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文宗 死亡과 武宗의 승계/夏至節末候半夏生2日(陰5/23)辛亥

solpee 2021. 7. 2. 05:35

《唐紀62 文宗 開成 5年》〈庚申, 840年)

 

 ①. 봄, 정월 2일에 조서를 내려서 영왕 이전(목종의 5랑 당25세)을 세워서 황태제로 삼고 응군국사권영구당으로 하였다. 또 말하길, 태자 이성미의 나이가 아직은 어리고 사자(師資:《老子》曰︰善人者,不善人之師;不善人者,善人之資。)에 물들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진왕에 책봉해야 한다고 하였다.

 ①. 春,正月,己卯,詔立潁王瀍爲皇太弟,〈瀍,直連翻。〉應軍國事權令句當。〈句,古候翻。當,丁浪翻。〉且言太子成美年尚沖幼,未漸師資,〈漸,子廉翻。《老子》曰︰善人者,不善人之師;不善人者,善人之資。〉可復封陳王。

 

 이 당시에 황상은 병이 심해져서 지추밀인 유홍일과 설계릉에게 명령하여 양사복과 이각을 끌어들여 금중에 오게 하고 태자를 받들어 감국하게 하려고 하였다. 주위 구사량과 어홍지는 태자가 세워지면서 그 공로가 자기들에게 있지 않은 까닭에 마침내 태자가 어리고 또 병이 있다고 말하여서 다시 세우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時上疾甚,命知樞密劉弘逸、薛季稜引楊嗣復、李珏至禁中,欲奉太子監國。中尉仇士良、魚弘志以太子之立,功不在己,乃言太子幼,且有疾,更議所立。〈更,工衡翻。〉

 

 이각이 말하였다.

 "태자의 자리는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중도에 바뀔 수 있습니까?"

 구사량과 어홍지는 드디어 조서를 고쳐서 이전을 세워 태제로 삼은 것이다. 이날 구사량과 어홍지는 군사를 거느리고 16택에 갔고 영왕을 맞이하여 소양원에 도착하자 백관은 사현전에서 알현하였다. 이전은 침착하고 강인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기뻐하고 화내는 것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안왕 이용과 더불어 평소에 황상에게 후대를 받았으며 그 대우는 여러 왕보다는 달랐다.

 李珏曰︰「太子位已定,豈得中變!」士良、弘志遂矯詔立瀍爲太弟。〈《考異》曰︰《唐闕史》曰︰「武宗皇帝王夫人者,燕趙倡女也,武宗爲潁王,獲愛幸。文宗於十六宅西別建安王溶、潁王瀍院,上數幸其中,縱酒如家人禮。及文宗晏駕,後宮無子,所立敬宗男陳王,年幼且病,未任軍國事。中貴主禁掖者,以安王大行親弟,旣賢且長,遂起左、右神策軍及飛龍、羽林、驍騎數千衆,卽藩邸奉迎安王。中貴遙呼曰︰『迎大者!迎大者!』如是者數四,意以安王爲兄,卽大者也。及兵仗至二王宅首,兵士相語曰︰『奉命迎大者,不知安、潁孰爲大者?』王夫人竊聞之,擁髻褰裙走出,矯言曰︰『大者潁王也。大家左右以王魁梧頎長,皆呼爲大王,且與中尉有死生之契,汝曹或誤,必赤族矣!』時安王心云其次第合立,志少疑懦,懼未敢出。潁王神氣抑揚,隱于屛間,夫人自後聳出之。衆惑其語,遂扶上馬,戈甲霜擁,前至少陽院。諸中貴知已誤,無敢出言者,遂羅拜馬前,連呼萬歲。尋下詔,以潁王瀍立爲皇太弟,權句當軍國事。」《新‧后妃傳》曰︰「武宗賢妃王氏,開成末,王嗣帝位,妃陰爲助畫,故進號才人。」蓋亦取於《闕史》也。按立嗣大事,豈容繆誤!《闕史》難信,今不取,從《文宗》、《武宗實錄》。〉是日,士良、弘志將兵詣十六宅,迎潁王至少陽院,百官謁見於思賢殿。瀍沈毅有斷,喜慍不形於色。〈見,賢遍翻。沈,持林翻。斷,丁亂翻。慍,於問翻。〉與安王溶皆素爲上所厚,異於諸王。

 

 4일에 황상이 태화전에서 붕(33)하였다. 양사복을 섭총재로 하였다.

 6일에 구사량이 태제에게 유세하여 양현비· 안왕 이용· 진왕 이성미에게 죽음을 내리도록 하였다. 칙서를 내려 대행을 14일간 빈소에 두고 상복을 입도록 하였다. 간의대부 배이직이 기일이 너무 멀다고 말씀을 올렸으나 듣지 않았다.

