엇고, 기타 물품 또한 이와 같았으며, 졸별 500명을 사용하엿고, 혹 비나 눈, 바람이나 홍수 등을 만나서 일정을 지체하면 전부 죽였다. 공헌이 천하 제일이었고, 이로 말미암아서 조정은 충성한다고 여겨 총애하는 명령이 이어지게 되었으니, 관직은 사도· 동평장사에 다다랐고, 작위는 농서군왕이었다.

 ㉟. 義勝節度使董昌〈【章︰十二行本「昌」下有「爲政」二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苛虐,〈詳考下卷,浙東乃威勝節度。又按《新書‧方鎭表》,廣明三年,升浙東道觀察爲義勝軍節度,光啓三年,改威勝軍。威勝爲是。〉於常賦之外,加斂數倍,以充貢獻及中外饋遺,〈斂,力贍翻。遺,唯季翻。〉每旬發一綱,金萬兩,銀五千鋌,越綾萬五千匹,他物稱是,〈稱,尺證翻,適相等也。〉用卒五百人,或遇雨雪風水違程,則皆死。〈唐制,陸行之程,馬日七十里,步及驢五十里,車三十里。水行之程,舟之重者泝河日三十里,江四十里,餘水四十五里。空舟泝河四十里,江五十里,餘水六十里、沿流之舟則輕重同制,河日一百五十里,江一百里,餘水七十里。轉運徵斂送納,皆準程節其遲速。其三峽、砥柱之類,不拘此限。若遇風水淺不得行者,卽於隨近官司申牒驗記,聽折半;功不及是,則爲違程。董昌蓋計日限程以至長安,又不許以雨雪風水準折也。〉貢奉爲天下最,由是朝廷以爲忠,寵命相繼,官至司徒、同平章事,爵隴西郡王。

 

 동창이 월주(소흥)에 生祠(산자의 사당)를 건립하였는데 규모와 양식이 禹廟와 모두 같았고, 백성 중에 禱賽(도새: 먼저 기도하고 후에 사당에 회보)하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우묘에 갈 수 없도록 하였고, 모두 생사로 가도록 하였다. 동창은 월왕을 시켜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조정이 아직은 이를 허락하지 않자. 동창은 불쾌해서 말하였다.

 "조정이 나ㅣ를 저버리려 하지만 내가 수년 동안 공헌한 것이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인데 월왕의 자리를 아끼다니!"

 昌建生祠於越州,制度悉如禹廟,〈禹廟在越州會稽縣東南七里。〉命民間禱賽者,〈賽,先代翻。先祈福於神,其後報祠謂之賽。〉無得之禹廟,皆之生祠。昌求爲越王,朝廷未之許,昌不悅曰︰「朝廷欲負我矣,我累年貢獻無算而惜〈【章︰十二行本「惜」下有「一」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越王邪!」

 

 그에게 아첨하는 어느 사람이 말하였다.

 "대왕께서 월왕이 되는 것이 어찌 월제가 되는 것과 같겠습니까!"

 이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시대와 세상이 변하게 될 것이라는 헛소문이 전해지고, 다투어 문 앞에 빽빽이 가득차서 떠들썩하면서, 동창에게 황제에 등극할 것을 청하였다.

 동창이 크게 기뻐하였고 사람을 파견하여서 그들에게 감사하면서 말하였다.

 "하늘이 주신 시기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니, 시기가 되기만 하면 내가 스스로 그것을 할 것이다."

 有諂之者曰︰「王爲越王,曷若爲越帝。」於是民間訛言時世將變,競相帥塡門喧譟,請昌爲帝。〈帥,讀曰率。〉昌大喜,遣人謝之曰︰「天時未至,時至我自爲之。」

 

 그의 요좌인 오요와 도우후인 이창지 등은 모두 그것을 이룩하도록 권유하고 이민 가운데 민요나 참언, 부서를 바치는 사람은 일일이 셀 수 없었는데, 그는 애초에, 그들에게 수백 민의 금전을 상으로 주었으며, 이미 그렇게 되자 바치는 사람들이 매일 많아졌고 조금씩 감소되었다 하여도 500~300이었다. 동창이 말하였다.

 "참언에서는 '토끼가 금으로 된 침상에 오르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해는 토끼의 해이고 내년 또한 토끼의 해이며 2월의 卯日과 卯時가 내가 황제를 칭할 시기이다."

 其僚佐吳瑤、都虞候李暢之等皆勸成之,吏民獻謠讖符瑞者不可勝紀,〈勝,音升。〉其始賞之以錢數百緡,旣而獻者日多,稍減至五百、三百而已。昌曰︰「讖云『兔子上金牀』,此謂我也。我生太歲在卯,明年復在卯,〈復,扶又翻。〉二月卯日卯時,吾稱帝之秋也。」〈爲董昌僭號,錢鏐舉兵討之張本。

 

《唐紀75  乾寧 2年》〈乙卯, 895年

 

 ⑥. 동창이 장차 칭제하려고 장좌들을 소집하여 그것을 논의하였다. 절도부사 황갈이 말하였다.

