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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巢의 發扈 2/小暑節末候鷹乃學習1日(陰6/8)丙寅

solpee 2021. 7. 17. 05:18

《唐紀68 僖 乾符 3年》〈丙申, 876年

 

 ㉖. 왕선지가 기주를 공격하였다. 기주 자사 배약은 왕탁이 지거였을 때에 발탁한 진사였다. 왕료가 도적들 속에 있었는데 왕선지를 위하여 편지로써 배약에게 유세하였다. 배악과 왕선지가 약속하고 군사를 거두어서 싸우지 않고, 그를 위하여 관직을 주도록 주문을 올렸으며, 왕료도 역시 왕선지를 유세하여 약속대로 하기로 허락하였다.

 ㉖. 王仙芝攻蘄州。蘄州刺史裴偓,〈【章︰十二行本「偓」作「渥」;下同;乙十一行本同;孔本同。】〉王鐸知舉時所擢進士也。王鐐在賊中,爲仙芝以書說偓。〈爲,于僞翻;下同。〉偓與仙芝約,斂兵不戰,許爲之奏官;鐐亦說仙芝許以如約。

 

 배악이 마침내 성문을 열고 왕선지와 황소의 무리들 30여 명을 끌어들여 성으로 들어오게 하고 술자리를 마련하고 많은 물건을 늘어놓고 뇌물로 이것을 주면서 표문으로 그 상황을 진술하였다. 여러 재상들이 대부분 말하였다.

 "선황께서는 방훈을 용서하지; 않다가 1년이 되자 끝내 그를 주살하였습니다. 지금 왕선지는 작은 도적이어서 방훈에게 비할 바가 안 되니 죄를 용서하고 관직을 재수하면 간귀한 자를 더욱 조장하는 것입니다."

 왕탁이 굳게 청하여 이를 허락하였는데, 마침내 좌신책군 압아 겸 감찰어사로 삼고 중사를 파견하여 고신을 가지고 기주에 가서 그에게 주었다.

 偓乃開城延仙芝及黃巢輩三十餘人入城,置酒,大陳貨賄以贈之,表陳其狀。諸宰相多言︰「先帝不赦龐勛,期年卒誅之。〈事見上卷咸通九年、十年。卒,子恤翻。〉今仙芝小賊,非龐勛之比,赦罪除官,益長姦宄。」〈長,知兩翻。〉王鐸固請,許之;乃以仙芝爲左神策軍押牙兼監察御史,遣中使以告身卽蘄州授之。

 

 왕선지가 이것을 얻고서 아주 기뻐하니 왕료와 배악은 모두 축하하엿다. 아직 물러나지 않았는데, 황소가 관직이 자기에게는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크게 화를 내어 말하였다.

 "시작할 때에는 함께 크게 맹세하였고, 천하를 가로질러 돌아다녔는데, 지금 홀로 관지;ㄱ을 얻어가지고 좌군에 부임한다면 이 5천여 무리들로 하여금 어디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인가?"

 仙芝得之甚喜,鐐、偓〈【嚴︰「偓」改「渥」。】〉皆賀。未退,黃巢以官不及己,大怒曰︰「始者共立大誓,橫行天下,今獨取官赴左軍,使此五千餘衆安所歸乎!」〈《考異》曰︰仙芝、巢初起時,云數月間衆至數萬。至此纔有五千者,蓋烏合之衆,聚散無常耳。〉

 

 이어서 왕선지를 구타하여 그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그 무리들은 떠들어 시끄러움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왕선지는 무리들이 화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명령을 받지 않고 기주를 크게 노략질하니,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반쯤 얻어맞고 반쯤은 죽었으며 그들의 집을 불태웠다.

 因毆仙芝,傷其首,〈毆,烏口翻。〉其衆諠譟不已。仙芝畏衆怒,遂不受命,大掠蘄州,城中之人,半驅半殺,焚其廬舍。

 

 배악은 악주로 달아나고, 칙사는 양주로 달아났으며, 왕료는 도적들에게 구금되었다. 도적들은 마침내 그 군대 3천여 명을 나누어 왕선지와 상군장을 좇게 하고 2천여 명은 황소를 좇게 하였는데, 각기 길을 나누어 갔다.

