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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 탈환과 서경입성/小滿節(04:37)初候苦菜秀1日(4/10)己巳

solpee 2021. 5. 21. 15:52

《唐紀36 肅宗 志德 2載》〈丁酉, 757年〉

 

 

 ⑦. 윤자기가 오래도록 수양을 포기하자 성안에 먹을 것이 다 없어지니, 성을 버리고 동쪽으로 달아날 것을 논의하였는데, 장순과 허원이 모의하고 말하였다.

 "수양은 강과 회를 막고 보전하는 곳인데, 만약 그곳을 버리고 떠나면 역적이 반드시 이긴 기세를 타고 멀리까지 달려올 것이니, 이는 강과 회를 없애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굶주리고 파리하여 달아난다 해도 반드시 도달하지 못합니다. 예전에 전국시대의 제후들은 서로 구원하고 어루만지는 것을 숭상하였는데 하물며 가까이에 있는 제장들인 경우에서야 굳게 지켜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⑦. 尹子奇久圍睢陽,城中食盡,議棄城東走,張巡、許遠謀,以爲︰「睢陽,江、淮之保障,若棄之去,賊必乘勝長驅,是無江、淮也。〈《考異》曰︰唐人皆以全江、淮爲巡、遠功。按睢陽雖當江、淮之路,城旣被圍,賊若欲取江、淮,繞出其外,睢陽豈能障之哉!蓋巡善用兵,賊畏巡爲後患,不滅巡則不敢越過其南耳。〉且我衆飢羸,走必不達。古者戰國諸侯,尚相救恤,〈謂春秋列國,同盟有急則相救恤也。〉況密邇羣帥乎!〈羣帥,謂張鎬、尚衡、許叔冀等。帥,所類翻。〉不如堅守以待之。」

 

 찻잎과 종이가 다 없어지자 드디어 말을 잡아 먹었고 말이 다 떨어지자 그물을 쳐서 참새를 잡고 쥐를 파내었으며 참새와 쥐가 또 없어지니 장순은 애첩을 내보내 죽여서 병사들을 먹이고 허원 역시 그의 노복을 죽였는데, 그런 후에 성 안에 있는 부녀자를 잡아 묶어서 병사에게 먹이고 남자 가운데 노약자를 가지고 계속하였다. 사람들은 반드시 죽어야 될 것을 알았지만 배반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남아 있는 사람은 겨우 400명이었다.

 茶紙旣盡,遂食馬;馬盡,羅雀掘鼠;雀鼠又盡,巡出愛妾,殺以食士,〈食,祥吏翻。〉遠亦殺其奴;然後括城中婦人食之,〈【章︰十二行本「之」下有「旣盡」二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退齋校同。】〉繼以男子老弱。人知必死,莫有叛者,所餘纔四百人。

 

 10월 9일에 역적이 성에 오르자 장사는 병이 들어 싸울 수 없었다. 장순은 서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말하였다.

 "신의 힘이 다되어 성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살아서 이미 폐하께 보답할 방법이 없지만 죽어서 응당 악독한 귀신이 되어 역적을 죽이겠습니다."

 성이 드디어 함락되고 장순과 허원은 함께 붙잡혔다. 윤자기가 장순에게 물었다.

 "듣건대 그대는 싸울 때마다 눈가가 찢어지고 이빨이 부서진다고 하는데, 왜 그런가?"

 장순이 말하였다.

 "나는 역적을 삼키는데 뜻을 두었으나, 다만 힘으로 할 수 없었을 뿐이다."

 윤자기는 칼로 장순의 입을 벌리고 살펴보니 남아있는 것이 겨우 서너 개였다. 윤자기는 그의 소행을 의롭게 여기고 그를 살려주려고 하였다. 그의 무리가 말하였다.

 癸丑,賊登城,將士病,不能戰。巡西向再拜曰︰「臣力竭矣,不能全城,生旣無以報陛下,死當爲厲鬼以殺賊!」〈鬼無所歸者爲厲。〉城遂陷,巡、遠俱被執。尹子奇問巡曰︰「聞君每戰眥裂齒碎,何也?」〈眥,疾智翻,又才詣也,目眥也。〉巡曰︰「吾志吞逆賊,但力不能耳。」子奇以刀抉其口視之,〈抉,一決翻。〉所餘纔三四。子奇義其所爲,欲活之。其徒曰︰

 

 "그는 절개를 지키는 사람이니 끝내 쓸모가 되지 않습니다. 또 병사이 마음을 얻고 있으니 그를 살리면 장차 후일의 걱정거리가 됩니다."

