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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巢의 사망 그리고 치졸한 희종/大暑節(23:26)初候腐草爲螢(반딧불이 나온다)1日(陰6/13)辛未

solpee 2021. 7. 21. 12:13

《唐紀71 僖 中和 4年》〈甲辰, 884年

 

 ⑫. 5월,14일에 이극용이 변주에 이르러서 성 밖에 군영을 만들었는데, 주전충이 굳게 청하여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상원역에 묵었다. 주전충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노래하고 음악을 연주하며 음식이 갖추어져서 모두 풍성하였으며 예의를 차리는 모습도 아주 공손하였는데, 이극용이 술기운을 타고서 기게를 부려 말하는 것이 자못 그를 침해하자, 주전충이 불평하였다.

 ⑫. 甲戌,李克用至汴州,營於城外;朱全忠固請入城,館於上源驛。〈晉天福五年,改東京上源驛爲都亭驛。〉全忠就置酒,聲樂、饌具皆精豐,禮貌甚恭;克用乘酒使氣,語頗侵之,〈饌,雛戀翻,又雛睆翻。李克用蓋言全忠從黃巢爲寇,觸其實也。〉全忠不平。

 

 초저녁에 술자리가 끝나고 따르는 사람들도 모두 술이 크게 취하였는데, 선무의 잔수인 양언홍이 비밀리에 주전충과 모의하여 수레와 나무 그리고 목책을 연결하여서 골목길을 막고 군사를 발동하여 역을 포위하고 이를 공격하니, 그 부르짖는 소리가 땅을 뒤흔들었다.

 薄暮,罷酒,從者皆霑醉,〈霑醉,言飲酒大醉,胸襟霑濕,不能自持也。從,才用翻。〉宣武將楊彥洪密與全忠謀,連車樹栅以塞衢路,〈塞,悉則翻。〉發兵圍驛而攻之,呼聲動地。

 

 이극용은 술에 취하여 이를 듣지 못하였는데, 친병인 설지근과 사경사 등 10여 명이 격투하였고, 사자 곽경수는 촛불을 끄고 이극용을 부축하여 침상 아래에 숨겼으며, 물로 얼굴을 씻어주며 천천히 어려운 사실을 알리니, 이극용은 비로소 눈을 뜨고 활을 잡고 일어났다.

 克用醉,不之聞;親兵薛志勤、史敬思等十餘人格鬬,侍者郭景銖滅燭,扶克用匿牀下,以水沃其面,徐告以難,〈呼,火故翻。難,乃旦翻。〉克用始張目援弓而起。

 

 설지근이 변주 사람들을 쏘니 죽은 사람들이 수십 명이었으며, 순식간에 연기와 불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마침 큰 비가 쏟아지고 번개와 천둥이 쳐서 캄캄하니, 설지근은 이극용을 부축하고 좌우에 있던 수십 명을 일솔하고 담장을 넘어서 포위를 뚫고 번갯불을 이용하여 가는데, 변주 사람들이 다리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힘껏 싸워서 건널 수가 있었으며, 사경사가 뒤에서 막다가 전사하였다.

 志勤射汴人,死者數十。〈援,于元翻。射,而亦翻。〉須臾,煙火四合,會大雨震電,天地晦冥,志勤扶克用帥左右數人〈帥,讀曰率。〉踰垣突圍,乘電光而行,汴人扼橋,力戰得度,史敬思爲後拒,戰死。

 

 이극용이 위지문(대량성 남문)에 올라가서 성을 망치질하여 나올 수가 있었으나 감군 진경사 등 300여 명은 모두 변주 사람들에게 죽었다. 양언홍이 주전충에게 말하였다.

 "호인은 급하면 말을 타고 말탄 사람은  이를 보면 쏩니다."

 이날 저녁에 양언홍은 말을 타고 주전충의 바로 앞에 있었는데, 주전충이 그를 쏘아 죽였다.

