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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의 패망과 신라의 다물/春分節(18:37)初候玄鳥至 海棠花風2日(陰2/9)戊辰

solpee 2021. 3. 20. 17:31

《唐紀17 高宗 咸亨 元年》 (庚午, 670)

 

 

 ⑧. 고리의 추장인 검모잠이 반란을 일으키고 고장의 외손자인 안순을 세워 주군으로 삼았다. 좌감문대장군 고간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삼고, 군사를 발동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⑧. 高麗酋長劍牟岑反,立高藏外孫安舜爲主。以左監門大將軍高侃爲東州道行軍總管,〈高麗在東,時已列置州府,故曰東州道。監,古銜翻。〉發兵討之。安舜殺劍牟岑,奔新羅。

 *통감에 보면 신라가 삼국통일에 신라가 한 일은 거의 기록하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新城( 중국에선 今 撫順이라 하나 원래는 正定縣 新城鋪다)에 있던 안동도호부마저 신라에게 탈취 당하고 신라는 고리의 구토를 다 회복하였다.

 

《唐紀18 高宗 咸亨 2年》 (辛未, 671)

 

 ④. 가을, 7월, 초하루에 고간이 고리의 남은 무리들을 安市城(今 密雲 東北)에서 격파하였다.

 ④. 秋,七月,乙未朔,高侃破高麗餘衆於安市城。〈麗,力知翻。

 

 

《唐紀18 高宗 咸亨 3年》 (壬申, 672)

 

 

 ⑬. 12월에 고간이 고리의 남은 무리들과 白水山(今 密雲區 白河 百里山)에서 싸워서 이들을 격파하였다. 신라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고리를 구원하니 고간이 이를 쳐서 격파하였다.

 ⑬. 十二月,高侃與高麗餘衆戰于白水山,破之。新羅遣兵救高麗,侃擊破之。

 

 

《唐紀18 高宗 咸亨 4年》 (癸酉, 673)

 

 

 ④. 윤5월에 燕山道總管인 우령군대장군 이근행이 고리의 반란한 사람들을 瓠蘆河의 서쪽에서 대파하였는데, 포로로 수천 명을 잡았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신라로 도망하였다.

 ④. 閏五月,燕山道總管、右領軍大將軍李謹行大破高麗叛者於瓠蘆河之西,〈胡嶠曰:黑車子之北,有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尤寒,水曰瓠?河,夏秋冰厚二尺,秋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余按《唐書‧劉仁軌傳》,此瓠蘆河當在高麗南界,新羅七重城之北。燕,因肩翻;下同。〉俘獲數千人,餘衆皆奔新羅。

 

 당시에 이근행의 처인 유씨는 伐奴城에 남앗는데. 고리에서 말갈을 이끌고 이를 공격하니 유씨가 갑옷을 입고 무리를 인솔하여 성을 지켰고, 한참 있다가 오랑캐는 물러갔다.

 時謹行妻劉氏留伐奴城,高麗引靺鞨攻之,劉氏擐甲帥衆守城,久之,虜退。〈靺鞨,音末曷。擐,音宦。帥,讀曰率。〉

 

 황상은 그의 공로를 기뻐하여 연국부인에 봉하였다. 이근행은 말갈 사람인 동지계의 아들인데, 무예와 힘이 뛰어나서 많은 이적들이 꺼리는 바였다.

 上嘉其功,封燕國夫人。謹行,靺鞨人突地稽之子也,〈突地稽見一百八十九卷高祖武德四年。〉武力絕人,爲衆夷所憚。

 

 

《唐紀18 高宗 上元 2年》 (乙亥, 675)

 

 

 ③. 2월, 유인궤가 신라의 무리들을 七重城에서 대파하였고, 또 말갈로 하여금 바다로 가서 신라의 남쪽 경계를 경락하게 하니, 목을 베고 붙잡은 것이 아주 많았다. 유인궤의 군사가 돌아왔다.

 ③. 二月,劉仁軌大破新羅之衆於七重城;重,直龍翻。又使靺鞨浮海,略新羅之南境,斬獲甚衆。仁軌引兵還。靺,音末。鞨,音曷。還,從宣翻,又音如字。

 

 조서를 내려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고 신라의 매초성에 주둔하여 이를 경락하게 하였는데, 세 번 싸워서 모두 승리하자 신라는 마침내 사신을 파견하여 들와서 공물을 바치고 또 사죄하였으며, 황상은 이를 사면하고 신라왕 김법민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김인문이 중도에서 돌아오니 임해군공으로 고쳐서 책봉하였다.

