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則天皇의 崩/穀雨節 末候戴勝降於桑(뻐꾸기 뽕나무에 내린다) 桐花風1日(陰3/19)戊申

solpee 2021. 4. 29. 17:02

《唐紀23 中宗 神龍 元年》〈乙丑, 705年〉

 

 

 ②. 2월 4일에 국호를 唐으로 회복(684~705까지 周)시켰다. 교묘와 사직, 능침, 백과, 기치, 복색, 그리고 문자는 모두 이전의 옛일과 같게 하였다. 다시 신도를 동도로 하고, 북도를 병주로 하였으며, 노군을 헌원황제로 하였다.

 ②. 甲寅,復國號曰唐。〈天授元年,武后更國號曰周,今復舊。〉郊廟、社稷、陵寢、百官、旗幟、服色、文字皆如永淳以前故事。〈幟,昌志翻。〉復以神都爲東都,〈光宅元年,改東都曰神都。復,扶又翻,又如字。〉北都爲幷州,〈天授元年以幷州爲北都。幷,卑經翻。〉老君爲玄元皇帝。〈高宗乾封元年上老子尊號曰玄元皇帝;武后革命,改曰老君。

 

 ⑱. 술사인 정보사와 상의봉어 섭정능은 모두 요망함을 가지고 황상의 믿음과 중히 여김을 얻었는데, 여름, 4월에 묵칙(墨勅:황제가 친필로 직접하달하는 명령)으로 정보사를 비서감으로 삼고 섭정능을 국자좨주로 삼았다. 환언범과 최현위가 굳게 옳지 않다고 내세우자 황상이 말하였다.

 "이미 그들을 썼으니 갑자기 바꾸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⑱. 術士鄭普思、尚衣奉御葉靜能葉,舊音攝,後音木葉之葉。《吳志‧孫晧傳》有都尉葉雄。皆以妖妄爲上所信重,妖,於喬翻。夏,四月,墨敕以普思爲祕書監,靜能爲國子祭酒。墨敕出於禁中,不由中書門下。桓彥範、崔玄暐固執不可,上曰︰「已用之,無容遽改。」

 

 환언범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처음 즉위하셔서 제서를 내리시며 말씀하시기를, '정령은 모두 정관시대의 옛일에 따른다.' 라고 하였습니다. 정관 연간에 위징·우세남·안사고를 비서감으로 삼았고, 공영달을 국자좨주로 삼았는데, 어찌 정보사와 섭정능에 비교하겠습니까?"

 彥範曰︰「陛下初卽位,下制云︰『政令皆依貞觀故事。』貞觀中,魏徵、虞世南、顏師古爲祕書監,孔穎達爲國子祭酒,豈普思、靜能之比乎!」

 

 4월 1일에 좌습유 이옹이 상소하였다.

 "《詩經》은 300편이지만 한마디로 그것을 덮어서 말하면 '思無邪'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신선이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죽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곧 진 시황과 한 무제가 그것을 얻었을 것입니다. 부처가 사람들에게 복과 이로움을 줄 수 있다면 양 무제가 그것을 얻었을 것입니다. 요와 순이 제왕의 우두머리가 된 까닭은 역시 사람들의 일을 닦으며 다스린 것뿐입니다. 이런 무리들을 높여 주시고 총애하시는 것이 어찌 나라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황상이 모두 듣지 않았다.

 庚戌,左拾遺李邕上疏,以爲「《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引《論語》孔子之言。上,時掌翻。疏,所去翻。若有神仙能令人不死,則秦始皇、漢武帝得之矣;佛能爲人福利,則梁武帝得之矣。堯、舜所以爲帝王首者,亦脩人事而已。尊寵此屬,何補於國!」上皆不聽。

 

 ㊽. 11월 13일에 황상이 낙성의 남쪽 누대로 가서 발한의 호족놀이를 구경하였다. 청원현위 여원태가 상소하였다.

 "세월이 추워지는 것은 순리대로 되도록 꾀하여야 하는데, 어찌 벗은 몸으로 물을 뿌리며 네거리에서 북을 치고 춤추면서 그것을 찾아다니는 것입니까!"

 상소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㊽. 己丑,上御洛城南樓,洛陽皇城之西南曰洛城門,門內卽洛城殿。觀潑寒胡戲。潑寒胡戲卽乞寒胡戲,本出於胡中西域康國,十一月鼓舞乞寒,以水交潑爲樂,武后末年始以季冬爲之。清源尉呂元泰上疏,以爲「謀時寒若,清源縣屬幷州,隋於古梗陽城置,以水爲名。《書‧洪範》曰︰謀時寒若。《註》云︰羣能謀則時寒順之。若,順也。上,時掌翻。疏,所去翻。何必裸身揮水,鼓舞衢路以索之!」裸,郎果翻。索,山客翻。疏奏,不納。

 

 

 ㊾. 26일에 측천이 상양궁에서 붕어하였는데, 나이가 82세였다. 죽으면서 제서를 남겼다.

 "황제의 호칭을 떼어버리고 측천대성황후라고 칭하라. 왕씨와 소씨 두 친족과 저수량·한원·유석의 가까운 가족들을 모두 사면하라.

 ㊾. 壬寅,則天崩於上陽宮,年八十二。遺制︰「去帝號,〈去,羌呂翻。〉稱則天大聖皇后。王、蕭二族及褚遂良、韓瑗、柳奭親屬皆赦之。」〈武后之立也,王皇后、蕭淑妃幽廢,不得良死,褚遂良、韓瑗以諫死,柳奭以王后親屬死,其親屬皆流竄。〉

 

 황상이 양음에 있어서 위원충을 섭총재로 하여 시흘 동안 있었다. 위원충은 원래 충성스럽고 곧게 바라보는 것을 짊어졌고 안팎의 사람들아ㅣ 그를 위지하였는데, 무삼사가 그를 꺼려 태후의유제를 고쳐 위원충을 위로하고 타이르며 실봉 100호를 내렸다. 위원충은 조서를 받들고 고마움으로 목이 매며 눈물과 콧물을 흘렸는데 보는 사람이 말하였다.

 "일이 끝났다."

 12월 21일에 황상이 처음으로 동명전으로 가서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였다.

 上居諒陰,以魏元忠攝冢宰三日。元忠素負忠直之望,中外賴之;武三思憚之,矯太后遺制,慰諭元忠,賜實封百戶。元忠捧制,感咽涕泗,見者曰︰「事去矣!」〈知其不敢復論武氏事也。〉

十二月,丁卯,上始御同明殿見羣臣。〈見,賢遍翻。《六典》︰東都皇宮南面三門,中曰應天,左曰興敎,右曰光政。光政之北曰明福,明福之西曰崇賢門,其內曰集賢殿,集賢之東曰億歲殿,又東曰同明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