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狄仁傑[Dí Rénjié ] 사망(630~700)/穀雨節 中候鳴鳩拂其羽 酴釄風5日(陰3/18)丁未

solpee 2021. 4. 28. 16:51

《唐紀22 則天后(624~705) 久視 元年》〈庚子, 700年〉

 

 

 ⑨. 태후가 내사인 양문혜공 적인걸을 믿고 중히 여겼는데, 신하들은 따라가지 못하였고, 항상 그를 '國老[guólǎo]'라고 이르며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적인걸은 대면하여서 조정의 일을 끄집어내어 다투기를 좋아하였지만 태후는 매번 뜻을 굽히고 그를 따랐다. 일찍이 태후가 좇아서 놀러 나갔는데, 바람을 만나서 적인걸의 건이 떨어지고 말이 놀라서 멈출 수 없자 태후가 태자에게 명하여 쫓아가서 말의 재갈을 잡게하고 그것을 잡아매게 하였다. 적인걸이 여러 차례 늙고 병이 들었다는 것으로 解骨하기를 빌었지만 태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⑨. 太后信重內史梁文惠公狄仁傑,羣臣莫及,常謂之國老而不名。仁傑好面引廷爭,〈好,呼到翻。爭,讀曰諍。〉太后每屈意從之。嘗從太后遊辛,遇風吹仁傑巾墜,而馬驚不能止,太后命太子追執其鞚而繫之。〈鞚,苦貢翻。〉仁傑屢以老疾乞骸骨,太后不許。

 

 들어가서 알현하면 항상 그가 절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고 말하였다.

 "매번 공이 절을 하는 것을 바라보면 짐 또한 몸이 아프오."

 이어서 그에게 숙직하는 것을 면하게 하고 그의 동료들에게 경계하는 말을 하였다.

 "스스로 군대나 국가의 큰일이 아니면, 공을 번거롭게 하지 마라."

 26일에 사망하자, 태후가 울면서 말하였다.

 "조당이 텅 비었구나!"

 이로부터 조정에서 큰일이 있거나 많은 사람이 결정을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면 태후가 번번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하늘이 나의 국로를 빼앗아 간 것이 어찌 너무 이른가?"

 入見,常止其拜,〈見,賢遍翻。〉曰:「每見公拜,朕亦身痛。」仍免其宿直,戒其同僚曰:「自非軍國大事,勿以煩公。」辛丑,薨,太后泣曰:「朝堂空矣!」自是朝廷有大事,衆或不能決,太后輒歎曰:「天奪吾國老何太早邪!」

 

 태후가 일찍이 적인걸에게 물었다.

 "짐이 한 명의 아름다운 선비를 얻어서 쓰고자 하는데, 누가 할 수 있겠소?."

 적인걸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그를 어떻게 쓰시려고 하는지를 아직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태후가 말하였다.

 "장상으로 삼아서 쓰려고 하오."

 太后嘗問仁傑:「朕欲得一佳士用之,誰可者?」仁傑曰:「未審陛下欲何所用之?」太后曰:「欲用爲將相。」〈將,卽亮翻。相,悉亮翻。〉

 

 적인걸이 대답하였다.

 "문학을 쌓고 마음이 온화한 것으로라면 소미도와 이교를 진실로 뽑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뛰어나고 기이한 재주를 가진 사람을 원하신다면 형주장사 장간지(76)가 있는데, 그 사람은 비록 늙었으나 재상이 될 만한 인재입니다."

 태후가 장간지를 낙주사마로 발탁하였다. 며칠이 지난 뒤 또 적인걸에게 물으니, 대답하였다.

 "예전에 장간지를 천거하였는데 아직 쓰시지 않았습니다.

 태후가 대답하였다.

 "이미 자리를 승진시켰소."

 대답하였다.

 "신이 천거한 사람은 재상이 될 수 있는 사람이지 사마는 아닙니다."

 

 仁傑對曰:「文學縕藉,〈縕,於問翻。藉,慈夜翻。〉則蘇味道、李嶠固其選矣。必欲取卓犖奇才,〈犖,呂角翻。〉則有荊州長史張柬之,其人雖老,宰相才也。」太后擢柬之爲洛州司馬。〈自大州長史進神州司馬,故曰擢。〉數日,又問仁傑,對曰:「前薦柬之,尚未用也。」太后曰:「已遷矣。」對曰:「臣所薦者可爲宰相,非司馬也。」

 

이내 추관시랑으로 승진시켰고, 오래 지나서 마침내 써서 재상으로 삼았다. 적인걸은 또 일찍이 하관시랑 요원숭· 감찰어사인 곡아 사람 환언범· 태주 자사 경휘 등 수십 명을 천거하였는데, 거의 유명한 신하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적인걸에게 말하였다.