 克用登尉氏門,〈尉氏門,汴城南門也,梁開平元年改爲高明門,晉天福三年改爲薰風門。〉縋城得出,監軍陳景思等三百餘人,皆爲汴人所殺。楊彥洪謂全忠曰︰「胡人急則乘馬,見乘馬則射之。」是夕,彥洪乘馬適在全忠前,全忠射之,殪。〈射,而亦翻。殪,壹計翻。《考異》曰︰《梁太祖編遺錄》︰「甲戌,幷帥自曹南旋師,上出封丘門迎勞之。克用堅請入州內,上初止之,乃於門外陳設次舍,將安泊之。克用不諾,因縱蕃騎突入,馳至上源驛。旣不可遏,上乃與之並轡,送至驛亭。是日晚備宴,宴罷,復張樂,繼燭而飲。克用酒酣使氣,廣須樂妓,頗恣無厭之欲;又以醜言陵侮於上。時蕃將皆被甲冑以衞克用。上旣甚不懽,遽起圖之,遂令都將楊彥洪潛率甲士入驛戮之。時夜將半,克用沈醉,忽大雷雨暴至,克用不覺,近侍人乃滅燭推於床下藏之。蕃戎與我師鬬,戰移時方敗,楊彥洪中流矢而斃。是時陰黑,克用遇一卒,背負登尉氏門,因得懸縋而出,乘牛行數里以投其衆,餘親衞數百人,皆勦之。其後克用至太原,以是事表訴于唐帝,蒲帥亦繼馳書請上與克用和解,上終不釋憾。」此乃敬翔飾非,今不取。《實錄》︰「甲戌,李克用次汴州,駐軍近郊,朱全忠請館于上源驛,乃以腹心三百餘自衞。全忠以克用兵從簡少,大軍在遠,謀害也。是夜,置酒,宴罷,以兵圍驛,縱火焚之。」薛居正《五代史‧梁太祖紀》曰︰「五月,甲戌,帝與晉軍振旅歸汴,館克用於上源驛,旣而備犒宴之禮。克用乘醉任氣,帝不平之。是夜,命甲士圍而攻之。」《後唐武皇紀》曰︰「班師過汴,汴帥迎勞於封禪寺,請武皇休於府第,乃館於上源驛。是夜,張樂陳宴席,武皇酒酣,戲諸侍妓,與汴帥握手,敍破賊事以爲樂。汴帥素忌武皇,乃與其將楊彥洪密謀竊發,攻傳舍。」按全忠是時兵力尚微,天下所與爲敵者,非特患克用一人,而借使殺之,不能併其軍,奪其地也。蓋克用恃功,語或輕慢,全忠出於一時之忿耳。今從薛《史‧梁紀》。〉

 

 이극용의 처 유씨는 지혜와 계략이 많은데, 좌우에 있는 사람들로 먼저 벗어나서 돌아온 사람이 변주 사람들이 변란을 일으킨 것을 알리자, 유씨는 신책이 움직임이 없고 그 자리에서 참수하고 몰래 대장을불러서 단속을 시켜서 군사를 보호하여 돌아오게 할 방법을 모의하였다. 밝을 무렵에 이극용이 와서 군사를 챙겨거 주전충을 공격하여하니;, 유씨가 말하였다.

 克用妻劉氏,多智略,左右先脫歸者以汴人爲變告,劉氏神色不動,立斬之,陰召大將約束,謀保軍以還。比明,克用至,〈還,從宣翻。比,必利翻,及也。〉欲勒兵攻全忠,劉氏曰︰

 

 "공은 최근에 나라를 위하여 도적을 토벌하려고 하여 동쪽에 있는 제후의 급한 상황을 구하려고 하였는데, 지금 변주 사람들이 부도하여 마침내 공을 모해하는 것이니, 스스로 마땅히 이를 조정에 하소연해야 합니다. 만약에 멋대로 군사를 일으켜서 서로 공격하면 천하에서 누가 그 곡직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저들은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公比爲國討賊,救東諸侯之急,〈比,毗至翻,近也。爲,于僞翻。東諸侯,用《左傳》語,謂東方諸鎭。〉今汴人不道,乃謀害公,自當訴之朝廷。若擅舉兵相攻,則天下孰能辨其曲直!且彼得以有辭矣。」

 

 이극용이 이를 좇아서 군사를 이끌고 떠났고, 다만 편지를 보내어 주전충을 책망하였다. 주전충이 회답하는 편지를 보내서 말하였다.

