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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宗 붕어 懿宗 즉위/小暑節中候蟋蟀居壁1日(陰6/3)辛酉

solpee 2021. 7. 12. 05:15

《唐紀65 宣宗 大中 13年》〈己卯, 859年)

 

 ⑥. 애초에, 황상의 맏아들인 운왕 이온은 총애를 받지 못해 십육택(사가)에서 살았고,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금중에서 살았다. 기왕 이자는 셋째아들이고 황상은 그를 사랑하여 후사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그가 차례가 아니었으니, 그러므로 오래도록 동궁울 세우지 않았다.

 ⑥. 初,上長子鄆王溫,無寵,居十六宅,餘子皆居禁中。夔王滋,第三子也,上愛之,欲以爲嗣,爲其非次,〈爲其,于僞翻。〉故久不建東宮。

 

 황상은 의관인 이현백· 도사 우자지· 산인 왕락의 약을 먹고 종기가 등에 났다. 8월에 등창이 심하여 재상과 조정의 인사들은 모두 알현할 수 없었다. 황상은 은밀히 기왕을 추밀사인 왕귀장· 마공유· 선휘남원사 왕거방에게 ㅜ이촉하여 그를 세우도록 하였다. 세 사람과 우군중위 왕무현은 모두 황상이 두텁게 대해주었다.

 上餌醫官李玄伯、道士虞紫芝、山人王樂藥,疽發於背。八月,疽甚,宰相及朝士皆不得見。〈見,賢遍翻。〉上密以夔王屬樞密使王歸長、馬公儒、宣徽南院使王居方,使立之。〈屬,之欲翻。〉三人及右軍中尉王茂玄,皆上平日所厚也。

 

 다만 좌군중위 왕종실만 평소 마음을 같이 하지 않아서 세 사람은 서로 모의하고 왕종실을 내보내어 회남감군으로 삼았는데, 왕종실이 이미 선화문 밖에서 칙서를 받고 은대문에서 나가려고 할 때에 좌군부사 기원실이 왕종실에게 말하였다.

 "성스런 분께서 정사에 참여하지 않으신 지 한 달을 넘겼고, 중위께서는 다만 문을 사이에 두고 기거하는데, 오늘 바꾸어 제수하였지만 아직은 사실 여부를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어찌 성스런 분을 알현하지 않고서 나가십니까?"

 獨左軍中尉王宗實素不同心,三人相與謀,出宗實爲淮南監軍;宗實已受敕於宣化門外,將自銀臺門出,左軍副使亓元實〈《考異》曰︰或作「邢元實」。今從《東觀奏記》、《懿宗實錄》。开,苦堅翻。海陵本作「亓」渠之切,姓也。〉謂宗實曰︰「聖人不豫踰月,中尉止隔門起居;〈中尉,謂王宗實。〉今日除改,未可辨也。何不見聖人而出?」

 

 왕종실은 느껴서 깨닫고 다시 들어갔으나 여러 문은 이미 옛날의 사례를 따라 사람을 늘려서 지키면서 붙잡았다.

 기원실은 왕종실을 인도하여 곧바로 침전에 도착하였으나 황상은 이미 붕어(51)하여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들러싸고 울고 있었다. 왕종실이 왕귀장 등을 비난하고 조서를 사칭한 것을 나무랐는데, 모두 다리를 잡고 목숨을 구걸하였다.

 宗實感寤,復入,諸門已踵故事增人守捉矣。亓元寶翼導宗實直至寢殿,上已崩,〈年五十。〉東首環泣矣。〈首,式又翻。環,音宦。〉宗實叱歸長等,責以矯詔;皆捧足乞命。

 

 마침내 선휘북원사 제원간을 파견하여 운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8월 9일에 조서를 내려 운왕을 황태자로 세우고 권구당군국정사로 삼았으며 이어서 이름을 이최로 고쳤다. 왕귀장· 마공유· 왕거방을 체포하여 모두 죽였다. 10일에 유제를 밝히고 영호도를 섭총재로 하였다.