 "천하의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모두 공의 집 문에 있습니다."

 적인걸이 대답하였다.

 "어진 사람을 천거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지 사사로운 것을 위함이 아니오."

 乃遷秋官侍郎;久之,卒用爲相。〈卒,子恤翻。〉仁傑又嘗薦夏官侍郎姚元崇、監察御史曲阿桓彥範、太州刺史敬暉等數十人,〈監,古銜翻。武德三年,以幷州之太谷、祈[祁]縣置太州,六年,州廢;當是此時復置也。《考異》曰:《梁公傳》云:「張柬之、桓彥範、敬暉、崔玄暐、袁恕己皆公所薦。公嘗退食之後,謂五公曰:『所恨衰老,身先朝露,不得見五公盛事,冀各保愛,願盡本心。』五公心知目擊,懸悟公意。公寢疾,五公候問,偶對終日,意無一言。少頃,流涕及枕,但相視而已。五公退出,遞不測其由。袁恕己曰:『豈不氣力轉羸,須問家事乎?』張柬之曰:『未聞大賢廢國謀家者也。』斯須,命張柬之、袁恕己、桓彥範三公入,餘二公立於門外,曰:『向者無言,蓋以二公之故。此二公能斷而不能密,若先與議之,事必外泄,一泄之後,則國異而家亡也。至其時或不與共之,事亦不就。梁王三思尚掌權,可先收而後行也。不然,則必反生大禍。』狄公沒後,經歲餘,五公潛會於幽閒之處,敍公當時之言,重結盟約,徹饌之後,相顧欲言,未至其時,恐負前諾,欲言又止,前後數四。桓彥範乃敍其言。言猶未畢,聞戶牖之外,聲若雷霆,須臾風雨,咫尺莫辨,所坐牀褥悉擲於階下。五公戰懼,不知所據,乃相謂曰:『此是狄公忠烈之至,假此靈變以驚衆心,不欲吾輩先論此事,未至其時,不可復言也。』斯須,天清日明,不異於初。易之等旣誅,袁謂張公曰:『昔有遺言,使先收三思,豈可捨諸?』張公曰:『但大事畢功,此是机上之物,豈有逃乎!』後梁王交通於內,五公果爲所譖,俱遭流竄,所期興廢年月,遺約軌模少無異也。」按柬之等五人偶同時在位,協力立功,仁傑豈能預知其事,舉此五人,專欲使之輔立太子邪!且易之等若有可誅之便,太子有可立之勢,仁傑身爲宰相,豈待五年之後,須柬之等然後發邪!此蓋作傳者因五人建興復之功,附會其事,云皆仁傑所舉,受敎於仁傑耳。其言譎怪無稽,今所不取。《舊傳》惟著舉柬之、彥範、暉三人姓名,今從之。〉率爲名臣。或謂仁傑曰:「天下桃李,悉在公門矣。」〈程大昌《演繁露》:趙簡子謂陽虎曰:「惟賢者爲能報恩,不肖者不能矣。夫植桃李者,夏得休息,秋得其食;植蒺蔾者,夏不得休息,秋得其刺焉。今子之所得者,蒺蔾也。」今世通以所薦士爲桃李者,說皆本此,〉仁傑曰:「薦賢爲國,非爲私也。」〈爲,于僞翻;下爲之同。〉

 

 애총에, 적인걸이 위주 자사가 되어 은혜를 베풀며 다스려서 백성들이 살아있는 사람의 사당을 세웠다. 뒤에 그의 아들인 적경휘가 위군 사공참군이 되었는데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되자 사람들이 마침내 적인걸의 상을 헐어버렸다.

 初,仁傑爲魏州刺史,〈見二百五卷萬歲通天元年。〉有惠政,百姓爲之立生祠。後其子景暉爲魏州司功參軍,貪暴爲人患,人遂毀其像焉。〈史言狄仁傑盡忠,所以勸天下之爲人臣;言其以景暉貪暴而毀祠,所以戒天下之爲人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