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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저항/驚蟄節末候膺化爲鳩 薔薇花風2日(陰2/4)癸亥

solpee 2021. 3. 15. 17:55

《唐紀16 高宗 龍朔 2》 (壬戌, 662)

 

 

 ③. 2월, 14일에 패강도대총관 임아상이 군대에서 죽었다. 임아상이 장군이 되어가지고는 아직 일찍이 친척이나 옛날에 자기 부속이었던 사람을 주청하여 종군하게 한 일이 없었고, 모두 관할 관사에 공문을 이송하여 보직을 주었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

 ③. 甲戌,浿江道大總管任雅相薨于軍。雅相爲將,〈浿,普大翻。任,音壬。相,息亮翻。將,卽亮翻。〉未嘗奏親戚故吏從軍,皆移所司補授,謂人曰︰

 

 "관리란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모두 국가의 공적인 그릇이니, 어찌 억지로 그 사사로운 것을 편리한대로 하겠는가?"

 이로 말미암아서 군대 안에서는 상을 부는 것과 벌을 주는 것이 공평하여 사람들이 그의 공정함에 복종하였다.

 「官無大小,皆國家公器,豈可茍便其私!」由是軍中賞罰皆平,人服其公。

 

 

 ④. 18일에 좌교위장군이며 백주 자사인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고리와 蛇水에서 싸우다가 군사가 패하니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소정방은 평양을 포위하고 오래 되어도 점령하지 못하고 마침 큰 눈이 내리자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④. 戊寅,左驍衞將軍白州刺史沃沮道總管龐孝泰〈白州,本漢合浦縣地,武德四年置南州,六年,改白州。沮,子余翻。〉與高麗戰於蛇水之上,軍敗,與其子十三人皆戰死。蘇定方圍平壤久不下,會大雪,解圍而還。

 

 

 ⑪. 7월, 30일에 웅진도독 유인원과 대방주 자사 유인궤가 백제를 웅진의 동쪽에서 크게 격파하고 眞峴城을 점령하였다.

 애초에, 유인원과 유인궤 등은 웅진성에 주둔하였는데, 황상이 그들에게 칙서를 보내었다.

 "평양의 군사들이 돌아오면 한 개의 성만으로는 홀로 굳게 할 수가 없으니 의당 발을 빼서 신라로 가야할 것이오. 만약에 김법민이 경에게 남아서 진수하기를 빌거든 의당 또한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고, 만약에 그들이 필요없다고 한다면 즉시 의당 바다에 배를 띄워서 돌아와야 할 것이오."

 장사들은 모두가 서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⑪. 丁巳,熊津都督劉仁願、帶方州刺史劉仁軌大破百濟於熊津之東,拔眞峴城。

初,仁願、仁軌等屯熊津城,〈《考異》曰︰去歲道琛、福信圍仁願於百濟府城,今云尚在熊津城,或者共是一城。不則圍解之後,徙屯熊津城耳。〉上與之敕書,以「平壤軍回,一城不可獨固,宜拔就新羅。若金法敏藉卿留鎭,宜且停彼;若其不須,卽宜泛海還也。」將士咸欲西歸。

 

 유인궤가 말하였다.

 "다른 사람의 신하는 공적인 집안의 이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며 죽음이 있을지언정 다른 것은 없는데 어찌하여 먼저 사사로운 것을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주상께서 고리를 멸망시키고자 하니 그러므로 먼저 백제를 멸망시킨 것이고 군사를 머물게 하여 이를 지켜서 그들의 심복들을 제압해야 하는데, 비록 남아 있는 오랑캐가 가득하여 배척하고 지키는 방비도 아주 엄하니 의당 무기를 버리고 말에게 먹이를 주어 그들이 뜻하지 않을 곳을 치면 이치로 못 이길 것이 없다.

 仁軌曰︰「人臣徇公家之利,有死無貳,豈得先念其私!主上欲滅高麗,故先誅百濟,留兵守之,制其心腹;雖餘寇充斥而守備甚嚴,宜礪兵秣馬,擊其不意,理無不克。

 

 이미 승리한 다음에는 사졸들의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고, 그러한 다음에 군사를 나누어서 험한 곳을 지키고 형세를 열어 벌려 놓고 표문을 날려 보고하면서 다시 군사를 더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旣捷之後,士卒心安,然後分兵據險,開張形勢,飛表以聞,更求益兵。

 