 偓奔鄂州,敕使奔襄州,〈敕使,授告身之中使也。〉鐐爲賊所拘。賊乃分其軍三千餘人從仙芝及尚君長,二千餘人從巢,各分道而去。〈《考異》曰︰王坤《驚聽錄》曰︰「乾符四年,丁酉,仲夏,天示彗星。草寇黃巢、尚君長奔突,卽五年戊戌之歲。狂寇王仙芝起自鄆、封,而侵汝、鄭,卽大寇黃巢、尚君長並賊帥之徒黨,僅一千餘人,攻陷汝州」云云。又曰︰「黃巢望閩、廣而去,仙芝指鄆州南行,尚君長期陳、蔡間。取羣凶之願,三千餘寇屬仙芝、君長,二千餘人屬黃巢所管。」明年,二月,仙芝陷鄂州,巢陷鄆州,則非巢趣閩、廣,仙芝趣鄆也。王坤此書,年月事迹差舛尤多,但擇其可信者取之。

 

《唐紀68 僖 乾符 4年》〈丁酉, 877年

 

 ②. 봄, 2월에 왕선지가 악주를 함락시켰다.

 ②. 王仙芝陷鄂州。

 

 ③. 황소가 운주를 함락시키고 절도사 설숭을 죽였다.

 ③. 黃巢陷鄆州,殺節度使薛崇。

 

 ⑥. 3월에 황소가 기주를 함락시켰다.

 ⑥. 三月,黃巢陷沂州。

 

 ⑮. 6월 21일에 왕선지와 황소가 송주를 공격하니, 삼도의 군사가 더불어 싸웠지만 승리하지 못하자 도적들은 드디어 송주에서 송위를 포위하였다.

 ⑮. 庚申,王仙芝、黃巢攻宋州,三道兵與戰,不利,〈三道兵,平盧、宣武、忠武也。〉賊遂圍宋威於宋州。甲寅,右威衞上將軍張自勉將忠武兵七千救宋州,殺賊二千餘人,賊解圍遁去。

 

 ...............하략.

 王鐸、盧攜欲使張自勉以所將兵受宋威節度,鄭畋以爲威與自勉已有疑忿,若在麾下,必爲所殺,不肯署奏。八月,辛未,鐸、攜訴於上,求罷免;庚辰,畋請歸滻川養疾;〈滻川在長安東。滻,音產。〉上皆不許。〈史言僖宗不能定國是。〉

 

 ⑯. 왕선지가 안주를 함락하였다.

 ⑯. 王仙芝陷安州。

 

 ⑱. 8월 11일(?)에 왕선지가 수주를 함락시키고 자사 최휴정을 붙잡았다. 산남동도절도사 이복이 그의 아들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수주를 구원해주게 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이복이 주문을 올려서 원병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니, 좌무위대장군 이창언을 파견하여 봉상에 속한 500기병을 거느리고 그곳에 가게 하였는데, 왕선지가 드디어 돌고 돌며 복과 영을 노략질하였다.

 ⑱. 乙卯,王仙芝陷隨州,執刺史崔休徵。山南東道節度使李福遣其子將兵救隨州,戰死。福奏求援兵,遣左武衞大將軍李昌言將鳳翔五百騎赴之,仙芝遂轉掠復、郢。

 

 충무대장 장관 등 4천 명이 선무의 군사와 더불어 양주를 원조하다가 신과 채 사이에 있는 샛길로 도망하여 들어갔고, 충무절도사 최안잠과 선무절도사 목인유에게 조서를 내려서 사람을 파견하여 단속하고 훈계하고서 돌아오게 하였다.

 忠武大將張貫等四千人與宣武兵援襄州,自申、蔡間道逃歸;〈間,古莧翻。〉詔忠武度使崔安潛、宣武節度使穆仁裕遣人約還。〈約還者,戒約將士,使還赴援也。

 

 ㉕. 황소가 광성을 함락시키고 드디어 복주를 함락시켰다.

 ㉕. 黃巢陷匡城,遂陷濮州。〈匡城縣,屬滑州,本漢長垣縣。宋白曰︰隋開皇於婦姑城置匡城縣,以縣南有故匡城爲名,卽孔子所畏之所。濮,博木翻。〉詔潁州刺史張自勉將諸道兵擊之。

 

《唐紀68 僖 乾符 5年》〈戊戌, 878年

 

 ⑥. 증원유가 주문을 올려서 '황매에서 왕선지를 대파하고 5만여 명을 죽였으며, 뒤좇아 가서 왕선지를 참수하여 그 수급을 전하며, 나머지 무리들은 흩어져갔다.' 고 하였다.

 황소가 바야흐로 박주를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하였는데, 상양이 왕선지의 남은 무리들을 인솔하고 그에게 돌아오고, 황소를 천거하여 주군으로 삼고, 이름을 충천대장군이라 하고, 연호를 왕패 라고 고쳤으며, 관속들을 임명하였다.

