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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의 전횡과 이경업의 반란/春分節初候玄鳥至 海棠花風5日(陰2/12)辛未

solpee 2021. 3. 23. 17:56

·《唐紀19 高宗 光宅 元年》 (甲申, 684)

 

 

 ㉕. 무승사가 태후에게 그 조상들을 왕으로 추봉하고 무씨7묘를 세울 것을 요청하자, 태후가 그의 의견을 따랐다. 배염이 간하였다.

 "태후께서는 어머니로서 천하의 사람들에게 다가가시면서 마땅히 지극히 공적인 모습을 보여야 하며, 가까운 삼에게 사사로워서는 안됩니다. 홀로 여씨의 실패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㉕. 武承嗣請太后追王其祖,〈王,于況翻。〉立武氏七廟,太后從之。裴炎諫曰:「太后母臨天下,當示至公,不可私於所親。獨不見呂氏之敗乎!」

 

 태후가 말하였다.

 "여씨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맡겼으니, 그러므로 실패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내가 죽은 사람들을 추존하는데 무엇을 다치겠는가?"

 대답하였다.

 "일이란 것은 마땅히 사소한 것을 막고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막아서 자라날 수 없게 할 뿐입니다."

 태후가 따르지 않았다.

 太后曰:「呂氏以權委生者,故及於敗。今吾追尊亡者,何傷乎!」對曰:「事當防微杜漸,不可長耳!」〈長,知兩翻。〉太后不從。

 

 9월, 21일에 태후의 5대 할아버지인 무극기를 추존하여 노정공으로 하고, 할머니는 부인으로 하고, 고조 무거상은 태위· 북평공숙왕으로 하고,  증조 무검은 태위· 금성의강왕으로 하고, 할아버지 무화는 태위· 태원안성왕으로 하고, 아버지 무사확은 태사· 위정왕으로 하며, 할아버지의 부인들은 모두 비로 하였다. 배염은 이로 말미암아서 죄를 얻었다. 또 문수에 5대 조상들의 사당을 세웠다.

 己巳,追尊太后五代祖克己爲魯靖公,妣爲夫人;高祖居常爲太尉、北平恭肅王,曾祖儉爲太尉、金城義康王,祖華爲太尉、太原安成王,考士彠爲太師、魏定王;〈彠,一虢翻。〉祖妣皆爲妃。裴炎由是得罪。又作五代祠堂於文水。〈文水縣,舊受陽,隋開皇十一年更名,屬幷州。〉

 

 이때에 여러 무씨들이 용사하자 당의 종실들은 스스로 위태로워졌고, 무리들의 마음은 분하고 한탄하였다. 마침 미주 자사인 영공 이경업과 그 아우인 주질 현령 이경유· 급사중 당지기· 장안주부 낙빈왕· 첨사사직 두구인은 모두 일에 연루되었는데, 이경업은 유주사마로 좌천되었고, 이영유는 관직에서 면직되었으며, 당지기는 깎여서 괄창 현령으로 되고, 낙빈왕은 깎여서 이현 현령으로 되었다.

 時諸武用事,唐宗室人人自危,衆心憤惋。〈惋,烏貫翻。〉會眉州刺史英公李敬業及弟盩厔令敬猷、〈漢武帝置盩厔縣,屬扶風;後漢、晉省,後魏復置,後周置周南郡;隋廢郡,以盩厔縣屬京兆;唐置岐州。盩厔,音舟窒。〉給事中唐之奇、長安主簿駱賓王、〈唐赤縣主簿,從八品上。〉詹事司直杜求仁〈唐詹事司直,正九品上,掌彈劾宮僚,糾舉職事。〉皆坐事,敬業貶柳州司馬,敬猷免官,之奇貶栝蒼令,〈漢會稽回浦縣,後漢更名章安;光武分章安縣之南鄕,置松陽縣;隋分松陽之東界,置栝蒼縣,帶栝州,以栝蒼山名縣。〉賓王貶臨海丞,〈吳分章安,置臨海縣,屬臨海郡;隋廢郡,以縣屬栝州;唐分帶台州。〉求仁貶黟令。〈黟縣,漢屬丹楊郡,吳分屬新安郡,隋、唐屬歙州。黟,師古音伊,劉昫音䃜。〉

 

 두구인은 두정륜의 조카이다. 주질 현위 위사온은 일찍이 어사였으나 쫓겨났다. 모두 양주에 모여서 각각 자신이 직책을 잃은 것을 웜망하고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는데, 여릉왕을 복위시키는 것을 말거리로 삼았다.

