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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頸豈汝砥石邪!: 내 목이 너의 숫돌이냐!/芒種節中候鴡始鳴 2日(陰5/2)庚寅

solpee 2021. 6. 11. 14:34

《唐紀52 憲宗 元和 元》〈丙戌, 806年〉

 

 ④. 정월 19일에 상황이 흥경궁에서 붕어하였다.

 ④. 甲申,上皇崩于興慶宮。〈年四十六。〉

 

 

 ⑤. 유벽이 이미 旌節(정절: 절도사에게 내리는 정기와 부절)을 얻고 나자 뜻이 더욱 교만하여 三川(山川, 東川, 山南西道)도 함께 관장하기를 요구하였으나 황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유벽은 드디어 군사를 발동하여 동천절도사 이장을 제주에서 포위하고 같은 막료인 노문약을 동천절도사로 삼으려고 하였다. 추관인 보전 사람 임온이 유벽에게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힘써 간하자, 유벽은 화를 내고 형틀을 채워 감옥에 가두고 끌어내어 곧 그의 목을 베려고 하면서 몰래 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 죽이지는 않고 다만 그의 목에다 칼날을 자주 갈도록 하여 그를 굴복시켜서 풀어주려고 하였다.

 ⑤. 劉闢旣得旌節,〈去年以闢知西川節度,見上卷。〉志益驕,求兼領三川,上不許。闢遂發兵圍東川節度使李康於梓州,〈東川節度使,領梓、劍、綿、普、陵、榮、遂、合、渝、瀘等州,治梓州。梓州,漢郪縣地,劉禪置東廣漢郡。梁武陵王紀置新州,隋爲梓州。《舊志》︰梓州至京師二千九十里。宋白曰︰梓州,取梓潼江爲名。〉欲以同幕盧文若爲東川節度使。推官莆田林蘊力諫闢舉兵,〈武德五年,分南安置莆田縣,時屬泉州。《風俗通》曰︰林姓,林放之後。孫愐曰︰周平王次子林開之後。魯有林放、林雍,齊有林元。〉闢怒,械繫於獄,引出,將斬之,陰戒行刑者使不殺,但數礪刃於其頸,〈數,所角翻。〉欲使屈服而赦之。

 

 임온이 그를 질책하며 말하였다.

 "이 녀석아!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한다면 즉시 벨 것이지 내 목이 어찌 너의 숫돌이냐?"

 유벽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진정한 충성스러운 열사이다!"

 마침내 쫓아 내보내어 당창현 현위로 삼았다. 황상이 유벽을 토벌하려고 하였으나 군대를 사용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고 공경들이 논의한 것도 역시 촉은 험준하고 굳건하여 빼앗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는데, 두황상이 홀로 말하였다.

 蘊叱之曰︰「豎子,當斬卽斬,我頸豈汝砥石邪!」闢顧左右曰︰「眞忠烈之士也!」乃黜爲唐昌尉。〈儀鳳元年,分九隴、導江、郫,置唐昌縣,屬彭州。《九域志》︰在州西二十八里。〉

上欲討闢而重於用兵,〈謂以用兵爲重事,不敢輕試也。〉公卿議者亦以爲蜀險固難取,杜黃裳獨曰︰

 

 유벽은 미치고 경망스러운 서생이니 이를 빼앗는 것은 티끌을 줍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신은 신채군사 고숭문의 용맹과 지략이 쓸 만한 것임을 알고 있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군사적인 일을 오로지 그에게 맡기고 감군을 두지 않는다면 유벽은 반드시 사로 잡힐 것입니다."

 황상은 그의 의견을 좇았다.

 「闢狂戇書生,〈戇,竹巷翻。〉取之如拾芥耳!臣知神策軍使高崇文勇略可用,願陛下專以軍事委之,勿置監軍,闢必可擒。」上從之。

 

 한림학사인 이길보 역시 황상에게 촉을 토벌하기를 권하자, 황상은 이로 말미암아 그를 그릇으로 여겼다. 23일에 좌신책행영절도사 고숭문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5천을 거느리고 선봉군이 되도록 하고 신책경서행영병마사 이원혁은 보병과 기병 2천을 거느리고 차군이 되고, 산남서도절도사 엄려와 더불어 유벽을 함께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 당시에 오래된 장수 가운데 명성과 지위가 평소 무거운 사람이 매우 많았고, 모두 촉 정벌 선발에 적당하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고숭문을 채용하자 모두 크게 놀랐다.

