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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無賢愚,莫不痛惜。(어리석은 사람이나 현명한 사람이나 모두 아파하고 애석해 하다)/小暑節中候蟋蟀居壁5日(陰6/7)乙丑

solpee 2021. 7. 15. 10:49

《唐紀68 僖 乾符 元年》〈甲午, 874年

 

 ①. 봄, 정월 27일에 한림학사 노휴가 말씀을 올렸다.

 ①. 春,正月,丁亥,翰林學士盧攜上言,〈上,時掌翻。〉以爲︰

 

 "폐하께서 처음으로 대보에 나아가셨는데, 의당 깊이 여원(黎元: 백성)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국가에 백성이 있는 것은 마치 초목에 뿌리가 있는 것과 같아서 마치 겨울과 가을에 북돋우고 물을 대주면 봄과 여름에 잘자라서 번영하는 것과 같습니다.

 「陛下初臨大寶,宜深念黎元。國家之有百姓,如草木之有根柢,〈柢,典禮翻,又丁計翻。〉若秋冬培漑,則春夏滋榮

 

 신이 가만히 보건대 관동은 지난해에 한재가 들어서 괵주에서부터 바다 있는 곳까지 보리가 겨우 반쯤 거두어졌으며, 가을걷이도 거의 없고 겨울채소도 아주 적어서 가난한 사람은 봉초의 열매를 빻아서 국수를 만들고 괴목 잎을 쌓아서 가루를 만들고 있지만 혹 더욱 쇠약하고 파리한 사람은 역시 거두어들이기가 어렵습니다.

 臣竊見關東去年旱災,自虢至海,〈自虢州東至于海也。〉麥纔半收,秋稼幾無,冬菜至少,貧者磑蓬實爲麪,蓄槐葉爲齏;或更衰羸,亦難收〈【章︰十二行本「收」作「采」;乙十一行本同;退齋校同。】〉拾。〈幾,居依翻。少,詩沼翻。磑,五對翻,䃺也。麪,眠見翻。齏,牋西翻。羸,倫爲翻。〉

 

 보통 정도의 해에는 곡식이 여물지 않으면 이웃의 경계로 흩어지지만 지금은 있는 곳마다 모두 기근이 들엇으니 의탁하여 몸을 맡길 곳이 없어서 앉아서 고향마을을 지키면서 구렁텅이에서 목숨이 다할 때를 기다리고 잇습니다.

 常年不稔,則散之鄰境;〈之,往也。〉今所在皆饑,無所依投,坐守鄕閭,待盡溝壑。

 

 그 가운데 남은 세금을 면제하여 주지만 실제로는 징수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주현에서는 상공과 삼사에 낼 돈을 가지고 독촉하는 것이 아주 심하여 움직였다 하면 회초리를 치지만, 비록 집을 헐고 나무를 자르며 처자식을 고용시켜 팔아도 단지 독촉하는 사람들의 주식비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고 아직은 부고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其蠲免餘稅,實無可徵;而州縣以有上供及三司錢,〈戶部、轉運、鹽鐵爲三司。〉督趣甚急,〈趣,讀曰促。〉動加捶撻,雖撤屋伐木,雇妻鬻子,止可供所由酒食之費,〈所由,謂催督租稅之吏卒。〉未得至於府庫也。

 

 혹 어떤 경우에는 조세 외에 또 다른 요역이 있는데, 조정에서 만약에 위무하여 살도록 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실제로 살 방도가 없습니다. 빌건대 주현에 칙령을 내리시어서 응당 내지 못하여 남은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모두 중지하고 잠사와 보리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고, 이어서 있는 곳에 의창을 열어서 빨리 진휼하여 공급하십시오.

 或租稅之外,更有他傜;朝廷儻不撫存,百姓實無生計。乞敕州縣,應所欠殘稅,並一切停徵,以俟蠶麥;仍發所在義倉,亟加賑給。〈太宗置義倉及常平倉以備凶荒,高宗以後,稍假義倉以給他費,至神龍中略盡。玄宗卽位復置之,安、史之亂復廢。至文宗大和九年,以天下回殘錢置常平義倉本錢,歲增市之以備賑給。〉

 

 봄이 깊어진 다음에 채소 잎과 나무의 싹이 있게 될 것이고 뽕나무의 오디가 이어주니 점차 먹을 것이 있게 될 것이지만, 지금 몇 달 동안이 더욱 군색하고 급하니, 이를 시행하는 것을 늦출 수 없습니다."

 칙서를 내려서 그 말을 좇게 하였으나 유사가 끝내 시행할 수가 없었으므로 다만 빈 글이었을 뿐이었다.

 至深春之後,有菜葉木牙,繼以桑椹,漸有可食;在今數月之間,尤爲窘急,行之不可稽援。」敕從其言,而有司竟不能行,徒爲空文而已。

 

 ⑥. 괵주자사 유첨을 형부상서로 삼았다. 유첨의 벼슬이 깎이면서 사람들 가운데 똑똒한 사람이건 어리석은 사람이건 관계없이 아파하고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⑥. 以虢州刺史劉瞻爲刑部尚書。瞻之貶也,〈懿宗咸通十二年瞻貶。〉人無賢愚,莫不痛惜

 

 그가 돌아오게 되자 장안에 있는 두 저자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내어 백희하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를 영접하였다. 유첨이 이 소식을 듣고 날짜를 바꾸어 다른 길로 들어왔다.

 及其還也,長安兩市人率錢雇百戲迎之。〈長安城中分東、西兩市。〉瞻聞之,改期,由他道而入。〈《考異》曰︰《玉泉子見聞錄》曰︰「初,瞻南遷,無問賢不肖,一口皆爲之痛惜。殆將至京,東西市豪俠共率泉帛,募集百戲,將逆於城外。瞻知之,差其期而易路焉。瞻爲相,亦無他才能,徒以路巖遭時嫉怒,瞻爲所排,而人心歸向耳,其實未足譚也。」按瞻以清愼著聞,及懿宗暴怒,瞻獨能不顧其身,救數百人之死,而《玉泉子》以爲未足談,不亦誣乎!

 

⑱上年少,〈少,詩沼翻。〉政在臣下,南牙、北司互相矛楯。自懿宗以來,奢侈日甚,用兵不息,賦斂愈急。〈斂,九贍翻。〉關東連年水旱,州縣不以實聞,上下相蒙,百姓流殍,〈流,散也。殍,餓殍。殍,音被表翻。〉無所控訴,相聚爲盜,所在蜂起。州縣兵少,加以承平日久,人不習戰,每與盜遇,官軍多敗。〈是後王仙芝、黃巢遂爲大盜。史先言唐末所以致盜之由。〉是歲,濮州人王仙芝始聚衆數千,起於長垣。〈滑州匡城縣,本後齊之長垣縣,開皇十六年改曰長城,是年又分韋城縣置長垣縣。《新志》︰匡城有長垣縣。宋朝以長垣縣屬開封府。《九域志》︰在府東北一百五里。《考異》曰︰《實錄》︰「二年,五月,仙芝反於長垣。」按《續寶運錄》︰「濮州賊王仙芝自稱天補平均大將軍、兼海內諸豪都統,傳檄諸道,」檄末稱「乾符二年正月三日」。則仙芝起必在二年前,今置於歲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