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廉頗、李牧不能用也: 염파, 이목을 얻어도 쓸 줄 모른다./芒種節末候反舌無聲3日 (陰5/9)丁酉

solpee 2021. 6. 17. 17:01

《唐紀58 穆宗 長慶 4》〈甲辰, 824年〉

 

 ⑬. 황상이 조회할 떄마다 매번 늦었는데, 3월 19일에 해가 아주 높이 올랐어도 아직 자리에 앉지 안았으므로 백관들이 자신문 밖에서 줄지어 있었는데, 늙고 병든 사람들은 거의 쓰러져 넘어질 지경이었다. 간의대부 이발이 재상에게 말하였다.

 ⑬. 上視朝每晏,戊辰,日絕高尚未坐,百官班於紫宸門,老病者幾至僵踣。〈僵,居良翻。踣,蒲北翻。〉諫議大夫李渤白宰相曰︰

 

 "어제 상소를 논하면서 늦도록 앉아 계셨는데, 오늘 아침은  더욱 심하니, 청하건대 합문을 나가서 금오장에서 대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그렇게 하고 나서 반열에 앉았다가 물러났는데, 좌습유 유서초를 남겨서 홀로 남게 하고서 말씀을 올렸다.

 「昨日疏論坐晚,〈論上坐朝之晚也。〉今晨愈甚,請出閤待罪於金吾仗。」〈金吾左、右仗,在宣政殿前。〉旣坐班退,左拾遺劉栖楚獨留,進言曰︰

 

 "헌종과 선제께서는 모두 나이가 드신 주군이셨어도 사방에서 오히려 반란이 많았습니다. 폐하께서는 춘추가 넉넉하시며, 자리를 물려받으신 처음이라 마땅히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옷을 입고 잘 다스리는 방법을 찾으셔야 하며, 주무시는 것을 탐하고 여색을 즐기시며, 날마다 늦게야 바야흐로 일어나시고, 재궁이 빈전에 있는데, 북 치고 피리 불며 날마다 시끄럽게 하면 좋은 소문은 드러나지 않지만 나쁜 소리는 멀리 퍼지는 것입니다. 신은 복스러운 운수가 오래 가지 못할까 두려우니, 청하건대 머리에 단 옥을 계단에 깨뜨리고, 간하는 직을 헛되이 한 것을 사죄하고자 하옵니다."

 「憲宗及先帝皆長君,四方猶多叛亂。陛下富於春秋,嗣位之初,當宵衣求理;而嗜寢樂色,〈宵衣,未明而衣也。理,治也。樂,魚敎翻。〉日晏方起,梓宮在殯,鼓吹日喧,〈吹,尺僞翻。〉令聞未彰,〈聞,音問;下響聞同。〉惡聲遐布。臣恐福祚之不長,請碎首玉階以謝諫職之曠。」

 

 마침내 이마로 龍墀(용지: 황제가 있는 곳의마루바닥)에 조아리니, 피가 보였으나 그치지 않았고 그 소리가 밖까지 들렸다. 이봉길이 전언하여 말하였다.

 "유서초는 머리 조아리는 것을 그치고 나아가게 할지 그칠지의 결정을 기다려라!"

 유서초는 머리를 들어 올리고 일어나 다시 환관의 일을 논하자 황상이 잇달아 손을 휘두르며 나가도록 하게하였다. 유서초가 말하였다.

