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歌舞/立夏節末候王瓜生4日(음4/8)丁卯

solpee 2021. 5. 19. 20:09

《唐紀34 肅宗 志德 元載》〈丙申, 756年〉

 

 

 ㊱. 애초에, 현종은 포연할 때마다 먼저 태상에 아악좌부· 입부를 설치하였고, 고취· 호악· 교방· 부현의 산악·잡희를 가지고서 뒤를 이었으며, 또 산거(山車: 누각과 산처럼 꾸민 수레)· 육선(陸船: 대나무로 배모양을 만들어 사람들이 들고가는 배)에 악기를 싣고 왕래하였으며, 또 궁녀를 내보내어〈예상우의〉를 춤추었고, 또 춤추는 말 100필에게 술잔을 물고 상수하도록 가르쳤으며, 또 코뿔소와 코끼리를 끌고 입장하여 혹은 절을 하고 혹은 춤을 추게 하기도 하였다.

 ㊱. 初,上皇每酺宴,先設太常雅樂坐部、立部,繼以鼓吹、胡樂、敎坊、府‧縣散樂、雜戲;〈太常雅樂,唐初祖孝孫、張文收所定樂也。玄宗分樂爲二部︰堂下立奏,謂之立部伎;堂上坐奏,謂之坐部伎。立部八︰一、《安舞》;二、《太平樂》;三、《破陣樂》;四、《慶善樂》;五、《大定樂》;六、《上元樂》;七、《聖壽樂》;八、《光聖樂》。坐部六︰一、《燕樂》;二、《長壽樂》;三、《天授樂》;四、《鳥歌萬歲樂》;五、《龍池樂》;六、《小破陣樂》。鼓吹,鼓吹署令所掌鐃歌鼓吹曲也。胡樂者,龜茲、疏勒、高昌、天竺諸部樂也。敎坊者,內敎坊及棃園法曲也。府縣者,京兆府及長安、萬年兩赤縣。散樂,雜戲也。酺,音蒲。〉又以山車、陸船載樂往來;〈山車者,車上施棚閣,加以綵繒,爲山林之狀。陸船者,縛竹木爲船形,飾以繒綵,列入於中,舁之以行。〉又出宮人舞《霓裳羽衣》;〈玄宗時,河西節度使楊敬述獻《霓裳羽衣曲》十二遍。凡曲終必遽,惟《霓裳羽衣》曲終引聲益緩。俚俗相傳,以爲帝遊月宮,見素娥數百,舞于廣庭,帝記其曲,歸製《霓裳羽衣舞》,非也。〉又敎舞馬百匹,銜盃上壽;〈帝以馬百匹,盛飾,分左右,施三重榻,舞《傾盃》數十曲;壯士舉榻,馬不動。劉昫曰︰帝卽內廐,引蹀馬三十匹,爲《傾杯樂曲》,奮首鼓尾,縱橫應節。又施三層板牀,乘馬而上,抃轉而舞。〉又引犀象入場,或拜,或舞。〈五坊使引大象入場,或拜或舞,動容鼓旅,中於音律。〉

 

 안록산은 이것을 보고 기뻐하였는데 이미 장안을 점령하고 나자 악공을 찾아서 잡도록 명령하고, 악기· 무용복· 춤을 추는 말· 코뿔소· 코끼리를 수레에 실어서 모두 낙양에 보내도록 하였다.

 安祿山見而悅之,旣克長安,命搜捕樂工,運載樂器、舞衣,驅舞馬、犀、象皆詣洛陽。

 

 사마광이 말하였다.

 "성인은 도덕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고, 인의를 즐거움으로 생각하였으니 그러므로 비록 띠로 만든 지붕과 흙으로 만든 계단, 거친 옷과 변변찮은 음식이어도 그것이 누추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오직 봉양이 지나쳐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소비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臣光曰︰聖人以道德爲麗,仁義爲樂;〈樂,音洛。〉故雖茅茨土階,惡衣菲食,不恥其陋,惟恐奉養之過以勞民費財。

 

 밝은 황제는 승평을 믿고 후일의 걱정거리를 생각하지 않아서 이목의 즐거움을 다하였으며 음악과 재주의 기교를 끝까지 누리면서 스스로 제왕들의 부귀가 모두 나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예전에 있었던 사람으로 하여금 미칠 수 없도록 하고 후대의 사람으로 하여금 뛰어넘을 방법이 없도록 하였으니, 비단 자기를 즐겁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시 다른 사람에게 과시한 것입니다.