 마침내 남제운과 뇌만춘 등 36명과 함께 이들을 모두 목베었다. 장순으 또 죽으면서 안색이 어지럽지 않았으며 의기양양하기를 평상시와 같았다. 허원을 산 채로 낙양으로 보냈다.

 「彼守節者也,終不爲用。且得士心,存之,將爲後患。」乃幷南霽雲、雷萬春等三十六人皆斬之。〈《考異》曰︰《新傳》曰︰「虢王巨之走臨淮,巡有妹嫁陸氏,遮巨勸勿行;不納。賜百縑,弗受。爲巡補縫行間,軍中號陸家姑。先巡被害。」按巨在彭城,若走臨淮,陸姊在睢陽城,何以得遮之!今不取。〉巡且死,顏色不亂,揚揚如常。生致許遠於洛陽。

 

 장순이 애초에 수양을 지킬 때어 병사는 겨우 1만 명이었고 성 안에 거주하는 사람 역시 수만이었는데, 장순은 한 번 보고 성명을 물으면 그 후에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앞뒤로 크고 작게 싸운 것이 무릇 400여 번이었고 역적의 병졸 12만 명을 죽었다. 장순은 군사를 움직이면서 옛날의 법을 따르지 않고 전투하는 진법을 가르쳤고, 본부의 장수들로 하여금 각기 그 뜻을 가지고서 군사들을 가르치도록 시켰다.

 巡初守睢陽時,卒僅萬人,城中居人亦且數萬,巡一見問姓名,其後無不識者。前後大小戰凡四百餘,殺賊卒十二萬人。巡行兵不依古法,敎戰陳,令本將各以其意敎之。〈本將,謂本部之將。陳,讀曰陣。〉

 

 사람들이 혹 그 이유를 물으면 장순이 말하였다.

 "지금 호족오랑캐와 더불어 싸우는데 구름처럼 합쳐지고 새처럼 흩어져서 바뀌는 형상이 일정하지 않아 몇 발자국 가는 사이에도 형세에 차이가 있다. 그 시기에 맞추어 신속히 대응하는 것은 숨을 쉬고 들이마시는 사이에 있는데, 움직이면서 대장에게 물으면 일이 서로 미치지 못하니, 전투의 변화를 아는 사람은 아니다.

] 人或問其故,巡曰︰「今與胡虜戰,雲合鳥散,變態不恆,數步之間,勢有同異。臨機應猝,在於呼吸之間,而動詢大將,事不相及,非知兵之變者也。

 

 그러므로 나는 병사들로 하여금 장수의 뜻을 알도록 하고 장수로 하여금 병사의 마음을 분별하도록 시키는데 그들을 투입하여 가게 하는 것은 손으로 가리키는 것처럼 한다. 병사와 장수가 서로 익숙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전투를 하니 역시 옳지 않은가!"

 故吾使兵識將意,將識士情,投之而往,如手之使指。兵將相習,人自爲戰,不亦可乎!」

 

 군사를 일으킨 후부터 기계와 갑옷과 병장기는 모두 적에게서 빼앗았지 스스로 만든 적은 없었다. 전투 때마다 장사들은 물러나서 흩어지기도 하였으나 장순은 싸우는 곳에 서서 장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겠으니 너희는 나를 위하여 돌아와서 그들과 결전하라."

 自興兵,器械、甲仗皆取之於敵,未嘗自脩。每戰,將士或退散,巡立於戰所,謂將士曰︰「我不離此,〈離,力智翻。〉汝爲我還決之。」

 

 장사들 가운데 감히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죽을 듯이 싸워서 끝내 적을 격파하였다. 또 정성으로 사람을 대우하여 의심하고 감추는 것이 없었으며 적을 만나서는 변화에 따랐고 기묘한 계책을 내는데 끝이 없었으며, 호령을 분명하게 하고 상을 내리고 벌을 주기를 미덥게 하였으며 무리와 더불어 기쁨과 괴로움 그리고 추위와 더위를 함께하였으니, 그러므로 아랫사람들은 다투어 죽는 함을 다하였다.

 將士莫敢不還,死戰,卒破敵。〈爲,于僞翻。卒,子恤翻。〉又推誠待人,無所疑隱;臨敵應變,出奇無窮;號令明,賞罰信,與衆共甘苦寒暑,故下爭致死力。

 

 장호는 수양이 포위도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는 속도를 두 배로 하여 빨리 전진하였고, 절동· 절서· 회남·북해의 여러 절도사와 초군 태수 여구호에게 격문을 돌려 함께 수양을 구원하도록 하였다. 여구호는 평소 거만하고 사나워서 장호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 장호가 도착할 즈음에 수양성이 이미 피탈된지 사흘이었다. 장호는 여구호를 불러 매를 쳐서 죽였다.

