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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巢의 潰走/小暑節末候鷹乃學習5日(陰6/12)庚午

solpee 2021. 7. 21. 05:29

《唐紀71 僖 中和 4年》〈甲辰, 884年

 

 ④. 황소의 군사는 아직도 강하여 주급· 시부· 주전충이 지탱할 수가 없어서 함께 하동절도사 이극용에게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④. 黃巢兵尚強,周岌、時溥、朱全忠不能支,共求救於河東節度使李克用。

 

 2월에 이극용은 번· 한으로 된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천정관을 나갔는데, 하양절도사 제갈상은 하의 다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군사를 만선에 주둔시키고 이를 막았다. 이극용은 마침내 군사를 돌려서 협과 하중에서 하를 건너서 동쪽으로 갔다.

 二月,克用將蕃、漢兵五萬出天井關;河陽節度使諸葛爽辭以河橋不完,〈謂河陽橋也。〉屯兵萬善以拒之。克用乃還兵自陝、河中渡河而東。〈《考異》曰︰《唐末見聞錄》︰「晉王三月十三日發大軍討黃巢。」《太祖紀年錄》︰「正月,太祖帥師五萬自澤潞將下天井關,河陽屯萬善,乃改轅蒲、陝渡河。」薛居正《五代史》但云四年春。按四月已與巢戰,三月十三發日晉陽,似太晚。又克用表云︰「昨二月內,頻得陳、許、徐、汴書牒。」今從《舊傳》。又克用自訴上表云︰「遂從陝服,徑達許田。」是於蒲、陝兩道度兵也。

 

 ⑥. 주전충이 황소의 와자체를 쳐서 이를 탈취하였는데, 황소의 장수인 협주 사람 이당빈과 초구 사람 왕건유가 주전충에게 항복하였다.

 ⑥. 朱全忠擊黃巢瓦子寨,拔之;〈黃巢撤民居以爲寨屋,謂之瓦子寨。〉巢將陝人李唐賓、楚丘王虔裕降于全忠。〈陝,失冉翻。降,戶江翻。

 

 ⑩. 황소가 진주를 포위하고 거의 300일이 되었는데 조주 형제는 이들과 더불어 크고 작은 전투를 수백 번 하였으며, 비록 무기와 식량이 곧 다 없어지려고 하였지만 무리들의 마음은 더욱 굳어있었다. 이극용이 마침 허· 변· 서· 연의 군사들을 진주에서 만났는데, 이때에 상양은 태강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여름, 4월 3일에 여러 군대가 나아가서 태강을 뽑았다. 황사업은 서화에 주둔하고, 여러 군대가 다시 그를 공격하니, 황사업은 달아났다.

 ⑩. 黃巢圍陳州幾三百日,〈幾,居依翻。〉趙犨兄弟與之大小數百戰,雖兵食將盡,而衆心益固。李克用合許、汴、徐、兗之軍于陳州;時尚讓屯太康,〈太康,漢陽夏縣,隋改曰太康,以縣東有太康城也,唐屬陳州。〉夏,四月,癸巳,諸軍進拔太康。黃思鄴屯西華,〈西華,漢縣,唐屬陳州。《九域志》︰在州西八十里。〉諸軍復攻之,〈復,扶又翻;下同。〉思鄴走

 

 황소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군사를 고양리로 물리니, 진주의 포위는 마침내 풀어졌다.

 주전충은 황소가 곧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대량으로 돌아갔다.

 黃巢聞之懼,退軍故陽里,〈故陽里在陳州城北。〉陳州圍始解。

朱全忠聞黃巢將至,引軍還大梁。

 

 5월 3일에 큰 비가 내려서 평지에도 물이 세 자 되니 황소의 군영은 물에 떠 있었는데, 이극용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동북쪽으로 가서 변주를 향하였고 위지를 도륙하였다. 상양은 교기 5천을 데리고 대량을 압박하여 번대에 도착하였고, 선무의 장수인 풍 사람 주진과 남화 사람 방사고가 그를 쳐서 물리쳤다.