 詔以李謹行爲安東鎭撫大使,使,疏吏翻;下同。屯新羅之買肖城以經略之,三戰皆捷,新羅乃遣使入貢,且謝罪;上赦之,復新羅王法敏官爵。金仁問中道而還,使,疏吏翻。還,音旋,又如字。改封臨海郡公。

 

 

《唐紀18 高宗 儀鳳 元年》 (丙子, 676)

 

 

 ③. 2월 6일에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옛날 성으로 옮겼으며, 이보다 먼저 어떤 華人으로 東官을 맡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이를 파직시켰다.

 ③. 二月,甲戌,徙安東都護府於遼東故城;《考異》曰:《實錄》,咸亨元年,楊昉、高侃討安舜,始拔安東都護府,自平壤城移於遼東州。儀鳳元年二月甲戌,以高麗餘衆反叛,移安東都護府於遼東城。蓋咸亨元年言移府者,終言之也;儀鳳元年言高麗反者,本其所以移也。《會要》無咸亨元年移府事。此年云移於遼東故城,今從之。先是有華人任【章:十二行本「任」下有「安」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東官者,悉罷之。先,悉薦翻。

 

 웅진도독부를 建安의 옛날 성으로 옮겼는데 그 가운데 백제의 호구로 먼저 徐州와 兗州 등의 주로 옮겼던 사람들은 모두 建安에 두었다.

 徙熊津都督府於建安故城;其百濟戶口先徙於徐、兗等州者,皆置於建安。

 

 

《唐紀18 高宗 儀鳳 2年》 (丁丑, 677)

 

 

 ②. 애초에, 유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웅진에서 돌아오자 부여융은 신라의 압박을 두려워하여 감히 머물러 잇지 아니하고 곧 역시 조정으로 돌아왔다. 2월 24일에 공부상서 고장을 요동주도독으로삼고, 조선왕으로 책봉하여 요동으로 돌아가게 하여 고리의 남은 무리들을 안무하게 하였는데, 고리의 먼저 여러 주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보내어서 고장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②. 初,劉仁軌引兵自熊津還,見上卷麟德二年。扶餘隆畏新羅之逼,不敢留,尋亦還朝。朝,直遙翻。二月,丁巳,以工部尚書高藏爲遼東州都督,封朝鮮王,朝,音潮。鮮,音仙。遣歸遼東,安輯高麗餘衆;高麗先在諸州者,皆遣與藏俱歸。

 

 또 사농경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고, 대방왕에 책봉하여 또한 돌아가서 백제의 남은 무리들을 안무하게 하며 이어서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서 그들을 통괄하게 하였다.

 又以司農卿扶餘隆爲熊津都督,封帶方王,亦遣歸安輯百濟餘衆,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以統之。去年春,移安東都護府於遼東故城,今又移於新城。統,他綜翻。

 

 이때에 백제는 황폐화 되고 부서져서 부여융에게 명령하여 고리와 경계에 우거하도록 하였다. 고장이 요동에 이르자 반란을 하기로 모의하고 몰래 말갈 사람들과 내통하였는데, 불러서 돌아오게 하여 邛州(공주: 사천성 공래현)로 옮겼더니 죽었으며, 그 사람들을 하남과 농우에 있는 여러 주에 흩어서 옮기게 하고 가난한 사람은 안동성의 옆에 머물게 하였다.

 時百濟荒殘,命隆寓居高麗之境。藏至遼東,謀叛,潛與靺鞨通;召還,徙邛州而死,麗,力知翻。還,從宣翻,又音如字。靺鞨,音末曷。邛,渠容翻。散徙其人於河南、隴右諸州,貧者留安東城傍。

 

 고리의 옛날 성은 신라에[ 병합되고 나머지 무리들은 흩어져서 말갈과 돌궐로 들어갔고, 무여융 역시 끝내 감히 옛날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니 高氏와 扶餘氏는 망하였다.

 高麗舊城沒於新羅,餘衆散入靺鞨及突厥,厥,九勿翻。隆亦竟不敢還故地,高氏、扶餘氏遂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