 張鎬聞睢陽圍急,倍道亟進,〈張鎬代賀蘭進明,見上卷八月。〉檄浙東、浙西、淮南、北海諸節度〈按《新書‧方鎭表》,浙東、浙西明年方置節度使。時崔渙在浙東,李希言在浙西,皆非節度使。淮南則李成式,北海尚爲賊將能元皓所據。然去年已置北海節度使,是雖未復北海而已置北海帥矣。〉及譙郡太守閭丘曉,使共救之。曉素傲很,不受鎬命。比鎬至,〈比,必利翻,及也。〉睢陽城已陷三日。鎬召曉,杖殺之。〈《考異》曰︰《舊傳》作「豪州刺史」,《新傳》作「濠州刺史」,《統紀》作「亳州刺史」。按濠州在淮南,去睢陽遠。亳州與睢陽接境,必亳州也。今從《統紀》。余按《通鑑》改《統紀》之亳州爲譙郡,以此時未復郡爲州也。讀者宜知之。

 

 ⑨. 성도에서 사자가 돌아왔는데 상황이 고서에서 말하였다.

 "응당 나에게 검남도 하나를 주면 스스로 봉양을 받으며 살겠으니 다시 오지 마라."

 황상은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뒤에 갔던 사자가 도착하여 말하였다.

 ⑨. 成都使還,〈此還者,啖庭瑤也。還,音旋。〉上皇誥曰︰「當與我劍南一道自奉,不復來矣。」〈復,扶又翻;下嗣復同。〉上憂懼,不知所爲。〈【章︰十二行本「爲」下有「數日」二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後使者至,〈此奉羣臣賀表中使繼還也。〉言︰

 

 "상황은 애초에 황상께서 동궁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는 표문을 받고, 방황하여 먹지를 못하고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의 표문이 도착하자 마침내 크게 기뻐하고 식사를 하고 음악을 만들도록 시켰으며 고서를 내려서 가는 날을 정하도록 하였습니다."

 「上皇初得上請歸東宮表,彷徨不能食,欲不歸;及羣臣表至,乃大喜,命食作樂,下誥定行日。」〈定東行歸京之日也。〉

 

 황상은 이필을 불러 그것을 알리며 말하였다.

 "다 경의 힘이오!"

 이필이 산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황상이 굳세게 그를 머무르게 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자 마침내 형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군현에 칙서를 내려 그를 위하여 산 속에 집을 짓도록 하고 3품의 급료를 주도록 하였다.

 上召李泌告之曰︰「皆卿力也!」

泌求歸山不已,上固留之,不能得,乃聽歸衡山。〈衡山在衡陽郡衡山縣西三十里,南嶽也。漢武帝以霍山爲南嶽,隋文旁以衡山爲南嶽。按《泌傳》,泌願隱衡山,詔聽之。〉敕郡縣爲之築室於山中,〈爲,于僞翻。〉給三品料。

 

 ⑫. 22일에 황상은 망현궁에 도착하여 동경에서 승리하였다는 주문을 받았다. 23일에 황상이 서경에 들어갔다. 백성은 국문을 나가 받들어 영접하였는데 20리가 끊이지 않았고 춤을 추고 뛰며 만세를 불렀으며 우는 사람도 있었다.

 ⑫. 丙寅,上至望賢宮,〈《雍錄》︰望賢宮在咸陽縣東數里。〉得東京捷奏。丁卯,上入西京。百姓出國門奉迎,二十里不絕,舞躍呼萬歲,有泣者。

 

 황상은 들어가 대명궁에 머물렀다. 어사중승 최기는 백관 중에서 역적에게 관직과 작위를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두건을 벗고 버선발로 함원전 앞에 서도록 하고, 가슴을 치고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받기를 청하도록 시켰으며, 병사들로 그들을 둘러싸고 백관으로 하여금 가서 보도록 하였다. 태묘가 역적에게 불탔으니, 황상은 소복차림으로 사당을 향하여 사흘간 곡을 하였다. 이날 상황이 촉을 떠났다.

 上入居大明宮。〈高宗咸亨元年,改蓬萊宮爲大明宮,卽東內。〉御史中丞崔器令百官受賊官爵者皆脫巾徒跣立於含元殿前,〈含元殿,東內前殿也,當丹鳳門內。〉搏膺頓首請罪,環之以兵,〈環,音宦。〉使百官臨視之。太廟爲賊所焚,上素服向廟哭三日。是日,上皇發蜀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