 求仁,正倫之姪也。〈杜正倫事太宗、高宗。〉盩厔尉魏思溫嘗爲御史,復被黜。〈復,扶又翻。〉皆會於揚州,〈《舊志》:揚州,京師東南二千七百五十三里,至東都一千七百四十九里。〉各自以失職怨望,乃謀作亂,以匡復廬陵王爲辭。

 

 위사온이 그들의 모의를 주도하는 사람이 되어, 그의 무리인 감찰어사 설중장으로 하여금 강도로 명령을 받들어 사신으로 갈 것을 조정에 요청하도록 하고, 옹주 사람 위초를 시켜서 설종장에게 가서 변란이 발생하였음을 알리도록 하니, '양주 장사 진경지가 반란을 획책하였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思溫爲之謀主,使其黨監察御史薛仲璋求奉使江都;〈江都縣帶揚州。監,古銜翻。使,疏吏翻。〉令雍州人韋超詣仲璋告變,云「揚州長史陳敬之謀反」。

 

 설중장은 진경지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며칠이 지나서 이경업이 전거를 타고 도착하여 양주사마가 그곳으로 와서 관부로 온다고 속여서 말하였다.

 "밀지를 받들어서 고주에 거주하는 추장 풍자유가 반란을 획책하여서 군대를 발동하여 그들을 토벌한다."

 이에 부고를 열고, 사조참군 이종신에게 전방(조패공장)에 가서 죄수와 장인들을 내몰아서 갑옷을 주게 하였다. 진경지를 갇힌 장소에서 목 베고, 노사참군 손처행이 이를 거부하자 역시 머리를 베어서 돌려가며 내보이니, 관리들 중에서 감히 움직이려고 하는 자가 없었다.

 仲璋收敬之繫獄。居數日,敬業乘傳而至,〈雍,於用翻。傳,知戀翻。〉矯稱揚州司馬來之官,云「奉密旨,以高州酋長馮子猷謀反,〈酋,慈由翻。長,知兩翻。〉發兵討之。」於是開府庫,令士曹參軍李宗臣就錢坊,驅囚徒、工匠〈【章:十二行本「匠」下有「數百」二字;乙十一行本同。】〉授以甲。斬敬之於繫所;〈《考異》曰:《實錄》作「薛璋」。《御史臺記》云:「薛仲璋矯使揚府,與徐敬業等謀反,夜,與江都令韋知止子茂道計議。倉曹參軍閻識微發之,長史陳敬之不察,抑識微,令遜謝。仲璋佯事竟,還出郭門,羣官畢從。其黨韋超遮道告密,復留繫問,遂斬敬之。」今事從《實錄》,仲璋從《臺記》。〉錄事參軍孫處行拒之,亦斬以徇,〈處,昌呂翻。〉僚吏無敢動者。

 

 마침내 한 주의 군대를 일으키고, 다시 '嗣聖 元年'이라 일컬었다. 세 개의 관부를 열었는데, 하나는 광복부라 하였고, 두 번째는 영공부라 하였으며, 세 번째는 양주대도독부라 하였다. 이경업은 스스로 광복부의 상장이라고 하며 양주대도독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장지기와 두구인을 좌· 우장사로 삼고, 이종선과 설중장을 좌· 우사마로 삼고, 위사온을 군사로 삼았고, 낙빈왕을 기실로 삼고, 열흘 동안에 勝兵 10여 만을 얻었다. 격문을 주현으로 보냈는데 대략의 말이다.

 遂起一州之兵,復稱嗣聖元年。〈復,扶又翻,又如字。〉開三府:一曰匡復府,二曰英公府,三曰揚州大都督府。敬業自稱匡復府上將,領揚州大都督。〈將,卽亮翻。〉以之奇、求仁爲左、右長史,宗臣、仲璋爲左、右司馬,思溫爲軍師,賓王爲記室,旬日間得勝兵十餘萬。〈勝,音升。〉

移檄州縣,略曰:

 

 "거짓으로 조정에 나아가 다스리고 있는 무씨란 자는 사람이 온순하지 않고 집안의 지위도 한미하다. 옛날 태종의 아랫길에 충당되었다가 일찍이 태종이 갱의하는 것을 모시게 되었는데, 만년에는 춘궁을 더럽히고 음란하게 만들었다. 선황과 정을 통한 것을 숨기고 몰래 후정의 총애를 꾀하여 황후의 翬翟을 짓밟고 우리 임금을 취우지경으로 빠뜨렸다."

