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將軍 王忠嗣 /立夏節(15:47)初候螻蟈鳴3日(陰3/26)乙卯

solpee 2021. 5. 6. 16:58

《唐紀31 玄宗 天寶 4載》〈乙酉, 745年〉

 

 

 ③.2월, 21일에 삭방절도사 왕충사를 겸 하동절도사로 삼았다. 왕충사는 젊어서 용감한 것을 자부하고 한 방면을 지키게하게 되자 오로지 변경의 안전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힘써 일을 하면서 항상 말하였다.

 "태평한 시절의 장군은 단지 사졸들을 어루만져서 따르게 하고 훈련시킬 뿐이고, 공적과 명성을 얻기 위하여 중국의 힘을 지치게 할 수 없다."

 ③. 二月,己酉,以朔方節度使王忠嗣兼河東節度使。忠嗣少勇敢自負,〈少,詩照翻。〉及鎭方面,專以持重安邊爲務,常曰︰「太平之將,但當撫循訓練士卒而已,不可疲中國之力以邀功名。」〈將,卽亮翻。〉

 

 칠궁 150근짜리가 있었는데, 항상 활집 안에 넣어두고 보여주기만 하며 쓰지는 않았다. 군대 안에서 남과 밤으로 싸울 것을 생각하였는데, 왕충사는 많은 첩자를 파견하여 그 틈을 엿보다가 이길 수 있는 것이 보이면 그런 뒤에 병사를 일으켰으므로 나가면 반드시 공을 세웠다.

 有漆弓百五十斤,常貯之櫜中,以示不用。〈貯,丁呂翻。〉軍中日夜思戰,忠嗣多遣諜人伺其間隙,〈諜,達協翻。伺,相吏翻。間,古莧翻。〉見可勝,然後興師,故出必有功。

 

 이미 양도절도사를 겸하게 되니 삭방으로부터 운중에 이르기까지 변경은 수천 리에 늘어져 있었고, 중요한 요새에는 모두 성과 보루를 줄지어 세웠으며, 땅을 개척한 것이 각기 수백리였다. 변방의 사람들은 장인단이 있을 뒤부터 장수들 가운데서 모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旣兼兩道節制,自朔方至雲中,邊陲數千里,〈陲,音垂。〉要害之地,悉列置城堡,斥地各數百里。邊人以爲自張仁亶之後,將帥皆不及。〈張仁愿,本名仁亶,以睿宗諱旦,音近亶,避之,改名仁愿。將,卽亮翻。帥,所類翻。

 

 

《唐紀31 玄宗 天寶 5載》〈丙戌, 746年〉

 

 

 ⑩. 양귀비가 바야흐로 총애를 받아 매번 말을 타게 되면 고력사가 말고삐를 잡고 말채찍을 주었는데, 수를 놓는 사람으로 오로지 귀비원에게만 이바지 하는 사람이 700명이었고 안팎에서 다투어 그릇과 의복과 진귀한 노리개를 올렸다.

 ⑩. 楊貴妃方有寵,每乘馬則高力士執轡授鞭,織繡之工專供貴妃院者七百人,中外爭獻器服珍玩。

 

 영남경락사 장구장이 광릉장사 왕익이 올린 것이 아주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장구장에게는 3품을 덧붙여주었고 왕익은 들어와 호부시람이 되었으니 천하는 바람을 따라 쓸어졌다. 민간에서는 이를 노래하였다.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기뻐하지 말고 계집아이를 낳았다고 슬퍼하지 마라. 그대가 지금 보듯이 여인이 대문의 처마를 만든다."(양귀비 친정집 대문이 높아졌다는 뜻)

 嶺南經略使張九章,廣陵長史王翼,〈廣陵郡,揚州。長,知兩翻。〉以所獻精美,九章加三品,翼入爲戶部侍郎;天下從風而靡。民間歌之曰︰「生男勿喜女勿悲,君今看女作門楣。」〈凡人作室,自外至者,見其門楣宏敞,則爲壯觀。言楊家因生女而宗門崇顯也。或曰︰門以楣而撐拄,言生女能撐拄門戶也。〉

 

 양귀비가 시들지 않는 여지를 구하고자 하여 매년 영남에 명하여 역참으로 달려 이르게 하였는데, 장안에 이르렀을 즈음에도 색깔과 맛이 변하지 않았다.

 妃欲得生荔支,歲命嶺南馳驛致之,〈自蘇軾諸人,皆云此時荔支自涪州致之,非嶺南也。〉比至長安,色味不變。〈白居易曰︰荔支生巴、峽間。樹形團團如帷蓋,葉如冬青,華如橘,春榮,實如丹,夏熟,朶如蒲萄,核如枇杷,殼如紅繒,膜如紫綃,瓤肉潔白如冰雪,漿液甘酸如醴酪。大略如彼,其實過之。若離本枝,一日而色變,二日而香變,四五日外色香味盡去矣。〉

 

 이때에 이르러 양귀비는 질투하며 사납고 공손하지 않았으므로 황상이 노하여 오빠인 양섬의 집으로 돌아가게 명하였다. 이날 황상은 즐겁지 아니하여 해가 중천에 있을 즈음에도 오히려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좌우에서는 움직이는 것이 뜻에 맞지 않아 가로질러 회초리로 매질을 받았다.

 至是,妃以妬悍不遜,上怒,命送歸兄銛之第。〈悍,戶罕翻,又戶旰翻。〉是日,上不懌,比日中,猶未食,左右動不稱旨,橫被棰撻。〈比,必利翻,及也。稱,尺證翻。棰,止橤翻。橫,戶孟翻。〉

 

 고력사가 일찍이 황상의 뜻을 알고자 하여, 온갖 원 안에 쌓아 갖추어 놓은 것을 실어 양귀비에게 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100여 수레나 되었으며, 황상이 스스로 자신의 음식을 나누어 그녀에게 내렸다. 밤이 되자 고력사가 엎드려 이뢰며 청하기를 양귀비를 영접하여 원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하여 마침내 금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로부터 은총과 대우가 더욱 두터워졌으며 후궁들은 나아갈 수가 없었다.

 高力士欲嘗上意,請悉載院中儲偫送貴妃,凡百餘車;上自分御膳以賜之。〈偫,直里翻。〉及夜,力士伏奏請迎貴妃歸院,遂開禁門而入。〈《唐六典》︰城門郎掌京城、皇城宮殿諸門開闔之節。承天門擊曉鼓,聽擊鐘後一刻,鼓聲絕,皇城開門。第一鼕鼕鼓聲絕,宮城門及左‧右延明門、乾化門開。第二鼕鼕鼓聲絕,宮殿門開。夜,第一聲鼕鼕鼓聲絕,宮殿門閉。第二鼕鼕鼓聲絕,宮城門閉,及左‧右延明門、皇城門閉。其京城門開閉,與皇城門同刻。承天門擊鼓,皆聽漏刻契,契至乃擊;待漏刻所牌到,鼓聲乃絕。凡皇城闔門之鑰,先酉而出,後戌而入;開門之鑰,後丑而出,夜盡而入。京城闔門之鑰,後申而出,先子而入;開門之鑰,後子而出,先卯而入。若非其時,而有命啓閉,則詣閤覆奏,奉旨合符而開闔之。殿門及城門,若有敕夜開,受敕人具錄須開之門,宣送中書門下。偫,直里翻。〉自是恩遇愈隆,後宮莫得進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