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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巢의 發扈 3/小暑節末候鷹乃學習2日(陰6/9)丁卯

solpee 2021. 7. 17. 19:10

《唐紀69 僖 乾符 6年》〈己亥, 879年

 

 ⑬. 황소가 절동관찰사 최구와 영남동도절도사 이초에게 편지를 보내어 천평절도사를 시켜달라고 요구하였는데, 두 사람이 이 땜분에 주문을 올려서 보고하였지만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황소는 다시 표문을 올려서 광주절도사를 시켜달라고 요구하니, 황상이 대신들에게 논의하라고 명령하였다.

 ⑬. 黃巢與浙東觀察使崔璆、嶺南東道節度使李迢書,求天平節度使,〈璆,渠幽翻。〉二人爲之奏聞;〈爲,于僞翻。〉朝廷不許。巢復上表求廣州節度使,〈《考異》曰︰《續寶運錄》曰︰「黃巢先求廣府兼使相,朝廷不與。黃巢夏初兵屯廣南,屢候敕旨不下,遂恣行攻劫。黃巢夏六月上表,稱『義軍百萬都統兼韶、廣等州觀察處置等使。』末云『六月十五日表。』秋,遣內侍仇公度齎手詔幷廣南、邕府、安南、安東等道節度使、指揮觀察使、開國公、食邑五百戶官告六通,又賜節度將吏空名尚書僕射官告五十通。九月二十日,仇公度到廣州,至十月一日,巢與公度雜匹段、藥物等五馱、表函幷所賜官告並卻府公度。表末云︰『廣明元年十月一日上表。』公度等其年十月二十九日至京。」如《寶運錄》所言,則是廣明元年十月一日,巢猶在廣州也。按其月巢已入長安。今從《舊紀》。〉上命大臣議之。

 

 좌복야 우종이 말하였다.

 "광주는 市舶(선박시장: 즉 무역담당부서)하는 보화가 모이는 곳인대 어찌 도적으로 하여금 이곳을 얻게 하겠는가?"

 역시 허락하지 아니하고 마침내 따로 관직을 재수할 것을 논의하였다. 6월에 재상이 황소를 (率)府率(부솔: 동궁 무관 가운데 태자좌우솔부와 좌우사어솔부가 있고 솔은 각 부솔의 책임자이다)로 재수하자고 청하여 이를 좇았다.

 左僕射于琮以爲︰「廣州市舶寶貨所聚,〈舶,薄陌翻,大舟也。唐置市舶司於廣州,以招來海中蕃舶。〉豈可令賊得之!」亦不許,乃議別除官。六月,宰相請除巢府〈【章︰十二行本「府」上有「率」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率,從之。〈《考異》曰︰《舊紀》︰「五月,賊圍廣州,仍與廣南節度使李迢、浙東觀察使崔璆書求保薦,乞天平節鉞。迢、璆上表論之。」《實錄》︰「迢、璆上表論請,詞甚懇激,乃詔公卿集議。巢又自表乞廣州節度、安南都護。巢自春夏其衆大疫,死者什三四,欲據有嶺表,永爲巢穴,乃繼有是請。右僕射于琮議云云。時朝廷倚高駢成功,不允其奏,乃議除官。或云,以正員將軍縻之;宰相亦沮其議,乃除率府率。」《舊‧巢傳》曰︰「時高駢鎭淮南,表請招討賊,許之,議加都統。巢乃渡淮,僞降于駢,騈遣將張潾帥兵受降于天長鎭。巢禽潾,殺之,因虜其衆。尋南陷湖、湘,遂據交、廣,託崔璆奏乞天平節度,朝議不允。又乞除官,時宰臣鄭畋與樞密使楊復恭欲請授同正員將軍;盧攜駮其議,請授率府率,如其不受,請以高駢討之。」《新‧巢傳》曰︰「有詔,高駢爲諸道行營都統。巢進寇廣州,詒李迢書,求表爲天平節度使,又脅崔璆言于朝。宰相鄭畋欲許之,盧攜、田令孜執不可。巢又乞安南都護、廣州節度使,書聞,右僕射于琮議云云。乃拜巢率府率。」《舊‧盧攜傳》亦皆以爲攜議授巢率府率。按此時攜已罷相。今從《實錄》。

 

 ⑯. 9월에 황소가 솔부솔의 고신을 얻고서 크게 화가 나서 정치를 당당한 사람을 욕하고 급히 광주를 공격하여 그날로 이를 함락시키고, 절도사 이초를 붙잡았으며, 돌아다니며 영남에 있는 여러 주현을 약탈하였다. 황소는 이초로 하여금 그가 품은 생각을 서술하는 표문의 초안을 잡게 하였다. 이초가 말하였다.