 "지금의 당실은 비록 쇠미하였지만 천도와 인심은 아직 싫어하지 않습니다. 제 환공과 진 문공은 모두 주실을 보좌하고 추대하며 폐업을 이루었습니다. 대왕께서는 밭도랑과 밭이랑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서 조정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지위가 장상에 이르고 부귀가 극에 달하였는데, 어찌하여 하루 사이에 홀연히 가족이 멸할 게책을 세우려 하십니까? 저 황갈은 차라리 죽어서 충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반역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⑥. 董昌將稱帝,集將佐議之。節度副使黃碣曰︰〈碣,其謁翻。〉「今唐室雖微,天人未厭。齊桓、晉文皆翼戴周室以成霸業。大王興於畎畝,〈昌爵隴西郡王,故稱之。畎,古泫翻。〉受朝廷厚恩,位至將相,富貴極矣,柰何一旦忽爲族滅之計乎!碣寧死爲忠臣,不生爲叛逆!」

 

 동창은 노하고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생각하여 그를 참수하고 그의 머리를 측간에 버리면서 그를 욕하며 말하였다.

 "노예 같은 도적놈이 나를 저버리는구나! 훌륭한 성인이 다스리는 밝은 시대의 삼공 자리를 기다릴 줄 모르고 도리어 먼저 죽기를 요구하였구나!"

 아울러 그의 가족 80명을 죽여서 같은 구덩이에 그들을 묻었다. 또 회계 현령 오료에게 묻자, 대답하였다.

 "대왕께서는 진정한 제후가 되어 자손들에게 전해주지 않고, 오히려 가짜의 천자가 되어 멸망하는 길을 가려 합니까!"

 동창이 역시 그를 족주하였다.

 昌怒,以爲惑衆,斬之,投其首於廁中,罵之曰︰「奴賊負我!好聖明時三公不能待,而先求死也!」幷殺其家八十口,同坎瘞之。〈瘞,於計翻。〉又問會稽令吳鐐,〈會,古外翻。鐐,力彫翻,又力弔翻。〉對曰︰「大王不爲眞諸侯以傳子孫,乃欲假天子以取滅亡邪!」〈「乃欲」之下有「爲」字,文意方足。〉昌亦族誅之。

 

 또 산음 현령 장손에게 물었다.

 "네가 정치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깊이 알고 있으니, 내가 황제가 되기를 기다리면 너를 지어사대로 명할 것이다."

 장손이 말하였다.

 "대왕께서 석경전에서 일어나 절동에 절도사를 세우고 영화와 부귀를 누린 지가 근 20년인데 무엇이 안타까워 이기와 유벽이 한 짓(헌종 때 조정을 배반 족멸됨)을 본받으려 하십니까! 절동은 벽지이고 연해이어서, 순속 가운데는 비록 6주가 있지만, 만약 대왕께서 칭제하신다면 그들을 반드시 좇지 않을 것이어서 단지 텅 빈 성을 지키게 될 것이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동창이 또 그를 죽이고,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 세 사람이 없어졌으니, 다른 사람 가운데 나를 거스르는 자는 없다!"

 又謂山陰令張遜曰︰「汝有能政,吾深知之,俟吾爲帝,命汝知御史臺。」遜曰︰「大王起石鏡鎭,〈見二百五十三卷僖宗乾符五年。〉建節浙東,榮貴近二十年,〈近,其靳翻。〉何苦效李錡、劉闢之所爲乎!〈李錡、劉闢以反誅,事皆見《憲宗紀》。〉浙東僻處海隅,〈處,昌呂翻。〉巡屬雖有六州,大王若稱帝,彼必不從,〈台、明、溫、處、婺、衢,浙東巡屬也;時豪傑並起,各自爲刺史,昌羈縻而已。〉徒守空〈【章︰十二行本「空」作「孤」;乙十一行本同;張校同,云無註本作「空」。】〉城,爲天下笑耳!」昌又殺之,謂人曰︰「無此三人者,則人莫我違矣!」

 

 2월 3일에 동창이 곤룡포와 면류관을 착용하고 내성의 성문누각에 올라가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상서로운 물품들을 정원에 모두 진열하여 사람들에게 보게하였다.