 ⑥. 曾元裕奏大破王仙芝於黃梅,〈黃梅縣,屬蘄州。宋白曰︰宋分江夏郡置南新蔡郡;隋開皇十八年,改爲黃梅縣,界內有黃梅山,因名。〉殺五萬餘人,追斬仙芝,傳首,餘黨散去。

黃巢方攻亳未下,尚讓帥仙芝餘衆歸之,〈帥,讀曰率。《考異》曰︰《實錄》︰「元裕奏大破仙芝於黃梅縣,殺戮五萬餘人;追至曹州南華縣,斬仙芝,傳首京師。」《舊紀》︰「二月,王仙芝餘黨攻江西,詔討使宋威出軍,屢敗之,仍宣詔書諭仙芝。仙芝致書於威,求節鉞,威僞許之。仙芝令其大將尚君長、蔡溫玉奉表入朝,威乃斬君長、溫玉以徇。仙芝怒,急攻洪州,陷其郛。宋威赴援,與賊戰,大敗之,殺仙芝,傳首京師。君長弟讓與黃巢大掠淮南。」《舊傳》曰︰「齊克讓爲兗州節度使,以本軍討仙芝,仙芝懼,引衆歷陳、許、襄、鄧,無少長,皆虜之,衆號三十萬。三年七月,陷江陵。又遣將徐唐莒陷洪州。時仙芝表請符節,不允,以宋威爲荊南節度招討使,楊復光爲監軍。復光遣判官吳彥宏諭以朝旨,釋罪,別加官爵。仙芝乃令尚君長、蔡溫玉、楚彥威相次詣闕請罪,且求恩命。時宋威害復光之功,並擒送闕,敕於狗脊嶺斬之。賊怒,悉精銳擊官軍,威軍大敗。復光收其餘衆以統之,朝廷以王鐸代爲招討。五年八月,收復荊州,斬仙芝首,獻于闕下。」《新傳》︰「黃巢自蘄州與王仙芝分其衆,尚君長入陳、蔡,巢北掠齊、魯,衆萬人,入鄆州,殺節度使薛崇,進陷沂州,由潁、蔡保查岈山,引兵復與仙芝合,圍宋州。會自勉救兵至,仙芝解而南渡漢,攻荊南,陷之,賊不能守。巢攻和州未克。仙芝自圍洪州,取之,使徐唐莒守,進破朗、岳,遂圍潭州,觀察使崔瑾拒卻之。乃向浙西,擾宣、潤,不能得所欲,身留江西,趣別部還入河南。帝詔崔安潛歸忠武,復起宋威、曾元裕,以招討使還之,而楊復光監軍。復光以詔諭賊。仙芝遣尚君長等詣闕請罪,又遺威書求節度。威陽許之,上言與君長戰,擒之。復光固言其降。命侍御史與中人卽訊,不能明,卒斬之。仙芝怒,還攻洪州,入其郛。威自將往救,敗仙芝於黃梅,斬五萬級,獲仙芝,傳首京師。當此時,巢方圍亳州未下,君長弟讓帥仙芝潰黨歸巢。」《新》、《舊傳》敍賊所經歷皆不同,又云「宋威殺仙芝」。今皆從《實錄》。〉推巢爲主,號衝天大將軍,改元王霸,〈《考異》曰︰《續寶運錄》︰「乾符元年,黃巢聚衆於會稽反,建元曰王霸元年。」《舊傳》︰「先是,尚君長弟讓以兄見誅,率衆入查牙山,黃巢、黃揆昆仲八人率盜數千依讓,月餘,衆至數萬,陷汝州,虜刺史王鐐,大掠關東,官軍加討,屢爲所敗,其衆十餘萬。尚讓乃與羣盜推巢爲王,曰衝天大將軍,仍署官屬,藩鎭不能制。」《新傳》曰︰「尚君長弟讓率仙芝潰黨歸巢,推巢爲王,號衝天大將軍,署拜官屬,驅河南、山南之民十餘萬,掠淮南,建元王霸。」今從之。〉署官屬。

 