 乃遣宣徽北院使齊元簡迎鄆王。壬辰,下詔立鄆王爲皇太子,權句當軍國政事,仍更名漼。〈句,古候翻。當,丁浪翻。鄆,音運。更,工衡翻。漼,七罪翻。〉收歸長、公儒、居方,皆殺之。癸巳,宣遺制,以令狐綯攝冢宰。

 

 선종은 성격이 밝게 살피고 침착하였으며 결단력이 있었고, 법을 사용하는데 사사로이 하는 일이 없었고, 간하는 것을 좇는 것이 물흐르는 것과 같이 하였고, 관직과 상으로 내리는 것을 크게 아까워하고 공손하고 절약하며 검소하였고, 백성을 사랑하고 사물을 아꼈으니, 그러므로 대중 연간의 정치는 당이 망하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그것을 생각하고 읊조렸으며 선종을 작은 태종이라 하였다.

 宣宗性明察沈斷,〈沈,持林翻。斷,丁管翻。《考異》曰︰《續貞陵遺事》曰︰「越守嘗進女樂,有絕色者,上初悅之,數月,錫賚盈積。一旦晨興,忽不樂,曰︰『玄宗只一楊妃,天下至今未平,我豈敢忘!』乃召美人曰︰『應留汝不得。』左右或奏︰『可以放還。』上曰︰『放還我必思之,可命賜酒一盃。』」此太不近人情,恐譽之太過。今不取。〉用法無私從諫如流,重惜官賞,恭謹節儉,惠愛民物,故大中之政,訖於唐亡,人思詠之,謂之小太宗。〈衞嗣君之聰察,不足以延衞;唐宣宗之聰察,不足以延唐。〉

 

 13일에 위종의 즉위하였다. 20일에 황태후를 높혀 태황태후로 하였다. 왕종실을 표기상장군으로 삼았다. 이현백· 우자지· 왕락은 무두 엎어져 죽임을 당했다.

 丙申,懿宗卽位。癸卯,尊皇太后爲太皇太后。以王宗實爲驃騎上將軍。李玄伯、虞紫芝、王樂皆伏誅。〈《考異》曰︰《東觀奏記》︰「畢諴在翰林,上恩顧特異,許用爲相,深爲丞相令狐綯緩其入相之謀。諴思有以結綯,在北門求得絕色,非人世所有,盛飾珠翠,專使獻綯。綯一見之心動,謂其子曰︰『畢太原於吾無分,今以是餌吾,將傾吾家族也!』一見立返之。諴又瀝血輸啓事於綯,綯終不納,乃命邸貨之。東頭醫官李玄伯,上所狎昵者,以錢七十萬致於家,乃舍正堂坐之,玄伯夫妻執賤役以事焉。踰月,盡得其歡心矣,乃進于上。上一見惑之,寵冠六宮。玄伯燒伏火丹砂連進,以市恩澤,致上瘡疾,皆玄伯之罪也。懿宗卽位,玄伯與山人王岳、道士虞紫芝俱棄市。」今從《實錄》。

 

 ⑬. 사공· 문하시랑· 동평장사인 영호도는 정사를 잡고, 세월이 오래되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니 안팎이 곁눈질하였고, 그의 아들인 영호호는 자못 권세를 크게 부르고 뇌물을 받았다.

 ⑬. 司空、門下侍郎、同平章事令狐綯執政歲久,忌勝己者,中外側目,其子滈頗招權受賄。〈滈,湖老翻。〉

 

 선종이 이미 붕어하고 나자 일을 말하는 사람은 그의 단점을 다투어 공격하였는데, 12월 16일에 영호도를 동평장사로 삼아서 하중절도사에 충입하였다. 예전에 형남절도사· 동평장사였던 백민중을 수사도· 겸문하시랑·동평장사로 하였다.

 宣宗旣崩,言事者競攻其短,丁酉,以綯同平章事,充河中節度使。以前荊南節度使、同平章事白敏中守司徒、兼門下侍郎、同平章事。

 

 ⑭. 애초에, 위고가 서천에 있으면서 청계도를 열어서 여러 민족과 왕래하고 촉을 경유 하여 입공하도록 하였다. 또 여러 만족들의  자제를 뽑아 이들을 성도에 모으고 글과 숫자를 가르치고 위로하며 기쁘게 하여 그들을 羈縻(기미)하려고 하니 학업이 성취되면 보내고 다시 다른 자제로 뒤를 잇게 하였다.