 遂以額叩龍墀,見血不已,響聞閤外。〈《考異》曰︰《實錄》曰︰「莊周云︰『爲善無近名,爲惡無近刑。』意者旣能爲近名之善,卽必忍爲近刑之惡。栖楚本王承宗小吏,果敢有聞,逢吉擢而用之,蓋取其鷹犬之效耳。夫諫諍之道,是豈能知之乎!卽如比干剖心,當文王與紂之事也。朱雲折檻,恐漢氏之爲新室也。時危事迫,不得不然,故忠臣有死諫之義。至如上年少嗜寢,坐朝稍晚,蓋宰臣密勿、諫臣封事而可止者也,豈在暴揚面數,激訐於羽儀之前,致使上疑死諫爲不難,謂細事皆當碎首,從此遂不覽章疏,卒有克明之難,實栖楚兆之。況諫辭皆羣黨所作,而使栖楚道之哉!賣前直而資後詐,殊可歎駭。」按李讓夷此論,豈非惡栖楚而強毀之邪!今所不取。〉李逢吉宣曰︰「劉栖楚休叩頭,俟進止!」〈程大昌曰︰奏劄言取進止,猶言此劄之或留或卻,合稟承可否也。唐中葉遂以處分爲進止,而不曉文義者習而不察,槪謂有旨爲進止。如《玉堂宣底》所載凡宣旨皆云有進止者,相承之誤也。〉栖楚捧首而起,更論宦官事,上連揮令出。栖楚曰︰

 

 "신의 말을 채용하지 않으신다면, 청컨대 이어서 죽게 하여 주십시오."

 우승유가 전언하여 말하였다.

 "아뢴 바를 알았으니 문 밖에서 받아들일지 그칠지의 결정을 기다려라!"

 유서초가 마침내 나와서 금오장에서 대죄하였고 이에 재상이 그의 말을 찬성하였다. 황상이 중사에게 명령하여 금오장에 가게하고, 이발과 아울러서 위로를 베풀며 돌아가도록 하게하였다.

 「不用臣言,請繼以死。」牛僧孺宣曰︰「所奏知,門外俟進止!」〈此宰相宣上旨也。言所奏知者,謂所奏之事,上已知之也。〉栖楚乃出,待罪於金吾仗,於是宰相贊成其言。上命中使就仗,幷李渤宣慰令歸。

 

 얼마 지나지 않아 유서초를 기거사인으로 삼고 이어서 緋服(붉은색 관복. 기거사인은 6품이고 관복은 4,5품 옷이다)을 하사하였다. 유서초는 병을 핑계로 벼슬을 받지 아니하고 동도로 돌아갔다.

 尋擢栖楚爲起居舍人,仍賜緋。栖楚辭疾不拜,歸東都

 

 ⑰.  점쟁이인 소현명은 염방공인 장소와 사이가 좋았는데, 소현명이 장소에게 말하였다.

 ⑰. 卜者蘇玄明與染坊供人張韶善,〈染坊供人,供役於染坊者也。陸德明曰︰染,如豔翻;劉而險翻。〉玄明謂韶曰︰

 

 "내가 그대를 위해 점을 쳐보았더니, 전좌에 오르게 되고 나와 함께 식사를 할 것이오. 지금 주상께서는 낮과 밤으로 격구하고 사냥하여 대부분 궁중에 있지 아니하니, 큰일을 도모하여 볼 수 있소."

 장소는 그렇다고 여기고, 마침내 소현명과 더불어 염공인 무뢰한 100여 명과 관계를 맺고, 17일에 자초를 실은 수레에 무기를 감추어 실어가지고 은대문으로 들어가 밤을 엿보아서 난을 일으키기로 모의하였다.

 「我爲子卜,〈爲,于僞翻。〉當升殿坐,與我共食。今主上晝夜毬獵,多不在宮中,大事可圖也。」韶以爲然,乃與玄明謀結染工無賴者百餘人,丙申,匿兵於紫草,車載以入銀臺門,〈《本草》曰︰紫草,出碭山山谷及楚地,今處處有之,人家園圃或種蒔。其根,所以染紫也。《爾雅》謂之藐,《廣雅》謂之茈䓞。苗似蘭香,節青,二月有花,紫白色,秋實,白,三月採根陰乾。以下文清思殿徵之,所入者左銀臺門也,在大明宮東面,又北則玄化門。〉伺夜作亂。

 

 아직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르지 않앗는데, 그것이 무겁게 실려 있는 것을 의심하여 이를 따지며 묻는 사람이 있자, 장소가 급하여 바로 따져 물은 사람을 살해하고 그의 무리들과 더불어서 의복을 바꾸어 입고 무기를 휘두르며 큰소리를 지르면서 금정으로 향하였다.