 辛巳,上崩于太和殿。〈年三十三。〉以楊嗣復攝冢宰。

癸未,仇士良說太弟賜楊賢妃、安王溶、陳王成美死。〈說,式芮翻。《考異》曰︰《舊傳》曰︰「安王溶,穆宗第八子,母楊賢妃。武宗卽位,李德裕秉政。或告文宗崩時,楊嗣復以與賢妃宗家,欲立安王爲嗣,故王受禍,復貶官。」按是時德裕未入相。今從《武宗實錄》。〉敕大行以十四日殯,成服。〈《考異》曰︰《武宗實錄》︰裴夷直上言,「伏見二日敕,令有司以今月十四日攢斂成服。」按文宗以四日崩,豈得二日遽有此敕!必誤也。〉諫議大夫裴夷直上言期日太遠,不聽。

 

 이 당시에 구사량등은 문종에게 추가로 원한을 품고, 무릇 악공과 내시 가운데 문종에게 총애를 받았던 사람을 죽이거나 벼슬을 깎아내리기를 계속하였다. 매이직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번왕에서 대통을 이었으니 의당 걱정하는 가운데 의젓하게 하고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아 속히 상례를 시행하며 일찍 큰 정사를 논의하여 천하를 위로해야 합니다. 그러나 며칠도 되지 않아 선황의 가까운 신하들을 누차 죽여서 온나라의 시선과 청각을 놀라게 하고 선황의 신령을 다치게 하니 사람들이 마음으로 어찌 우러러보겠습니까!

 時仇士良等追怨文宗,〈以甘露之事也。〉凡樂工及內侍得幸於文宗者,誅貶相繼。夷直復上言︰「陛下自藩維繼統,是宜儼然在疚,〈《記‧檀弓》︰秦穆公弔公子重耳曰︰「儼然在憂服之中。」《詩》︰閔予小子,嬛嬛在疚。《註》︰疚,病也;在憂病之中。復,扶又翻。〉以哀慕爲心,速行喪禮,早議大政,以慰天下。而未及數日,屢誅戮先帝近臣,驚率土之視聽,傷先帝之神靈,人情何瞻!

 

 나라의 체통은 지극히 무거운데 만약 이런 무리에게 죄가 없다면 진실로 형벌을 내려선 아니 되고, 만약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저들은 이미 나라의 법망 안에 있고 달아나 숨을 곳이 없으니, 열흘이 지나고서 그것을 시행하여도 어찌 늦겠습니까!"

 듣지 않았다.

 國體至重,若使此輩無罪,固不可刑;若其有罪,彼已在天網之內,無所逃伏,旬日之外行之何晚!」不聽。

 

 14일에 문종의 대렴을 비로소 하였다. 무종이 즉위하였다. 17일에 황상의 어머니를 추존하여 황태후로 하였다.

 2월 8일에 천하를 사면하였다.

 19일에 위태후의 시호를 선의로 하였다.

 辛卯,文宗始大斂。〈大行十一日而始大斂,非禮也。斂,力贍翻。〉武宗卽位。甲午,追尊上母韋妃爲皇太后。

二月,乙卯,赦天下。

丙寅,諡韋太后曰宣懿。

 

 ⑥. 애초에, 황상이 선 것은 재상의 뜻이 아니었으니, 그러므로 양사복과 이각은 서로 이어서 파직되어 물러났고, 회남절도사 이덕유를 불러 경사에 들어와 조현하도록 하였는데, 9월 초하루에 경사에 도착하자, 4일에 이덕유를 문하시랑· 동평장사로 삼았다.

 7일에 이덕유가 들어가 감사해하고 황상에게 말하였다.

 ⑥. 初,上之立非宰相意,故楊嗣復、李珏相繼罷去,召淮南節度使李德裕入朝;九月,甲戌朔,至京師,丁丑,以德裕爲門下侍郎、同平章事。

庚辰,德裕入謝,言於上曰︰

 

 "잘 다스리는데 이르는 요체는 여러 신하들의 邪正을 분별하는데 있습니다. 무릇 邪와 正 두 가지는 형세로 보아 서로 용납하지 못하여, 올바른 사람은 삐뚤어진 사람을 가리켜서 사악하다고 하고, 삐뚤어진 사람 역시 올바른 사람을 가리켜서 사악하다고 하니, 인주는 그것을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致理之要,〈致理,猶言致治也。〉在於辯羣臣之邪正。夫邪正二者,勢不相容,正人指邪人爲邪,邪人亦指正人爲邪,人主辯之甚難

 

 신은 생각하건대 올바른 사람은 마치 소나무와 측백나무 같아서 다만 서서 의지하지 않으나 비뚤어진 사람은 등나무나 덩쿨같아서 다른 물건에 붙지 않으면 스스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사람은 한마음으로 주군을 섬기나 비뚤어진 사람은 다투어 붕당을 만듭니다.