 五月,癸亥,大雨,平地三尺,黃巢營爲水所漂,且聞李克用將至,遂引兵東北趣汴州,〈趣,七喻翻。〉屠尉氏。尚讓以驍騎五千進逼大梁,至于繁臺;〈繁臺,本師曠吹臺,梁孝王增築。《水經註》︰吹臺在浚儀城南牧澤之右。牧澤者,今之蒲關澤,卽此澤也。〉宣武將豐人朱珍、南華龐師古擊卻之。〈豐,漢縣,唐屬徐州。《九域志》︰在徐州西北一百四十里。〉

 

 주전충이 다시 이극용에게 급한 것을 알리니 6일에 이극용이 충무도감사 전종이와 더불어 허주를 출발하여 8일에 중모 북쪽에 있는 왕만도에서 뒤좇아 가서 만났고, 그들이 반쯤 건너는 기회를 타고서 떨쳐서 쳐서 그들을 크게 격파하고 1만여 명을 죽이니, 도적들은 드디어 붕괴되었다.

 全忠復告急於李克用,丙寅,克用與忠武都監使田從異發許州,戊辰,追及黃巢於中牟北王滿渡,〈按《舊書‧帝紀》,王滿渡乃汴河所經津濟之地。〉乘其半濟,奮擊,大破之,殺萬餘人,賊遂潰。

 

 상양은 그 무리를 인솔하고 시부에게 항복하였는데, 별장인 임진 사람 이당· 곡주 사람 곽존· 견성 사람 갈종주· 우ㅓㄴ구 사람 장귀패 그리고 동생 장귀후가 그 무리를 인솔하고 주전충에게 항복하였다.

 尚讓帥其衆降時溥,〈帥,讀曰率;下同。〉別將臨晉李讜、曲周霍存、甄城葛從周、冤句張歸霸及〈【章︰十二行本「及」下有「從」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弟歸厚帥其衆降朱全忠。〈臨晉,古地名,隋分猗氏,置桑泉縣,天寶十三載,改爲臨晉,屬河中府。《九域志》︰在府北六十五里。曲周,漢古縣,中廢,隋分洺水復置,唐屬洺州,宋廢爲鎭,屬雞澤縣。「甄城」,當作「鄄城」,亦漢古縣,唐帶濮州。史言朱全忠後吞諸鎭,多用所降黃巢將。鄄,古掾翻。《考異》曰︰崇文院有《梁功臣列傳》,不著撰人名氏,云︰「張歸厚,祖興,父處讓。歸厚中和末,與伯季自冤句相率來投。」薛居正《五代史》︰「張歸霸祖進言,父實。」《歸厚傳》無父、祖,但云與兄歸霸皆來降。據《梁功臣傳》,父祖與歸霸不同,當是從弟。〉

 

 황소는 변주를 넘어서 북쪽으로 가는데 9일에 이극용이 이를 좇아가서 봉구에서 쳐서 또 이들을 격파하였다. 10일 밤에 다시 큰 비가 내리니 도적들은 놀라고 두려워서 동쪽으로 도망하였는데 이극용이 이를 좇아서 조성과 광성을 지나갔다. 황소가 나머지 무리를 거두니 근 1천 명이었는데, 동쪽으로 도망하여 연주로 갔다.

 巢踰汴而北,己巳,克用追擊之於封丘,又破之。庚午夜,復大雨,賊驚懼東走,克用追之,過胙城、匡城。〈胙城,漢南燕縣,隋改曰胙城,唐屬滑州。《九域志》︰在州南九十里。宋白曰︰胙城縣,本古之胙國,又爲古之燕國,漢爲南燕縣。隋文帝因覽奏狀,見南燕縣名,因曰︰「今天下一統,何南燕之有!」遂改爲胙城。〉巢收餘衆近千人,東奔兗州;〈近,其靳翻。〉

 

 11일에 이극용이 뒤쫓아서 원구에 이르니 말을 타고 좇아올 수 있는 사람은 겨우 수백 명이고 밤낮으로 200여 리를 가니 사람과 말이 피곤하고 지쳤으며, 양식이 다하여 마침내 변주로 들어가서 양식을 싸가지고 다시 그들을 뒤쫓아서 황소의 어린 아들과 승여와 기복 그리고 符印을 획득하였고 약탈하였던 사람 남녀 1만 명을 얻었는데 이들을 모두 놓아 보냈다.

 辛未,克用追至冤句,騎能屬者纔數百人,〈屬,之欲翻。〉晝夜行二百餘里,人馬疲乏,糧盡,乃還汴州,欲裹糧復追之,獲巢幼子及乘輿器服符印,〈乘,繩證翻。〉得所掠男女萬人,悉縱遣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