 翰林學士李吉甫亦勸上討蜀,上由是器之。〈器,所以適用;器之者,知其可用。〉戊子,命左神策行營節度使高崇文將步騎五千爲前軍,〈《考異》曰︰《實錄》云「爲左軍」。按有左必有右,而云李元奕爲次軍,則崇文必前軍也。〉神策京西行營兵馬使李元奕將步騎二千爲次軍,與山南西道節度使嚴礪同討闢。時宿將名位素重者甚衆,皆自謂當征蜀之選;及詔用崇文,皆大驚。〈高崇文雖不足以望韓信,而亦能動時人之驚者,所居之地然也。〉

 

 황상이 두황상과 더불어 논의하면서 이야기가  번진 문제에 이르자, 두황상이 말하였다.

 "덕종은 우환을 거친 후부터 억지로 편안하기에 힘을 써서 살아있으면 절도사의 벼슬에서 제거하지 않았고 죽은 사람이 있으면 먼저 중사를 파견하여 군대 안의 사정이 더불어 하는 사람을 살펴서 그것을 제수하였습니다. 중사 중에는 혹 사사로이 대장에게 뇌물을 받고 돌아와서 그를 칭찬하면 즉시 모월을 내리니 일찍이 조정의 뜻을 가지고 내보낸 적이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반드시 기강을 떨쳐 드러내고 싶으시면 의당 법도를 가지고서 조금씩 번진을 통제하셔야 천하를 얻어서 다스릴 수 있습니다."

 上與杜黃裳論及藩鎭,黃裳曰︰「德宗自經憂患,務爲姑息,不生除節帥;〈帥,所類翻。〉有物故者,先遣中使察軍情所與則授之。中使或私受大將賂,歸而譽之,〈譽,音余。〉卽降旄鉞,未嘗有出朝廷之意者。陛下必欲振舉綱紀,宜稍以法度裁制藩鎭,則天下可得而理也。」

 

 황상은 그럴 것으로 깊이 여기고 이에 군사를 사용하여 촉을 토벌하기 시작하여 그 위엄이 양하에서 시행되기에 이르렀는데 모두 두황상이 이를 계발한 것이다.

 上深以爲然,於是始用兵討蜀,以至威行兩河,皆黃裳啓之也。〈史言杜黃裳開憲宗削平藩鎭之略,其功不在裴度下。〉

 

 고숭문은 장무성에 주둔하여 군사 5천을 훈련시키고 항상 도적이 도착한 것처럼 하였으며, 묘시에 조서를 받으면 진시에 즉시 시행하고, 병장기와 양식은 하나도 모자란 것이 없게 하였다.

 高崇文屯長武城,練卒五千,常如寇至,卯時受詔,辰時卽行,器械糗糧,〈糗,去久翻。熬米麥爲糗。〉一無所闕。

 

 29일에 고숭문은 차욕으로 나가고 이원혁은 낙곡으로 나와 똑같이 재주로 향하였다. 고숭문의 군대는 흥원에 이르러서 군사들이 여관에서 식사를 하면서 다른 사람의 수저를 부러뜨린 사람이 있었는데, 고숭문은 그의 목을 베어 두루 보였다.

 甲午,崇文出斜谷,〈斜,昌遮翻。谷,音浴,又如字。〉李元奕出駱谷,同趣梓州。崇文軍至興元,軍士有食於逆旅,折人匕筯者,崇文斬之以徇。〈折,而設翻。〉

 

 유벽은 재주를 함락하고 이강을 잡았다. 2월에 엄려는 검주를 점령하고 검주자사 문덕소의 머리를 베었다.