 臣以爲正人如松柏,特立不倚;邪人如藤蘿,非附他物不能自起。故正人一心事君而邪人競爲朋黨

 

 선제께서는 붕당이 걱정거리라는 것을 깊이 알았지만 그러나 채용한 사람은 끝내 모두 붕당을 이룬 사람이었는데, 사실은 마음을 다잡은 것이 확정되지 않은데서 말미암았으니, 그러므로 간사한 사람이 틈을 타고서 들어온 것입니다. 무릇 재상은 사람마더 충성스럽고 진실할 수 없고 혹은 속이기도 하니, 주군의 마음은 비로소 의심하며 이에 가까이에서 小臣에게 물어서 정사를 담당하는 사람을 살폈습니다.

 先帝深知朋黨之患,然所用卒皆朋黨之人,〈卒,子恤翻。〉良由執心不定,故奸人得乘間而入也。〈間,古莧翻;下疑間同。〉夫宰相不能人人忠良,或爲欺罔,主心始疑;於是旁詢小臣以察執政

 

 예컨대 덕종 말년에 들어주고 일을 맡긴 사람들은 배연령과 같은 패거리이고, 재상은 칙서에 서명하였을 뿐이니, 이것이 정사가 날로 어지러워진 이유입니다.

 폐하께서 진실로 어진 인재를 신중히 가려서 재상으로 삼으시고 간사하게 속이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물리쳐 내쫓고 항상 정치적인 일은 모두 중서성에서 나오게 하고 마음을 미루어 일을 맡기며 굳게 결정하여 옮기지 않으면 천하의 사람들이 어찌 다스려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如德宗末年,所聽任者惟裴延齡輩,宰相署敕而已,此政事所以日亂也。陛下誠能愼擇賢才以爲宰相有奸罔者立黜去,〈去,羌呂翻。〉常令政事皆出中書,推心委任,堅定不移,則天下何憂不理哉!」

 

 또 말하였다.

 "선제께서는 대신에게 모습을 좋게 하고, 적은 허물은 모두 머금어 용서하고 말하지 않았는데, 날이 계속되고 달이 쌓여서 화로 실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일은 크게 그릇된 것이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경계로 삼으십시오! 신 등에게 죄가 있으면 폐하께서는 응당 대면하고 나무라야 합니다. 일을 하였는데 만약 실적이 없으면 분명하게 밝힐 수 있고, 만약에 그것에 실적이 있다면 말의 이치가 스스로 밝혀집니다.

 又曰︰「先帝於大臣好爲形迹,〈好,呼到翻。〉小過皆含容不言,日累月積,〈累,魯水翻。〉以至禍敗茲事大誤,願陛下以爲戒!臣等有罪,陛下當面詰之。〈詰,起吉翻。〉事苟無實,得以辯明;若其有實,辭理自窮。

 

 작은 허물이 있으면 그가 뉘우쳐 고치는 것을 허용하고 큰 죄면 그에게 죽이거나 멀리 내보내는 견책을 덧붙여 주는데, 이와 같이 한다면 주군과 신하 사이에는 의심하고 이간질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황상은 그 말을 가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小過則容其悛改,〈悛,丑緣翻。〉大罪則加之誅譴,如此,君臣之際無疑間矣。」上嘉納之。

 

 애초에, 이덕유가 회남에 있으면서 칙서를 내려서 감군 양흠의를 부르자, 사람들은 모두 반드시 지추밀이 될 것으로 말하였으나, 이덕유가 그를 대접하면서 특별한 예의를 덧붙이는 일이 없자,  양흠의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었다.

 初,德裕在淮南,敕召監軍楊欽義,人皆言必知樞密,德裕待之無加禮,欽義心銜之。

 

 어느 날 아침에 다만 양흠의를 끄어들여서 중당에 술자리를 만들어 인정과 예절을 지극히 후하게 하였는데, 진귀한 완구를 몇 개의 상 위에 펼쳐놓고 술자리가 끝나자 모두 그에게 증정하니, 양흠의는 크게 기뻐하였다. 가다가 변주에 도착하였는데 칙서를 내려 다시 회남으로 돌아가게 하니, 양흠의는 선물 받은 것을 모두 이덕유에게 돌려 보냈다.

 이덕유가 말하였다.

 "이것이 얼마나 값이 나가겠는가!"

 끝내 그것을 그에게 주었다. 그 후 양흠의는 끝내 지추밀이 되었으며 이덕유가 칼자루를 잡는 데는 양흠의가 자못 힘을 썼다.

 一旦,獨延欽義,置酒中堂,情禮極厚;陳珍玩數牀,罷酒,皆以贈之,欽義大喜過望。行至汴州,敕復還淮南,〈復,扶又翻。〉欽義盡以所餉歸之。德裕曰︰「此何直!」〈言此物所直能幾何也。〉卒以與之。〈卒,子恤翻。〉其後欽義竟知樞密;德裕柄用,欽義頗有力焉。〈史言李德裕亦不免由宦官以入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