 ⑯. 九月,黃巢得率府率告身,大怒,詬執政,急攻廣州,卽日陷之,執節度使李迢,轉掠嶺南州縣。巢使迢草表述其所懷,迢曰︰

 

 "나는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고 친척들이 조정에 가득한데, 팔을 자를 수는 있지만 표문은 기초할 수 없소."

 황소는 마침내 그를 죽였다.

 「予代受國恩,親戚滿朝,腕可斷,表不可草。」〈朝,直遙翻。腕,烏貫翻。〉巢殺之。〈《考異》曰︰《驚聽錄》曰︰「擁李迢在寇,復併爇海隅,又陷桂州,次攻湖南,屯衡州,方知王仙芝已山東沒陣,又尚君長生送咸京,遂召李迢,怒而躓害。」《新紀》︰「十一月,辛酉,黃巢陷江陵,殺李迢。」《新傳》曰︰「其十月,巢據荊南,脅李迢草表報天子;迢不可,巢怒,殺之。」《北夢瑣言》曰︰「黃巢入廣州,執李佋,隨軍至荊州,令佋草表述其所懷。佋曰︰『某骨肉滿朝,世受國恩,腕卽可斷,表終不爲領。』於江津害之。」今從《實錄》。

 

 ⑱. 황소가 영남에 있는데, 사졸들이 장역에 걸려서 죽은 사람이 열에 서넛이 되니, 그 무리들이 그에게 북쪽으로 돌아가서 큰일을 도모하라고 권고하자, 황소는 이를 좇았다.

 계주(계림)에서 큰 뗏목 수십 개를 만들어서 홍수를 타고 상강을 따라서 아래로 내려가서 형과 영을 거쳐서 10월 21일에 담주(호남 장사) 아래에 다다랐다.

 ⑱. 黃巢在嶺南,士卒罹瘴疫死者什三四,其徒勸之北還以圖大事,巢從之。自桂州編大栰數十,乘暴水,沿湘江而下,歷衡、永州,癸未,抵潭州城下。

 

 이계는 농성하며 감히 나와서 싸우지 아니히였지만 황소는 급하게 공격하여 하루 만에 이를 함락시켰고 이계는 낭주로 달아났다. 황소는 병사들을 다 죽이고 시체로 강을 덮도록 흘려서 내려 보냈다. 상양은 이긴 기세를 타고서 나아가서 강릉을 압박하니 무리는 50만이라고 불렀다.

 李係嬰城不敢出戰,巢急攻,一日,陷之,係奔朗州。〈《九域志》︰自潭州至朗州三百八十餘里。〉巢盡殺戍兵,流尸蔽江而下。尚讓乘勝進逼江陵,衆號五十萬。

 

 이때에 여러 도의 군사들은 아직 모여 있지 않아서 강릉의 군사가 1만 명을 넘지 아니하니, 왕탁은 그의 장수인 유한굉을 남겨두어 강릉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무리를 거느리고 양양으로 가면서 이르기를 유거용의 군사와 만나겠다고 하였다.

 時諸道兵未集,江陵兵不滿萬人,王鐸留其將劉漢宏守江陵,自帥衆趣襄陽,〈《九域志》︰自江陵至襄陽四百四十里。帥,讀曰率。趣,七喻翻。〉云欲會劉巨容之師。

 

 왕탁이 이미 떠나고 나자 유한굉은 강릉에서 크게 약탈하고 불 질러서 거의 다 없어지게 하니 사민들은 산골짜기로 도망하여 숨었다. 마침 큰 눈이 와서 뻣뻣한 시체가 들에 가득 찼다. 그 뒤 열흘 남짓 지나니, 도적이 마침내 도착하였다.

 유한굉은 연주 사람이고 그 무리를 인솔하고 북쪽으로 돌아가서 떼도적이 되었다.