 ⑭. 初,韋皋在西川,開青溪道以通羣蠻,〈青溪道卽清溪關路。〉使由蜀入貢。又選羣蠻子弟聚之成都,敎以書數,欲以慰悅羈縻之,業成則去,復以他子弟繼之。〈復,扶又翻。〉

 

 이와 같이 하기를 50년이 되니 여러 만족들의 자제로 거의 1천 명을 헤아렸으며 군부는 품급에 아주 싫증을 내었다. 또 만족들은 입공하게 하는 것은 하사물품을 이롭게 여긴 것이니 시종하는 겸인이 점점 많어졌는데 두종이 서천절도사가 되어 그 수를 줄이게 해달라고 주청하자, 조서를 내려 그 말을 쫓도록 하였다.

 如是五十年,羣蠻子弟學於成都者殆以千數,軍府頗厭於稟給。又,蠻使入貢,利於賜與,所從傔人浸多,〈傔,苦念翻。〉杜悰爲西川節度使,奏請節減其數,詔從之。

 

 南詔(남조:타이족 왕조)의 풍우는 화를 내고 그의 하동사자는 표문을 남겨 수주에 주고 돌아갔다. 또 배우고 익힌 자제들을 찾아내어 불손한 첩을 돌렸고, 이로부터 입공을 때맞추어 하지 않고 변경을 크게 어지럽혔다.

 南詔豐祐怒,其賀冬使者留表付巂州而還。又索習學子弟,移牒不遜,〈還,從宣翻,又如字;下同。索,山客翻。〉自是入貢不時,頗擾邊境。

 

 마침 선종이 붕어하자 중사를 파견하여 상을 알리니, 이 당시에 남종의 풍우는 바로 죽었고 그의 아들인 추륭이 섰는데, 화를 내며 말하였다.

 "우리나라 역시 상을 당하였으나 조정은 조문하고 제사 지내지 않았으며 또 조서는 마침내 예전의 왕에게 내려졌다."

 會宣宗崩,遣中使告哀,時南詔豐祐適卒,子酋龍立,〈酋,慈秋翻。〉怒曰︰「我國亦有喪,朝廷不弔祭。又詔書乃賜故王。」

 

 드디어 사자를 외관에 두고 예우하는 것이 아주 야박하였다. 사자는 돌아와서 갖춰서 상황을 보고하였다. 황상은 추룡이 사자를 보내어 상을 알리지 않고, 또 이름이 현종의 휘와 가까운 까닭에 드디어 책봉의 예절을 시행하지 않았다. 추룡은 마침내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국호를 대례라고 하였으며, 연호를 건극으로 고치고, 군사를 파견하여 파주(귀주 준의시)를 함락시켰다.

 遂置使者於外館,禮遇甚薄。使者還,具以狀聞。上以酋龍不遣使來告喪,又名近玄宗諱,〈龍字近玄宗諱。〉遂不行册禮。酋龍乃自稱皇帝,國號大禮,〈至今雲南國號大理。〉改元建極,遣兵陷播州。〈爲南詔攻蜀、攻交趾張本。《考異》曰︰《舊紀》、《實錄》今年皆無陷播州事,惟《新紀》有之。《實錄》︰「咸通六年三月,盧潘奏云︰大中十三年,南蠻陷播州。」《補國史》曰︰「雲南自大中初朝貢使及西川質子人數漸多,節度使奏請釐革減省,有詔許之,錄詔報雲南,雲南回牒不遜。」《新‧南詔傳》曰︰「朝貢歲至,從者多,杜悰自西川入朝,表無多內蠻慊。豐祐怒,卽慢言索質子。」蓋謂蠻子弟學成都者也。按杜悰以咸通二年十月入朝,而豐祐大中十三年已死,則建議減蠻傔者,必非悰入朝後事。《新傳》誤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