 "전날 저녁의 변고는 제가 알지 못하였으며 조정이 스스로 파견한 사자와 양언홍이 모의한 것입니다. 양언홍은 이지 복주되었으니 오직 공께서는 양해하여 살펴 주십시오."

 克用從之,引兵去,但移書責全忠。全忠復書曰︰「前夕之變,僕不之知,朝廷自遣使者與楊彥洪謀,彥洪旣伏其辜,惟公諒察。」

 

 이극용의 양자인 이사원은 나이가 열일곱 살인데 이극용을 좇아서 상원(지난 밤 묵었던 역사)에서부터 화살과 돌이 날아다니는 사이에 있었는데도 홀로 다치는 일이 없었다. 이사원은 본래 호인으로 이름은 막길언이었고 성은 없었다. 이극용은 군대 안에서 날래고 용감한 사람을 골라서 대부분 길러서 아들로 삼았는데, 이름은 회골 출신의 장정의 아들을 존신이라 하였고, 진무 출신의 손중진을 존진이라 하며, 허주 출신 왕헌을 존현이라 하였고, 안경사를 존효라고 하고, 모두 성을 이씨로 하였다.

 克用養子嗣源,年十七,從克用自上源出,矢石之間,獨無所傷。嗣源本胡人,名邈佶烈,無姓。〈李嗣源始此。佶,極吉翻。〉克用擇軍中驍勇者,多養爲子,名回鶻張政之子曰存信,〈按薛居正《五代史》,存信本名張汚落。〉振武孫重進曰存進,許州王賢曰存賢,安敬思曰存孝,皆冒姓李氏。〈此所謂義兒也。歐陽脩曰︰唐自沙陀起代北,其所與俱,皆一時雄傑虓武之士,往往養爲兒,號義兒軍。〉

 

 16일에 이극용이 허주의 옛날 영채에 도착하여 주급에게 양식을 요구하였더니, 주급이 양식이 부족하다고 말하자, 마침내 하를 건너서 진양으로 들어갔다.

 丙子,克用至許州故寨,求糧於周岌,岌辭以糧乏,乃自陝濟河還晉陽。

 

 ⑭. 20일에 시부가 그의 장수인 이사열을 파견하여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황소를 뒤쫓았다.

 ⑭. 庚辰,時溥遣其將李師悦將兵萬人追黃巢。

 

《唐紀72 僖 中和 4年》〈甲辰, 884年

 

 ②. 6월, 12일에 무령장수 이사열이 상양과 더불어 황소를 뒤쫓아서 瑕丘(하구: 산동 연주)에 도착하여 이를 패배시켰다.

 ②. 甲辰,武寧將李師悅與尚讓追黃巢至瑕丘,敗之。〈宋白曰︰春秋以邾子益來,囚諸負瑕。杜預《註》云︰魯邑也,高平郡南平陽縣西北有瑕丘城,漢爲瑕丘縣。敗,補邁翻。〉

 

 황소의 무리는 거의 다 없어지고 도망하여 낭호곡에 도착하였고, 17일에 황소의 생질인 임언이 황소와 형제 그리고 처자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時溥(시부: 감화절도사)에게 가려고 하였는데ㅐ, 사타의 박야군을 만나서 이를 빼앗겼고, 아울러 임언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시부에게 바쳤다.