 劉闢陷梓州,執李康。二月,嚴礪拔劍州,斬其刺史文德昭。〈嚴礪先拔劍州,故高崇文因以鼓行入蜀,礪之功爲不可揜矣。宋白曰︰劍州,漢廣漢之梓潼縣。《華陽國志》云︰諸葛亮相蜀,鑿石架空,爲飛閣以通蜀、漢。晉以其地入梓潼郡,梁爲安州。西魏伐蜀,先下安州,因克成都,改安州爲始州,唐先天二年改爲劍州。《舊志》︰劍州至京師一千六百六十二里。〉

 

 

 ⑧. 2월 24일에 황상은 재상과 더불어 논의하였다.

 '에전부터 제왕들은 혹 정사에 부지런히 힘을 쓰기도 하였고 혹 단정히 두 손을 마주잡고 한 일이 없기도 하였는데, 서로 간에 득실이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⑧. 戊午,上與宰相論「自古帝王,或勤勞庶政,或端拱無爲,互有得失,何爲而可?」

 

 두황상이 대답하였다.

 "제왕이란 위로는 천지와 종묘를 잇고 아래오는 백성과 사방에 있는 오랑캐를 어루만지며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걱정하고 부지런히 하니 본래 스스로 여가를 가지고 스스로 즐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하에는 구별이 있고 기강에는 순서가 있으니, 만약 천하의 현명한 인재를 신중히 뽑아서 그에게 일을 맡기고 공로를 세우면 상을 내리고 죄가 있으면 형벌을 내리며, 뽑고 채용하는 것은 공적으로 하고 상을 내리거나 형벌을 주는 것은 신용을 가지고서 하면 누가 힘을 다하지 않겠으며 어찌 구한 것을 얻지 못하겠습니까?"

 杜黃裳對曰︰「王者上承天地宗廟,下撫百姓四夷,夙夜憂勤,固不可自暇自逸。然上下有分,〈分,扶問翻。〉紀綱有敍;苟愼選天下賢材而委任之,有功則賞,有罪則刑,選用以公,賞刑以信,則誰不盡力,何求不獲哉!

 

 명주는 사람을 찾는데 힘을 들이고서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에서 즐기니 이것은 우순이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으면서 잘 다스려질 수 있엇던 까닭이었습니다.' 감옥과 시장의 번거롭고 작은 일에 이르러서는 각기 유사가 있으니 주군이 가까이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明主勞於求人而逸於任人,此虞舜所以能無爲而治者也。〈孔子曰︰「無爲而治者,其舜也歟!」治,直夷翻。〉至於〈【章︰十二行本「於」下有「簿書」二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退齋校同。】〉 獄市煩細之事,各有司存,非人主所宜親也。

 

 에전에 진 시황은 저울을 가지고서 서책을 헤아렸고(日勤書冊120瑾), 魏의 明帝(曹睿)는 스스로 상서가 할 일을 살펴서 행하였으며, 隋의 文帝는 위사가 밥을 날랏는데, 모두 당시에 보탬이 되는 일도 없었으며 나중에는 비난을 얻었으니, 그의 눈과 귀 그리고 몸과 마음을 부지런하고 또 힘을 들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힘을 쓴 것이 그 正道가 아니었습니다.

 昔秦始皇以衡石程書,〈《史記》盧生曰︰「始皇天性剛戾,天下之事無小大皆決於主上,至以衡石程書,日夜有程,不中程者不得休息。」〉魏明帝自按行尚書事,〈見七十二卷太和六年。行,下孟翻。〉隋文帝衞士傳餐,〈事見一百九十三卷太宗貞觀四年。〉皆無補於當時,取譏於後來,其耳目形神非不勤且勞也,所務非其道也。

 

 무릇 인주는 정성으로 미루어 나가지 않을까를 걱정하고 신하는 충성을 다하지 못할까를 근심합니다. 만약 위사람이 그의 아랫사람을 의심하고 아랫사람이 그의 윗사람을 속이면서 장차 다스려지기를 원한다면 역시 어렵지 않겠습니까!"

 황상은 깊이 그 말을 그럴 것으로 여겼다.

 夫人主患不推誠,人臣患不竭忠。苟上疑其下,下欺其上,將以求理,〈理,治也。〉不亦難乎!」上深然其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