 황소가 기주와 복주를 함락시켰다. 이미 그렇게 하고서 누차 관군에게 패배하자 마침내 천평절도사 장양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것을 주문을 올려 달라고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황소를 우위장군으로 삼고 운주로 가서 갑옷을 벗으라고 하였는데, 황소는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巢襲陷沂州、濮州。旣而屢爲官軍所敗,乃遺天平節度使張楊〈【章︰十二行本「楊」作「裼」;乙十一行本同;孔本同;熊校同。】〉書,〈敗,補邁翻。遺,于季翻。裼,先擊翻,又徒計翻。〉請奏之。詔以巢爲右衞將軍,令就鄆州解甲;巢竟不至。〈《考異》曰︰《舊傳》︰「及王仙芝敗,巢東攻亳州不下,乃襲破沂州據之,仙芝餘黨悉附焉。」《實錄》︰「巢自稱黃王,建元王霸,連爲王師所敗,詣天平乞降,除右衞將軍,復叛去,自是兵不能制。」《新傳》曰︰「曾元裕敗賊於申州,死者萬人。帝以宋威殺尚君長非是,且討賊無功,詔還青州,以元裕爲招討使,張自勉爲副。巢破考城,取濮州,元裕軍荊、襄,援兵阻,更拜自勉東北面行營招討使,督諸軍急捕巢。巢方掠襄邑、雍丘,詔滑州節度使李嶧壁原武。巢寇葉、陽翟,欲窺東都。會左神武大將軍劉景仁以兵五千援東都,河陽節度使鄭延休兵三千壁河陰。巢兵在江西者爲鎭海節度使高駢所破;寇新鄭、郟、襄城、陽翟者爲崔安潛逐走;在浙西者爲節度使裴璩斬二長,死者甚衆。巢大沮畏,乃詣天平軍乞降。詔授巢右衞將軍。巢度藩鎭不一,未足制己,卽叛去,轉寇浙東,執觀察使崔璆。」與《實錄》先後不同。今從《實錄》。〉

  

 

 ⑧. 3월에 여러 도작들이 낭주· 악주를 함락시켰다. 증원유는 형· 양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황소가 활주에서부터 송· 변을 침략하여 마침내 부사 장자면으로 동남면행영초토사에 충임하였다.

 ⑧. 三月,羣盜陷朗州、岳州。〈朝、岳相去五百五十里。〉曾〈【章︰十二行本「曾」上有「招討使」三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退齋校同。】〉元裕屯荊、襄,〈荊、襄相去三百四十里。〉黃巢自滑〈【章︰十二行本「滑」作「濮」;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州略宋、汴,〈滑州南至汴州二百一十里,汴州東至宋州三百五十里。〉乃以副使張自勉充東南面行營招討使。

 

 황소는 위남을 공격하고, 드디어 섭· 양적을 공격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하양의 군사 1천 명을 발동하여 동도로 가게 하고, 선무· 소의의 군사 2천 명과 더불어 같이 궁걸을 보위하게 하였고, 좌신무대장군 유경인을 동도응원방알사로 삼고 아울러 세 진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으며, 이어서 동도에서 군사 2천 명을 모집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유경인은 유창의 손자이다.

 黃巢攻衞南,〈隋置楚丘縣於古楚丘城,以曹有楚丘,改曰衞南,唐時屬滑州。〉遂攻葉、陽翟。詔發河陽兵千人赴東都,與宣武、昭義兵二千人共衞宮闕;〈衞東都宮闕也。〉以左神武大將軍劉景仁充東都應援防遏使,幷將三鎭兵,〈三鎭,河陽、宣武、昭義。〉仍聽於東都募兵二千人。景仁,昌之孫也。〈劉昌見《德宗紀》。〉

 

 또 증원유에게 조서를 내려서 군사를 거느리고 샛길로 동도로 돌아와서 의성의 군사 3천을 징발하여 환원· 이궐· 하음· 무뢰 북쪽 사수전을 지키게 하였다.

 又詔曾元裕將兵徑還東都,發義成兵三千守轘轅、伊闕、河陰、武牢。〈河南緱氏縣北有轘轅故關。伊闕縣北有伊闕故關。孟州汜水縣有虎牢關。唐避先諱,以「虎」爲「武」。

 

 ㉒. 황소가 선주를 노략질하니, 선흡간찰사 왕응이 이를 막았지만, 남릉에서 패했다. 황소는 선주를 공격하여 점령하지 못하자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절동을 공격하고 산길 700리를 열고 복건의 여러 주를 사납게 공격하였다.

 ㉒. 黃巢寇宣州,宣歙觀察使王凝拒之,敗於南陵。〈《九域志》︰南陵縣在宣州西一百五里。〉巢攻宣州不克,乃引兵攻浙東,開山路七百里,攻剽福建諸州。〈按《九域志》,自婺州至衢州界首一百九十里。衢州治所至建州七百五里。此路豈黃巢始開之邪!剽,匹妙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