 未達所詣,有疑其重載而詰之者,〈載,才代翻。〉韶急,卽殺詰者,與其徒易服揮兵,大呼趣禁庭。

 

 황상이 이때에 청사전에서 격구를 하고 있었는데, 여러 환관들이 이를 보고 놀라서 급하게 들어와 문을 닫고, 달려가서 황상에게 아뢰었는데, 도적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과문을 찍고 들어왔다.

 이보다 먼저 우신책 중위 양수겸이 황상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매번 두 군대가 재주와 솜씨를 다투면 황상은 항상 우군을 도왔다. 이에 이르러 황상이 낭패하여 우군으로 행차하고자 하였는데,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였다.

 上時在清思殿擊毬,〈自左銀臺門西入,經太和殿至清思殿。清思殿之南則宣徽殿,北則珠鏡殿。〉諸宦者見之,驚駭,急入閉門,走白上;盜尋斬關而入。先是右神策中尉梁守謙有寵於上,每兩軍角伎藝,〈先,悉薦翻。伎,渠綺翻。〉上常佑右軍。至是,上狼狽欲幸右軍,左右曰︰

 

 "우군이 멀리 있어서 도적들을 만날까 두려우니, 좌군이 있는 가까운 곳으로 행차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황상이 이를 따랐다.

 좌신책 중위인 하중 사람 마존량은 황상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나가 맞이하며, 황상의 다리를 안고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스스로 황상을 업고 군대 안으로 들어가며 대장 강예전을 파견하여 기졸을 이끌고 궁 안으로 들어가 도적을 토벌하였다. 황상이 두 분의 태후가 동떨어진 것을 걱정하자 마존량은 다시 500기병으로 두 분의 태후를 맞아들여서 군대로 오도록 하였다.

 「右軍遠,恐遇盜,不若幸左軍近。」〈唐左神策軍、左羽林軍皆列屯東內苑,直左銀臺門東北角。〉上從之。左神策中尉河中馬存亮聞上至,走出迎,捧上足涕泣,自負上入軍中,遣大將康藝全將騎卒入宮討賊。〈將,卽亮翻。〉上憂二太后隔絕,〈二太后,太皇太后郭氏、上母太后王氏也。〉存亮復以五百騎迎二太后至軍。〈復,扶又翻。〉

 

 장소가 청사전에 올라 어탑에 앉아 소현명과 더불어 식사를 하며 말하였다.

 "과연 그대의 말처럼 되었소!"

 소현명이 놀라며 말하였다.

 "일을 여기서 그치는 것이오!"

 장소가 두려워서 달아났다. 마침 강예전이 우군병마사 상국충과 더불어 병사를 이끌고 와서 함께 이들을 쳤는데, 장소와 소현명 그리고 그의 무리들을 죽이니, 죽은 사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어지러웠다. 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정되고, 나머지 무리들이 오히려 금원 안에 흩어져 숨어 있었는데, 다음날(18) 모두 사로잡았다.

 張韶升清思殿,坐御榻,與蘇玄明同食,曰︰「果如子言!」玄明驚曰︰「事止此邪!」韶懼而走。會康藝全與右軍兵馬使尚國忠引兵至,合擊之,殺韶、玄明及其黨,死者狼藉。逮夜始定,餘黨猶散匿禁苑中;明日,悉擒獲之。

 

 당시에 궁궐의 문은 모두 닫혀있어서 황상은 좌군에서 묶었으며, 안팎에서는 황상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은 겁을 내며 두려워하였다. 18일에 황상이 궁으로 돌아오자 재상이 백관을 이끌고 연영문으로 나가 축하하였는데, 온 사람이 단지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時宮門皆閉,上宿於左軍,中外不知上所在,人情恇駭。〈恇,去王翻。〉丁酉,上還宮,宰相帥百官詣延英門賀,來者不過數十人。〈帥,讀曰率。〉

 

 도적들이 지나온 여러 문의  갑문환관 35명은 법으로는 사형에 해당되엇는데, 20일에 조서를 내려 나란히 그들에게 곤장을 치도록 하고, 이어서 맡긴 일을 고치게 하지 않았다. 23일에 양군에서 공을 세운 장사들에게 둗텁게 상을 내렸다.