 二月,辛卯,昌被袞冕登子城門樓,卽皇帝位。〈被,皮義翻。《考異》曰︰《吳越備史》云,「癸卯,昌僭號」。按《會稽錄》,「昌自云應兔子之讖,欲以二月二日僭號,取卯月卯日也」,而《實錄》、《長曆》皆云「二月己丑朔」,非當時曆誤,卽今日曆誤。要之昌必以二月辛卯日僭號。〉悉陳瑞物於庭以示衆。

 

 이보다 먼저 함통 말년에 오와 월 사이에 소문이 전해지니, "산속에 큰 새가 있었는데, 눈이 네 개이고 다리는 세 개인데, '나평천책'이라 지껄였다." 라 하는데, 본 사람들은 재앙이 있다 하여 백성들 사이에서는 모양을 그려서 그 새에게 제사 지냈으며, 동창이 참칭하게 되자, 말하였다.

 "이 새는 나의 봉황이다."

 先是,咸通末,〈先,悉薦翻。〉吳、越間訛言山中有大鳥,四目三足,聲云「羅平天册」,見者有殃,民間多畫像以祀之,及昌僭號,曰︰「此吾鸑鷟也。」〈鸑,五角翻。鷟,士角翻。鸑鷟,鳳屬。〉

 

 마침내 대월 나평국이라 자칭하고, 연호를 순천으로 고치고, 성루를 '천책지루'라 하였고, 부하들에게 자기를 '성인'이라 부르게 명령하였다. 전 항주 자사인 이막· 전 무주 자사인 장괴· 양절 염철부사 두영· 전 둔전랑중인 이유를 재상으로 삼았다. 또 오요 등을 모두 한림학사로 삼고, 이창지 등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乃自稱大越羅平國,改元順天,〈《考異》曰︰《吳越備史》曰,「癸卯,昌僭稱皇帝,建元順天,國號羅平。」年號或云天册,或云大聖,皆非也。羅隱撰《吳越行營露布》曰︰「羅平者,啓國之名;順天者,建元之始。」又曰︰「將軍門稱天册之樓,以會府爲宣室之地。明告我其所稱,曰『權卽羅平國位』。昌狀印文曰『順天治國之印』。」《十國紀年》亦云「年號順天」。《會稽錄》云天册,蓋誤。今從《備史》。〉署城樓曰天册之樓,令羣下謂己曰「聖人」。以前杭州刺史李邈、前婺州刺史蔣瓌、兩浙鹽鐵副使杜郢、前屯田郎中李瑜爲相。又以吳瑤等皆爲翰林學士,李暢之等皆爲大將軍。

 

 동창은 전류에게 서신을 파견하여 권도를 가지고 나평국의 황제의 직위에 즉위하였음을 알리고 전류를 양절도지휘사로 삼았다. 전류가 동창에게 서신을 보내어 말하였다.

 "문을 닫고 천자가 되어 구족과 백성을 모두 도탄에 빠지게 하는 것이 어찌 문을 열고 절도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부귀를 누리는 것과 같겠소? 지금에 와서 잘못을 뉘우친다면 오히려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오."

 동창이 듣지 않으니, 전류는 마침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월주의 성 아래에 도착하여 영은문에 이르러 동창을 보자 두 번 절을 하고 말하였다.

 昌移書錢鏐,告以權卽羅平國位,以鏐爲兩浙都指揮使。鏐遺昌書曰︰〈遺,唯季翻。〉「與其閉門作天子,與九族、百姓俱陷塗炭,豈若開門作節度使,終身富貴邪!及今悛悔,〈悛,且緣翻,改也。〉尚可及也!」昌不聽,鏐乃將兵三萬詣越州城下,至迎恩門〈迎恩門,越州城西門。〉見昌,再拜言曰︰

 

 "대왕의 직위는 장상을 겸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편안함을 버리고 위태로운 곳으로 갑니까? 저 전류는 군사를 거느리고 여기에 와서 대왕께서 잘못을 고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설사 대왕께서는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을의 사민들이야 무슨 죄로 대왕을 따라서 족멸되어야 합니까?"

 동창은 두려워져서, 호군하는 돈 2백만을 보내고 처음에 모의한 오요와 무격(巫覡: 巫는 남자 무당, 覡은 여무당) 몇 사람을 잡아 전류에게 보냈으며, 또 천자에게 대죄하기를 청하였다. 전류는 병력을 이끌고 돌아가서 상황을 보고하였다.

 「大王位兼將相,柰何捨安就危!鏐將兵此來,以俟大王改過耳。〈【章︰十二行本「耳」下有「若天子命將出師」七字;乙十一行本同;退齋校同;張校同,云無註本亦無。】〉縱大王不自惜,鄕里士民何罪,隨大王族滅乎!」昌懼,致犒軍錢二百萬,執首謀者吳瑤及巫覡數人送於鏐,〈犒,苦到翻。覡,刑秋翻。〉且請待罪天子。鏐引兵還,以狀聞。〈聞於朝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