 明皇恃其承平,不思後患,殫耳目之玩,窮聲技之巧,〈技,渠綺翻。〉自謂帝王富貴皆不我如,欲使前莫能及,後無所踰,非徒娛己,亦以誇人。

 

 큰 역적이 곁에 있는 것을 어찌 알았겠으며 이미 엿보고 훔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 끝내 난여를 방랑하게 만들고 산 백성을 도탄에 빠지도록 하였습니다. 마침내 주군이 화려한 것을 숭상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면 큰 도적을 불러오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도록 하였습니다."

 豈知大盜在旁,已有窺窬之心,卒致鑾輿播越,生民塗炭。〈卒,子恤翻。〉乃知人君崇華靡以示人,適足爲大盜之招也。

 

 

 ㊲. 안록산이 옹벽지에서 그의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하자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였으나 이원의 제자들이 가끔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니, 역적들은 모두 칼날을 드러내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악공 뇌해청이 슬품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악기를 땅에 내던지고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였다. 안록산은 화를 내고 시마전 아ㅍ에서 그를 포박한 다음 사지를 해체하였다.

 ㊲. 祿山宴其羣臣於凝碧池,〈《唐六典》︰洛陽禁苑中有芳樹、金谷二亭,凝碧之池。〉盛奏衆樂;棃園弟子往往歔欷泣下,〈棃園弟子見二百十一卷開元二年。〉賊皆露刃睨之。〈睨,五計翻,衺視也。〉樂工雷海清不勝悲憤,〈勝,音升。〉擲樂器於地,西向慟哭。祿山怒,縛於試馬殿前,支解之。

 

 안록산은 지난번에 백성들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창고에 있는 물건을 대부분 도둑질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이미 장안을 얻고 나자 사흘간 크게 조사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사사로운 재물도 다 약탈하였다. 또 부와 현으로 하여금 미루어 조사하면서 수량의 물건도 끝까지 조사하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관련시켜 끌어대면서 조사하고 붙잡는데 끝이 없어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놀라, 더욱 당황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祿山聞嚮日百姓乘亂多盜庫物,旣得長安,命大索三日,〈索,山客翻。〉幷其私財盡掠之。又令府縣推按,銖兩之物無不窮治,〈治,直之翻。〉連引搜捕,支蔓無窮,民間騷然,益思唐室。

 

 숙종이 마외를 떠나 북쪽으로 가면서부터 백성들 사이에서는 태자가 북쪽으로 가서 병사를 거두어가지고 장안을 빼앗는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장안에 있는 백성들은 주야로 그것을 바랐으며 어떤 때는 서로 놀라면서 말하였다.

 "태자의 대군이 도착하였다."

 그러면 모두 달아나 저자거리와 마을 이 비었다. 역적들은 북방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멀리서 보면 번번이 놀라고 달아나려고 하였다.

 自上離馬嵬北行,〈離,力智翻。〉民間相傳太子北收兵來取長安,長安民日夜望之,或時相驚曰︰「太子大軍至矣!」則皆走,市里爲空。賊望見北方塵起,輒驚欲走。

 

 경기에 있는 호걸들은 가끔 역적의 관리를 죽이고 멀리서 관군에 호은하였는데, 주살하였으나 다시 일어나고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으니 역적은 통제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것이 시작한 것은 경기· 부주· 방주에서부터인데 기주· 농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들에게 귀부하였었지만 이때에 이르러서 서문의 밖은 대개 역적의 보루가 되었으나 역적의 병력이 미치는 곳으 남쪽으로는 무관을 벗어나지 않았고, 북쪽으로는 운양을 지나지 않았으며, 서쪽으로는 무공을 지나지 않았다.

 京畿豪傑往往殺賊官吏,遙應官軍;誅而復起,〈復,扶又翻。〉相繼不絕,賊不能制。其始自京畿、鄜、坊至于岐、隴皆附之,至是西門之外率爲敵壘,〈西門,謂長安城西門也。〉賊兵力所及者,南不出武關,北不過雲陽,〈雲陽縣,漢屬馮翊,後魏屬北地郡,隋以來屬京兆。〉西不過武功。〈武功縣,漢、晉屬扶風,隋、唐屬京兆。〉

 

 강· 회에서 주청하는 것과 공물 헌상을 위하여 촉에 가고, 영무에 가는 사람은 모두 야양으로부터 상진도로를 통하여 부풍까지 다다랐는데, 도로가 막히는 일이 없었던 것은 모두 설경선의 공로였다.

 江、淮奏請貢獻之蜀、之靈武者,〈之,往也。〉皆自襄陽取上津路抵扶風,〈上津,漢漢中長利縣地,梁置南洛州,後魏改曰上州;隋廢州爲上津縣,唐屬商州。〉道路無壅,皆薛景仙之功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