 鐸旣去,漢宏大掠江陵,〈《考異》曰︰《舊紀》︰「廣明元年二月,巢陷潭州,王鐸棄江陵,奔襄陽,漢宏大掠。」《實錄》︰「閏月,湖南奏︰黃巢賊衆自衡、永州下,十月二十七日攻陷潭州。」《新‧巢傳》曰︰「廣明初,賊自嶺南寇湖南諸郡,攻潭州,陷之。」《舊‧巢傳》︰「巢欲據南海之地,坐邀朝命。是歲,自春及夏,其衆大疫,死者十三四。衆勸請北歸以圖大利,巢不得已,廣明元年北踰五嶺,犯湖、湘、江、浙。」按《舊紀》、《傳》皆云廣明元年敗王鐸。今月日從《實錄》,事從《舊書》。又據《舊紀》、《傳》,則劉漢宏本王鐸將,鐸去而漢宏留江陵大掠,遂爲盜也。《實錄》用之,而於鐸奔襄陽下添「先是」字。若鐸在江陵,漢宏時爲羣盜,安能入其城大掠?借使漢宏先曾寇掠江陵,與黃巢事了不相干,何必言「後半月餘,賊衆乃據其城」也!《吳越備史》云︰「漢宏本兗州小吏,領本州兵禦巢寇,遂殺將首,刼輜重而叛。後命前濠州刺史崔鍇招降之。」據此,則漢宏本羣盜也。《新傳》用之,而云鐸招降之。或者漢宏本羣盜,中間降鐸爲部將,鐸去江陵,漢宏復大掠爲盜,其後又降於崔鍇,遂爲唐臣也。〉焚蕩殆盡,士民逃竄山谷。會大雪,僵尸滿野。〈僵,居良翻。〉後旬餘,賊乃至。漢宏,兗州人也,帥其衆北歸爲羣盜。〈帥,讀曰率。

 

 ㉑. 황소가 북쪽으로 양양을 향하니 유거용은 강서초토사인 치주 자사 조전정과 군사를 합쳐서 형문에 주둔하고서 이를 막았다. 도적이 이르자 유거용은 군사를 숲속에 숨겨두었고 조전정은 경무장한 기병을 가지고 맞아 싸우다가 겉으로 이기지 못하면서 달아나니 도적들이 이를 뒤쫓았다. 복병을 일으켜 도적의 무리를 대파하였고 이긴 기세를 타고서 북쪽으로 쫓았는데, 강릉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포로로 잡고 목을 벤 것이 열에 일고여덟이었다.

 ㉑. 黃巢北趣襄陽,〈趣,七喻翻。〉劉巨容與江西招討使淄州刺史曹全晸合兵屯荊門以拒之。〈《九域志》︰襄陽南至荊門二百七十餘里。〉賊至,巨容伏兵林中,全晸以輕騎逆戰,陽不勝而走,賊追之,伏發,大破賊衆,乘勝逐北,比至江陵,〈比,必利翻,及也。《九域志》︰荊門南至江陵一百六十五里。〉俘斬其什七八。

 

 황소는 상양과 더불어 남은 무리를 수습하여 강을 건너서 동쪽으로 달아났다. 어떤 사람이 유거용에게 권고하여 끝까지 추격하면 도적은 다 없앨 수 있다고 권고하였다. 유거용이 말하였다.

 "국가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지우기를 좋아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장사들을 위무하여 살게 하며 관직과 상을 아끼지 아니하는데, 일이 편안해지면 이를 버리니,  혹은 다시 죄를 얻게 되는데, 도적들을 남겨 두어 부귀하게 되는 밑천이 되게 하는 것만 못하오."

 巢與尚讓收餘衆渡江東走。或勸巨容窮追,賊可盡也。巨容曰︰「國家喜負人,〈喜,許記翻。〉有急撫存將士,不愛官賞,事寧則棄之,或更得罪;〈唐末之政,誠如劉巨容之言。〉不若留賊以爲富貴之資。」

 

 무리들은 마침내 중지하엿다. 조전정이 강을 건너서 도적을 뒤쫓았는데 마침 조정에서 태녕도장 단언모를 대신 초토사로 삼으니, 조전정도 역시 중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서 도적의 세력은 다시 떨치게 되었고, 악주(무한)를 공격하여 그 외곽을 함락시켰으며, 돌아다니면서 요(파양)· 신(상요)· 지(안휘 귀지)· 선(안휘 선주)· 흡(안휘 읍)· 항(항주)의 15개 주에서 약탈하니 그 무리는 20만 명에 이르렀다.

 衆乃止。全晸渡江追賊,會朝廷以泰寧都將段彥謨代爲招討使,全晸亦止。由是賊勢復振,〈復,扶又翻。〉攻鄂州,陷其外郭,轉掠饒、信、池、宣、歙、杭十五州,衆至二十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