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李茂貞鳳翔節度使의 정치2/立秋節中候白露降3日(陰7/7)甲午

solpee 2021. 8. 13. 16:20

《唐紀75 景福 2年》〈癸丑,893年

 

 ㉙. 9월, 10일에 담왕 이사주가 금군 3만을 거느리고 봉상 절도사 서언약을 호송하여 진으로 향하여 가서 흥평에 진을 쳤다. 이무정과 왕행유가 군사를 합치니 근 6만이었으며, 주질에 진을 치고 그들을 막았다. 금군은 모두 새로 모집한 시장 거리에 있던 소년들이었으나, 이무정과 왕행유가 거느리는 사람들은 모두 변방의 사병으로 100여 번 전투 경험이 있는데, 17일에 이무정 등은 흥평으로 나아가서 압박하였고, 금군은 모두 소문만 듣고 도망하여 무너졌으며, 이무정 등은 승세를 타고 나아가 삼교를 공격하게 되자, 경성에서는 크게 진동하였으며, 사민들은 달아나 흩어졌고, 시장의 사람들은 다시 대궐 앞을 점거하고, 애초에 군사를 사용하자고 제의한 사람을 주살할 것을 요청하였다.

 ㉙. 乙亥,覃王嗣周帥禁軍三萬送鳳翔節度使徐彥若赴鎭,軍于興平。〈帥,讀曰率。《考異》曰︰《舊紀》︰「覃王率扈駕五十四軍進攻岐陽。」今從《實錄》。〉李茂貞、王行瑜合兵近六萬,軍于盩厔以拒之。〈近,其靳翻。〉禁軍皆新募市井少年,茂貞、行瑜所將皆邊兵百戰之餘,壬午,茂貞等進逼興平,禁軍皆望風逃潰,茂貞等乘勝進攻三橋,京城大震,士民奔散,市人復守闕請誅首議用兵者。〈復,扶又翻。〉

 

 최소위가 마음 속으로 태위· 문하시랑· 동평장사인 두양능을 해치려고 비밀리에 이무정에게 서신을 보내어서 말하였다.

 "군대를 사용하는 것은 황상의 의도가 아니며 모두 두 태위에게서 나왔을 뿐입니다."

 19일에 이무정이 임고역에 진을 치고, 두양능의 죄행을 표문으로 올리고 그를 주살할 것을 요청하였다. 두양능이 황상에게 말하였다.

 "신은 본래 이를 먼저 말하였었으니, 청컨대 신을 가지고 해결하십시오."

 황상은 흐르는 눈물을 금하지 못하면서 말하였다.

 "경과 결별해야 하는구나!"

 崔昭緯心害太尉、門下侍郎、同平章事杜讓能,密遺茂貞書曰︰「用兵非主上意,皆出於杜太尉耳。」〈遺,于季翻。〉甲申,茂貞陳於臨皋驛,〈臨皋驛在長安城西。〉表讓能罪,請誅之。讓能言於上曰︰「臣固先言之矣,請以臣爲解。」〈言歸罪於讓能以解兵也。〉上涕下不自禁,〈禁,居吟翻。〉曰︰「與卿訣矣!」

 

 이날 두양능을 깎아내려서 오주 자사로 삼았는데, 제서에 나타난 말의 대략이다.

 "경사들의 좋은 의견들을 버리고 돌보지 않아서 번진들과 깊은 틈새를 조성하였고, 자문을 구하였을 때에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 더욱 견고하였도다!"

 또 관군용사 서문군수를 담주로 유배보내고, 내추밀사 이주동은 애주로 보내고, 단후는 환주로 보냈다.

 20일에 황상은 친히 안복문에 행차하여 서문군수· 이주동· 단후를 참수하고, 두양능을 다시 깎아서 뇌주사호로 하였다.

 是日,貶讓能梧州刺史,〈梧州去京師五千五百里。宋白曰︰漢武帝置蒼梧郡,理廣信縣;隋置蒼梧郡,理蒼梧縣;唐爲梧州。〉制辭略曰︰「棄卿士之臧謀,構藩垣之深釁,咨詢之際,證執彌堅。」又流觀軍容使西門君遂于儋州,內樞密使李周潼于崖州,段詡于驩州。乙酉,上御安福門,斬君遂、周潼、詡,再貶讓能雷州司戶。

 

 사절을 파견하여 이무정에게 말하였다.

 "짐을 현혹시켜 군사를 일으키게 한 자는 세 사람이며, 두양능의 죄는 아니다."

 내시인 낙관전과 유경선을 좌우군의 중위로 임명하였다.

 遣使謂茂貞曰︰「惑朕舉兵者,三人也,非讓能之罪。」以內侍駱全瓘、劉景宣爲左右軍中尉。

 

 27일에 동도유수 위소도를 사도· 문하시랑· 동평장사로 삼고, 어사중승 최윤을 호부시랑· 동평장사로 삼았다. 최윤은 최신유의 아들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도량이 넓고 컸지만 마음속은 간교하고 음흉하여 최소위와 서로 갚이 관계를 맺어서 재상이 되었다. 숙부인 최안잠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와 형님께서 몹시 애를 써서 가문을 만들어 놓았는데, 결국에는 치랑의 손에 의하여 망치게 될 것이다."