 巢衆殆盡,走至狼虎谷,〈狼虎谷在泰山東南萊蕪界。〉丙午,巢甥林言斬巢兄弟妻子首,將詣時溥;遇沙陀博野軍,奪之,幷斬言首以獻於溥。〈黃巢乾符三年起兵爲盜,至是凡十年而滅。《考異》曰︰《續寶運錄》曰︰「尚讓降徐州,黃巢走至碣山,路被諸軍趁逼甚,乃謂外甥朱彥之云云。外甥再三不忍下手,黃巢乃自刎過與外甥。外甥將至,路被沙陀博野奪卻,兼外甥首級一時送都統軍中。」《舊紀》︰「七月癸酉,賊將林言斬黃巢、黃揆、黃秉三人首級降。」《舊傳》︰「巢入泰山,徐帥時溥遣將張友與尚讓之衆掩捕之。至狼虎谷,巢將林言斬巢及二弟鄴、揆等七人首幷妻子函送徐州。」《新紀》︰「七月壬午,黃巢伏誅。」《新傳》︰「巢計蹙,謂林言曰︰『汝取吾首獻天子,可得富貴,毋爲他人利。』言,巢甥也,不忍。巢乃自刎,不殊,言因斬之,函首將詣時溥,而太原博野軍殺言與巢首俱上。」今從《新傳》。

 

 ④. 가을, 7월 24일에 시부는 사자를 파견하여 황소와 그 집안사람의 수급과 아울러 그 희첩을 바치니, 황상이 대현루에 친히 나아가서 이를 받았다. 선언하여 희첩에게 물었다.

 ④. 秋,七月,壬午,時溥遣使獻黃巢及家人首幷姬妾,上御大玄樓受之。〈大玄樓,成都羅城正南門樓。高駢之築成都羅城,旣訖功,以《周易》筮之,得《大畜》。駢曰︰「畜者,養也。濟以剛健篤實,輝光日新,吉孰大焉!文宜去下存上。」因名大玄城。〉宣問姬妾︰

 

 "너희들은 모두 공훈을 세운 높은 벼슬을 가진 집안의 자녀이고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하여 도적을 좇았는가?"

 그 가운데 제일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말하였다.

 「汝曹皆勳貴子女,世受國恩,何爲從賊?」其居首者對曰︰

 

 "미친 도적이 흉악하게 역적질을 하는데, 국가는 백만이나 되는 무리를 가지고 종조를 지키지 못하고 파· 촉으로 파천을 하엿으니, 지금 폐하께서 도적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을 한 여자에게 책임지우시는데, 공경과 장수들은 어느 곳에다 두셨습니까?"

 「狂賊凶逆,國家以百萬之衆,失守宗祧,播遷巴、蜀;〈祧,他彫翻。〉今陛下以不能拒賊責一女子,置公卿將帥於何地乎!」

 

 황상은 다시 묻지 아니하고 모두 저자에서 육시하였다. 사람들은 다투어 그들에게 술을 주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슬프고 두려워서 정신을 잃도록 취하였지만 우두머리에 있던 사람은 홀로 술을 마시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으며, 형장에 이르러서도 정신과 모습이 엄숙하였다.

 上不復問,皆戮之於市。〈復,扶又翻。〉人爭與之酒,其餘皆悲怖昏醉,居首者獨不飲不泣,至於就刑,神色肅然。〈《考異》曰︰張?《耆舊傳》︰「中和三年,五月二十日,北路軍前進到黃巢首級、妻、男。」今不取其年月而取其事。

 

* 희종은 황소의 희첩들에게 못난 자신을 분풀이 하였다. 참 더럽고도 치사한 임금이다. 그러니까 여자 하나 백성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몰래 도주한 놈이 황제였으니 자신을 통쾌하게 꾸짖은 여자를 용서할 아량마져 었엇기에 그 여자들을 살려 줄 용기마저 없었다. 사실 현종 755년 안사의 난 이후 당은 10분20열되어 한 번도 나라다운 면이 없이 景宗 907년에 주전충의 후량에 의해 멸망하였다. 618년 당 건국 이래 통일된 왕조는 755년 안사의 난 이전까지 137년 뿐이었다. 그것도 초기엔 거의 20여년 간 4분5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