 조정에서는 그것이 성공한 것이 있음을 알고 반드시 명령을 내려서 곧 군사를 내보내어 성원하는 것이 겨우 이어지기만 하더라도 흉악하고 더러운 녀석들은 스스로 섬멸된다. 다만 성공한 것을 바라지 않는 것만이 아니고 실제로 또한 영원히 해외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朝廷知其有成,必命將出師,聲援纔接,凶醜自殲。〈將,卽亮翻。殲,息廉翻。〉非直不棄成功,實亦永清海表。

 

 지금 평양에 있던 군사들은 이미 돌아갔는데 웅진에서도 또 발을 빼면 백제의 타다 남은 것들은 해가 다하기 전에 다시 일어나니 고리의 도망하는 적들은 어느 때에 멸망시킬 수 있겠는가? 또 지금 한 개의 성을 가지고 적들의 중앙에 있는데, 만약에 혹 발을 움직이기만 하면 바로 잡혀서 포로가 될 것이며, 설사 신라로 들어간다고 하여도 또한 고삐에 매인 손님이니, 만약에 뜻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후뢰하여도 뒤쫓을 수가 없다.

 今平壤之軍旣還,熊津又拔,〈拔,謂拔軍就新羅,或拔軍西還也。〉則百濟餘燼,不日更興,高麗逋寇,何時可滅!且今以一城之地居敵中央,茍或動足,卽爲擒虜,縱入新羅,亦爲羈客,脫不如意,悔不可追。

 

 하물며 복신은 흉악하고 패역하며 잔학하여 군신이 시기하고 흩어져서 서로 도륙하는 일을 행하고 있는 경우에서이랴! 바로 의당 굳게 지키면서 변화하는 것을 살펴보다가 편리한 기회를 틈타서 이를 빼앗으려면 움직일 수는 없다."

 무리들이 이를 좇았다.

 況福信凶悖殘虐,君臣猜離,行相屠戮;正宜堅守觀變,乘便取之,不可動也。」衆從之。

 

 이때에 백제왕인 부여풍과 복신 등은 유인원 등이 외로운 성에서 원조를 받는 일도 없자 사신을 보내어 그들에게 말하였다.

 "대사께서는 어느 때에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시는지, 마땅히 재상을 파견하여 전송하겠소."

 유인원과 유인궤는 그들이 방비하는 것이 없음을 알고 홀연히 나아가서 그들을 쳐서 그들의 지라성과 尹城·大山·沙井 등의 성책을 탈취하고 죽이고 포로로 잡은 것이 아주 많았는데 군사를 나누어서 이를 지켰다.

 時百濟王豐與福信等以仁願等孤城無援,遣使謂之曰︰「大使等何時西還,當遣相送。」〈使,疏吏翻;下同。〉仁願、仁軌知其無備,忽出擊之,拔其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栅,殺獲甚衆,分兵守之。

 

 복신 등은 眞峴城이 험한 요새이어서 군사를 보태어 그곳을 지켰다. 유인궤는 그들이 조금 풀어진 틈을 엿보다가 신라의 군사를 이끌어서 밤중에 성 아래에 가까이 가게 하고 풀을 밟고 올라가서 밝을 때쯤에는 그 성으로 들어가서 점거하여 드디어 신라의 양식 운반로를 열었다. 유인원은 마침내 주문을 올려서 군사를 더 보태 줄 것을 청하니 조서를 내려서 淄州·靑州·萊州·海州의 군사 7천 명을 발동하여 웅진에 가게 하였다.

 福信等以眞峴城險要,加兵守之。仁軌伺其稍懈,引新羅兵夜傅城下,攀草而上,比明,入據其城,〈伺,相吏翻。懈,古隘翻。傅,音附。上,時掌翻。比,必寐翻。〉遂通新羅運糧之路。仁願乃奏請益兵。詔發淄、青、萊、海之兵七千人以赴熊津。〈史言劉仁軌能堅忍伺間,待援兵以盡平百濟。〉

 

 복신은 권력을 오로지하여 백제왕 부여풍과 더불어 점차로 서로 시기하게 되었다. 복신이 병이 들었다고 하면서 굴실에 누워서 부여풍이 병문안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부여풍은 이를 알고 친히 믿는 사람들을 인솔하여 복신을 습격하여 죽이고, 사신을 파견하여 고리와 왜국에 보내어 군사를 보내달라고 하면서 당의 군사를 막았다.

 福信專權,與百濟王豐浸相猜忌。福信稱疾,臥於窟室,欲俟豐問疾而殺之。豐知之,帥親信襲殺福信;〈果如劉仁軌所料。帥,讀曰率。〉遣使詣高麗、倭國乞師以拒唐兵。〈倭,烏禾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