 「僞臨朝武氏者,〈朝,直遙翻。〉人非溫順,地實寒微。昔充太宗下陳,〈陳,列也。《戰國策》曰:美人充下陳。〉嘗以更衣入侍,〈衞子夫以更衣得幸漢武帝,賓王用此事。更,工衡翻。〉洎乎晚節,穢亂春宮。〈東宮,亦謂之春宮。洎,其冀翻。〉密隱先帝之私,陰圖後庭之嬖,踐元后於翬翟,〈翬翟,后服也。翬,音暉。〉陷吾君於聚麀。」〈《記》曰:夫惟禽獸無禮,故父子聚麀。麀,於求翻。〉

 

 또 말하였다.

 "언니를 죽이고 오빠를 죽였으며 임금을 죽이고 어머니를 독살하였으니, 사람과 신령이 함께 미워하고 하늘과 땅이 용서하지 않는 바이다."

 又曰:「殺姊屠兄,〈姊,謂韓國夫人;兄謂元爽、元慶;事見二百一卷高宗乾封元年。〉弒君鴆母,〈此以高宗晏駕及太原王妃之死爲后罪。〉人神之所同嫉,天地之所不容。」

 

 또 말하였다.

 "화를 일으킬 마음을 싸서 감추고 신기를 몰래 엿보았다. 임금이 아끼는 아들을 별궁에 유폐하고, 도적의 종족과 한패에게는 중요한 관직을 맡기고 있다."

 또 말하였다.

 "한 웅큼의 땅도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6척의 고아는 어디에 있는가?"

 또 말하였다.

 "오늘날 강역 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어느 집안의 천하인가?"

 태후가 격문을 보고 물었다.

 "누가 한 짓인가?"

 어떤 사람이 대답하였다.

 "낙빈왕입니다."

 태후가 말하였다.

 "재상의 허물이다.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재주가 있음에도 도리어 그로 하여금 몰락되어 유랑하도록 하여 기회를 만나지 못하였구나!"

 又曰:「包藏禍心,竊窺神器。君之愛子,幽於別宮;〈謂居睿宗於別殿。〉賊之宗盟,委之以重任。」〈謂用武承嗣等。〉又曰:「一抔之土未乾,〈抔,蒲侯翻。乾,音干。〉六尺之孤安在!」又曰:「試觀今日之域中,竟是誰家之天下!」太后見檄,問曰:「誰所爲?」或對曰:「駱賓王。」太后曰:「宰相之過也。人有如此才,而使之流落不偶乎!」

 

 이경업은 죽은 태자 이현과 용모가 비슷한 자를 찾아가서 사람들을 속이며 말하였다.

 "이현은 죽지 않았고, 이 성 안으로 도망쳐서 살고 있으며, 우리들에게 군대를 일으키라고 명령하셨다."

 이어서 그를 받들고서 호령하였다.

 敬業求得人貌類故太子賢者,紿衆云:「賢不死,亡在此城中,令吾屬舉兵。」〈紿,蕩亥翻。〉因奉以號令。

 

 초주사마 이승복이 자기 소속의 세 현을 거느리고 이경업에게 호응하였다. 우이 사람 유행거가 홀로 현을 점거하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경업은 그의 부장인 울지소를 파견하여 우이를 공격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유행거를 유격장군으로 삼고, 그 아우인 유행실은 초주 자사로 삼았다.

 楚州司馬李崇福帥所部三縣應敬業。〈楚州,本漢射陽、鹽瀆縣地,晉置山陽郡,隋開皇初罷郡,十二年,置楚州,大業初,州廢,唐初復置。帥,讀曰率。所部三縣:山陽、鹽城、安宜也。〉盱眙人劉行舉獨據縣不從,敬業遣其將尉遲昭攻盱眙。〈盱眙縣,漢屬臨淮郡,後漢屬下邳國,晉安帝分置盱眙郡,陳置北譙州,隋廢爲縣,屬江都郡,唐屬楚州。盱眙,音吁貽。其將,卽亮翻。尉,紆勿翻。〉詔〈【章:十二行本「詔」上有「行舉拒卻之」五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退齋校同。】〉以行舉爲遊擊將軍,以其弟行實爲楚州刺史。

 

 10월 6일에 좌옥검위대장군 이효일을 양주도대장군으로 삼아서 군사 30만을 거느리고, 장군인 이지섭과 이경신으로 그를 돕게 하여 이경업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甲申,以左玉鈐衞大將軍李孝逸爲揚州道大總管,〈是年,改左、右領軍衞爲左、右玉鈐衞。〉將兵三十萬,以將軍李知十、馬敬臣爲之副,以討李敬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