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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巢의 장안 점령 3./小暑節末候鷹乃學習4日(陰6/11)己巳

solpee 2021. 7. 18. 15:28

《唐紀69 僖 光明 元年》〈庚子, 880年

 

 ⑩. 황상은 낙곡으로 향하였고, 봉상절도사 정전이 길에서 황상을 알현하고 거가가 봉상에 머물기를 청하였다. 황상이 말하였다.

 "짐은 거대한 도적과 가까이 있기를 바라지 않고, 또 흥원으로 행차하여 군사를 불러 수복을 도모하려 한다. 경은 동쪽으로 적의 칼날을 막고 서쪽으로 여러 번족들을 어루만지며 이웃하는 도를 규합하여 힘써 큰 공훈을 세우시오."

 정전이 말하였다.

 "도로가 막히고 걸려서 주문과 회보가 왕래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편리한대로 일을 좇아하게 하여 주십시오."

 이를 허락하였다.

 ⑩. 上趣駱谷,〈趣,七喻翻。〉鳳翔節度使鄭畋謁上於道次,〈《考異》曰︰《續寶運錄》︰「戊子,帝至駱谷壻水驛,乃下詔與牛顓、楊師立、陳敬瑄,云今月七日,已次駱谷壻水驛。」按此月庚辰朔,戊子九日,而詔云七日,「九」誤爲「七」也。《實錄》︰「辛卯,車駕次鳳翔,鄭畋候謁於路。」《舊‧畋傳》云候駕於斜谷。《新紀》︰「辛卯,次鳳翔。丁酉,至興元。」按甲申上離長安,辛卯始次鳳翔,太緩,丁酉已至興元,太速。又路出駱谷則不過鳳翔及斜谷。蓋車駕涉鳳翔之境,而畋往見耳,非鳳翔與斜谷也。《實錄》︰「賊以數萬衆西追車駕。」而不言追不及,又不言爲誰所拒而還。諸書皆無之。今不取。〉請車駕留鳳翔。上曰︰「朕不欲密邇巨寇,且幸興元,徵兵以圖收復。卿東扞賊鋒,西撫諸蕃,糾合鄰道,勉建大勳。」畋曰︰「道路梗澁,奏報難通,請得便宜從事。」許之。

 

 9일에 황상이 서수에 도착하여 우욱· 양사립· 진경선에게 조서를 내려서 경성이 지켜지지 않아서 또 흐,ㅇ원으로 행차하는데, 만약에 도적의 형세가 오히려 성해진다면 장차 성도로 행차할 것이니 의당 미리 대비하라고 유시하였다.

 戊子,上至壻水,〈《九域志》︰洋州興道縣有壻水鎭,相傳云仙人唐公昉盡室升天,其壻不得偕升,遂以名水;誕矣。〉詔牛勗、楊師立、陳敬瑄,諭以京城不守,且幸興元,若賊勢猶盛,將幸成都,宜豫爲備擬。

 

 11일에 황소는 당 종실 가운데 장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여서 남겨두지 아니하였다.

 12일에 황소는 비로소 궁궐로 들어갔다.

 13일에 황소는 함원전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흑색비단에 그림을 그려넣은 곤의를 입고 전고를 수백 번 쳐서 금석의 음악을 대신하였다. 단봉루에 올라가서 사면하는 글을 내리고, 국호를 대제라고 하고 연호를 고쳐서 금통이라고 하였다.

 庚寅,黃巢殺唐宗室在長安者無遺類。辛卯,巢始入宮。壬辰,巢卽皇帝位于含元殿,畫皁繒爲袞衣,擊戰鼓數百以代金石之樂。登丹鳳樓,下赦書;國號大齊,改元金統。

 

 광명이라고 한 연호는 당이라는 글자에서 아래 몸통을 없애버리고 황가의 일월을 붙인 것이라 하여 자기들이 상서로운 부신으로 생각하였다.