 盜所歷諸門,監門宦者三十五人法當死;己亥,詔並杖之,仍不改職任。〈兩中尉及諸宦者右之也。〉壬寅,厚賞兩軍立功將士。

 

 ⑳. 황상은 왕정주가 우원익의 집을 도륙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재보가 재능이 없어 흉한 적으로 하여금 재멋대로 해치도록 하였다고 탄식하였다. 한림학사 위처후가 상소하였다.

 ⑳. 上聞王庭湊屠牛元翼家,歎宰輔非才,使凶賊縱暴。翰林學士韋處厚因上疏言︰

 

 "배도는 중하에서 공훈이 높고 명성이 밖의 이족에게도 퍼져 있는데, 만약 그를 巖廊(암랑: 깍아지른 암벽 회랑 즉 정부)에 세워놓고, 그가 참여하도록 하여 결정하는 일을 맡기면, 하북과 산동이 반드시 조정이 헤아리는 바를 물어보려 할 것입니다. 관중이 말하기를 '사람들과 떨어져서 이를 듣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서 이를 듣는 것은 곧 성스러운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裴度勳高中夏,聲播外夷,若置之巖廊,委其參決,河北、山東必稟朝算。〈夏,戶雅翻。朝,直遙翻。〉管仲曰︰『人離而聽之則愚,合而聽之則聖。』

 

 치란의 근본은 다른 술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따르게 하면 잘 다스려지고, 사람들을 어기면 어지러워집니다

 엎드려 이어받건대 폐하께서 식사를 하시면서도 탄식 하시기를 소하와 조참이 없는 것을 한하였으나, 지금은 배도가 있어도 오히려 머물 수 없게 하였으니, 이는 풍당이 '한 문제는 비록 염파와 이목을 얻었어도 그들을 쓸 수 없었음' 을 말한 까닭입니다.

 理亂之本,非有他術,順人則理,違人則亂。伏承陛下當食歎息,恨無蕭、曹,今有裴度尚不能留,此馮唐所以謂漢文得廉頗、李牧不能用也。〈事見十五卷漢文帝十四年。〉

 

 대저 재상을 보리시는 것은 마땅히 그에게 맡기고 그를 믿으며 그를 가깝게 하며 그를 예우하는 것이며, 일을 하면서 힘쓰지 않고, 나라에 공로가 없으면 곧 그를 한가로운 자리에 놓으시거나 그를 멀리 떨어진 군으로 내쫓는데, 이와 같이 한다면 자리에 있는 사람이 감히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장차 나아가려는 사람도 감히 억지로 요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夫御宰相,當委之,信之,親之,禮之,於事不效,於國無勞,則置之散寮,〈散,蘇但翻,宂散也。〉黜之遠郡,如此,則在位者不敢不厲,將進者不敢苟求。

 

 신은 이봉길과 더불어 원래 사사롭게 싫어하는 바가 없지마는 일찍이 배도가 허물이 없음에도 벼슬을 깎아내렸습니다. 지금 자세히 진술하는 것은 위로 성스럽고 밝으신 분에게 대답하는 것이며, 아래로 여러 사람들의 논의를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臣與逢吉素無私嫌,嘗爲裴度無辜貶官。〈憲宗時,韋處厚爲考功郎,韋貫之罷相,處厚坐與之善,出刺開州。〉今之所陳,上答聖明,下達羣議耳。」

 

 황상이 배도가 올린 주문을 보고 평장사가 없었으므로 위처후에게 물었다. 위처후는 이봉길이 밀어내며 막은 상황을 다 갖추어서 말하였다. 황상이 말하였다.

 "어찌 이런 데까지 이르렀는가!"

 이정은 역시 황상에게 배도에게 예우를 덧붙여주도록 권하였다. 18일에 배도에게 동평장사를 덧붙여 주었다.

  上見度奏狀無平章事,以問處厚。處厚具言李逢吉排沮之狀。上曰︰「何至是邪!」李程亦勸上加禮於度。丙申,加度同平章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