 치랑은 최윤의 어릴 때의 자이다.

 壬辰,以東都留守韋昭度爲司徒、門下侍郎、同平章事,御史中丞崔胤爲戶部侍郎、同平章事。胤,愼由之子也,〈崔愼由歷事文、武、宣,大中間爲相。〉外寬弘而內巧險,與崔昭緯深相結,故得爲相。季父安潛謂所親曰︰「吾父兄刻苦以立門戶終爲緇郎所壞!」〈壞,音怪。《考異》曰︰《舊傳》,胤初拜平章事,安潛有此言。按安潛去年卒,必先時嘗有此言也。〉緇郎,胤小字也。

 

 이무정이 군대를 챙기고 풀지 않으면서, 두양능을 주살한 연후에만 진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최소위 역시 이를 좇아서 그를 배척하였다.

 겨울, 10월에 두양능과 그의 동생 호부시랑 두홍휘에게 자진을 하사하였다.

 다시 조서를 내려서 포고하여 말하였다.

 "두양능은 굽어진 사람들을 천거하였고 정직한 사람들을 등용시키지 않았으며, 좋아함과 증오함의 표준이 한순간에 연결되어 뇌물을 받고 옥사를 처리하고 관직을 팔아서 긁어모은 것이 거만을 넘었다.'"

 李茂貞勒兵不解,請誅杜讓能然後還鎭,崔昭緯復從而擠之。〈復,扶又翻;下同。擠,牋西翻,又子細翻。〉冬,十月,賜讓能及其弟戶部侍郎弘徽自盡。〈《考異》曰︰《續寶運錄》曰︰「大順二年,相國杜讓能、孔緯值上京頻嬰離亂,朝綱紊墜,是時徇意諸道,扈駕兵五十四都,坊坊皆滿,兼近藩連帥,要行征討,便自統軍。至如岐陽李茂貞,先朝封爲太子,本姓宋,洋州牧,先祖討昭義劉從諫有功,子孫爵賞不絕。洎壽王登位後,遣禮部侍郎薛廷珪持璽書具禮,册爲岐王。茂貞先中和年中,投判軍容使田令孜作養男,姓田名彥賓,蓋趨其勢也。汴州朱溫先朝册東平王,至今上,又遣薛廷珪爲禮儀使,延王爲册命使,封爲梁王。且岐王與北司,人情方洽,宰相甚不和睦,累表章云︰『臣今駐旆咸陽,未敢入中書問罪,杜讓能等請置極法。』表奏,上不悅,遂詔孔、杜二相國令往咸陽謝過;及二相到咸陽見岐王,戰不能言。岐王大怒,卻令歸中書省過。纔到中書,上又發遣,令祈謝岐王。如是往來三度。岐王又奏曰︰『二相見臣,並不措一言。如此曠官,有辱聖代,請行朝典,別選英賢。』上不樂,敕罷知政事,不得已除孔緯荊南節度,杜讓能河中節度;三日後,貶于嶺表;出國門三十里,並賜自盡。時岐王率驍果五千人住咸陽,及貶二相,乃退。」此皆誤謬之說。今從《實錄》。〉復下詔布告中外,稱「讓能舉枉錯直,〈用《論語》孔子之言,謂枉者舉之,直者錯而不用也。衰亂之朝,安有公是非邪!錯,千故翻。〉愛憎繫於一時;鬻獄賣官,聚斂踰於巨萬。」〈斂,力贍翻。〉

 

 이로부터 조정의 일거일동은 모두 빈· 기에 품신하였고, 남사· 북사에서는 항상 두 진에 의탁하여 은택을 얻었다. 최선과 왕초라는 자가 있었는데 두 진의 판관으로 무릇 천자가 가부를 정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번번이 최선과 왕초에게 하소연하였고, 이 두 사람은 바로 이무정과 왕행유를 교사하여 장주를 올려서 그것을 논의하도록 하니, 조정이 조금이라도 그것에 어그러진 것이 있게 되면, 그들의 언사가 이미 불손하게 되었다.

 自是朝廷動息皆稟於邠、岐,南、北司往往依附二鎭以邀恩澤。有崔鋋、王超者,〈鋋,音蟬。〉爲二鎭判官,凡天子有所可否,其不逞者,輒訴於鋋、超,二人則敎茂貞、行瑜上章論之,朝廷少有依違,其辭語已不遜。

 

 제서를 내려서 이무정을 다시 봉상절도사 겸 산남서도절도사· 수중서령으로 삼았으며, 이에 이무정은 봉상· 흥원· 양· 농진 등 15주의 땅을 모두 갖게 되었다. 서언약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制復以茂貞爲鳳翔節度使兼山南西道節度使、守中書令,於是茂貞盡有鳳翔、興元、洋、隴、秦等十五州之地。〈鳳翔本一鎭,興元山南西道又一鎭,洋州武定軍又一鎭,秦隴天雄軍又一鎭;史言李茂貞兼有四鎭之地。〉以徐彥若爲御史大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