 당의 3품 이상 관원들은 모두 그 직임이 정지되고, 4품 이하의 직위에 있는 사람은 옛날 그대로 두었다. 처인 조씨를 황후로 삼았다. 상양을 태위· 겸중서령으로 삼고 조장을 겸시중으로 하며, 최구· 양희고를 나란히 동평장사로 하고, 맹해· 개홍을 좌우복야· 지좌우군사로 하고, 불전고를 추밀사로 삼았다. 태상박사인 피일휴를 한림학사로 삼았다. 최구는 최빈의 아들인데 이때에 절동관찰사에서 파직되어 장안에 있었는데, 황소가 그를 만나서 재상으로 한 것이다.

 謂廣明之號,去唐下體而著黃家日月,以爲己符瑞。〈著,側略翻。言「唐」字去「肀」「口」而著「黃」字爲「廣」字,合「日」「月」爲「明」字也。〉唐官三品以下悉停任,四品以下位如故。以妻曹氏爲皇后。〈《考異》曰︰《實錄》、《巢傳》,立妻曲氏爲皇后。今從《新傳》。〉以尚讓爲太尉兼中書令,趙璋兼侍中,崔璆、楊希古並同平章事,孟楷、蓋洪爲左右僕射、知左右軍事,〈蓋,古盍翻。黃巢自以其軍分左右耳。〉費傳古爲樞密使。〈費,父沸翻,姓也。〉以太常博士皮日休爲翰林學士。〈陸游《老學菴筆記》曰︰《該聞錄》言皮日休陷黃巢爲翰林學士,巢敗,被誅;今《唐書》取其事。按尹師魯作《大理寺丞皮子良墓誌》稱︰「曾祖日休,避廣明之難,徙籍會稽,依錢氏,官太常博士,贈禮部尚書。祖光業,爲吳越丞相。父璨,爲元帥府判官。三世皆以文雄江東。」據此,則日休未嘗陷黃巢爲其翰林學士被誅也。小說謬妄,無所不有。師魯文章傳世,且剛正有守,非欺後世者。〉璆,邠之子也,〈【嚴︰改「邠」爲「郾」。】〉〈崔邠,郾之兄也,德宗朝爲右補闕,嘗論裴延齡,有直聲。「子」恐當作「孫」。〉時罷浙東觀察使,在長安,巢得而相之。〈璆之在浙東也,固與巢信使往來,又爲之表奏朝廷。〉

 

 제갈상이 대북행영을 역양에 주둔시켰는데, 황소의 장수인 탕산 사람 주온이 동위교에 주둔하자, 황소는 주온을 시켜서 그를 유혹하여 설득하게 하니 제갈상이 드디어 황소에게 항복하였다.

 諸葛爽以代北行營兵屯櫟陽,黃巢將碭山朱溫屯東渭橋,〈碭山在漢碭縣界,後魏置安陽縣,治麻城,隋開皇十八年改名碭山,唐屬宋州。《九域志》︰在單州東南九十里。碭,徒郎翻。朱溫始此。〉巢使溫誘說之,〈說,式芮翻。〉爽遂降於巢。

 

 주온은 어려서 외롭고 가난하여 형인 주욱과 주존과 더불어 어머니 왕씨를 좇아서 소헌 유숭의 집에 의탁하여 살았었는데, 유숭이 자주 그에게 태장을 치고 욕을 하니 유숭의 어머니가 홀로 가련하게 생각항려 그 집안사람들에게 경계하여 말하였다.

 주삼은 보통사람이 아니니 너희들은 그를 잘 대우하여라."

 溫少孤貧,與兄昱、存隨母王氏依蕭縣劉崇家,崇數笞辱之,〈按《五代史》,溫凶悍無賴,崇患太祖慵惰不作業,數笞責之。獨崇母憐之,時時自爲櫛沐,戒家人曰︰「朱三非常人也,宜善遇之。」數,所角翻。〉崇母獨憐之,戒家人曰︰「朱三非常人也,汝曹善遇之。」〈朱溫第三。〉

 

 황소는 제갈상을 하양 절도사로 삼았는데, 제갈상이 진소에 가자 나원고가 군사를 발동하여 그를 막앗지만 사졸들은 모두 갑옷을 버리고 제갈상을 영접하였고, 나원고는 행재소로 달아났다.

 巢以諸葛爽爲河陽節度使,爽赴鎭,羅元杲發兵拒之,士卒皆棄甲迎爽,元杲逃奔行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