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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고종 이치의 고리침략/ 驚蟄節末候膺化爲鳩 薔薇花風1日(陰2/3)壬戌

solpee 2021. 3. 14. 16:40

《唐紀16 高宗 龍朔 元》 (辛酉, 661)

 

 

 ①. 봄, 정원 19일에 하남과 하북의 687개 주의 군사를 모집하여 4만4천여 명을 얻어서 평양과 누방에 있는 행영으로 가게 하였다. 22일에 홍려경 소사업을 부여도행군총관으로 삼고 회흘 등의 여러 부의 군사를 인솔하여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①. 春,正月,乙卯,募河南北、淮南六十七州兵,得四萬四千餘人,詣平壤、鏤方行營。戊午,以鴻臚卿蕭嗣業爲扶餘道行軍總管,帥回紇等諸部兵詣平壤。〈臚,陵如翻。帥,讀曰率。紇,下沒翻。〉

 

 

 ③. 3월 초하루에 황상이 여러 신하와 외이와 더불어 낙성문에서 연회를 베풀면서 둔영에서 새로 가르친 무용을 관람하였는데, 이를 《一戎大定樂》이라 하였다.

 ③. 三月,丙申朔,上與羣臣及外夷宴於洛城門,〈《唐六典》︰洛陽宮城西北出曰洛城西門,其內曰德昌殿,德昌殿南出曰延慶門,又南曰韶暉門,西南曰洛城南門,其內曰洛城殿。〉觀屯營新敎之舞,謂之《一戎大定樂》。〈取一戎衣天下大定之義。舞者,百四十人,被五采甲,持槊而舞。劉昫曰︰《大定樂》出自《破陳樂》,自《破陳舞》以下,皆雷大鼓,雜以龜茲之樂,聲振百里,動蕩山谷。《大定樂》加金鉦,象平遼東而邊隅大定也。杜佑曰︰《大定樂歌》云︰「八紘同軌樂。」〉

 

 이때에 황상은 고리를 친히 정벌하려고 하여 무력의 위세를 사용하여 상징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時上欲親征高麗,以象用武之勢也。

 

 

 ④. 애초에 소정방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고 나자 낭장 유인원을 남겨두어 백제의 府城을 지키게 하였고, 또한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남은 무리들을 어루만지게 하였다. 왕문도는 바다를 건너다가 죽었고, 백제의 승려인 도침과 옛날 장수였던 복신이 무리를 모아서 주류성을 점거하고 옛날 왕의 아들인 부여풍을 왜국에서 영접하여서 그를 세우고 군사를 이끌고 유인원을 부성에서 포위하였다.

 ④. 初,蘇定方旣平百濟,留郎將劉仁願鎭守百濟府城,又以左衞中郎將王文度爲熊津都督,撫其餘衆。文度濟海而卒,〈卒,子恤翻。〉百濟僧道琛、故將福信聚衆據周留城,〈將,卽亮翻。〉迎故王子豐於倭國而立之,〈倭,烏禾翻。〉引兵圍仁願於府城。

 

 조서를 내려서 유인궤를 발탁하여 대방주 자사로 삼고 왕문도의 무리를 거느리고 편리한대로 길을 가서 신라의 군사를 징발하여 유인원을 구원하게 하였다. 유인궤는 기뻐서 말하였다.

 "하늘이 꼭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겠구나?"

 州司에서 당력과 묘휘를 요구하고서 떠나면서 말하였다.

 "내가 동이를 쓸어 평정하고 위대한 당의 정삭을 해외에 반포할 것이오."

 詔起劉仁軌檢校帶方州刺史,〈帶方州置於百濟界,因古地名以名州。《考異》曰︰《僉載》云︰「劉仁願以仁軌檢校帶方州刺史。」今從《本傳》。〉將王文度之衆,便道發新羅兵以救仁願。〈將,卽亮翻。〉仁軌喜曰︰「天將富貴此翁矣!」於州司請《唐曆》及廟諱以行,〈按劉仁軌自青州刺史白衣從軍,此蓋於青州州司請之也。〉曰︰「吾欲掃平東夷,頒大唐正朔於海表!」

 

 유인궤는 군사를 통제하는 것이 엄정하였고, 돌아다니며 싸우면서 나아갔는데, 향하는 곳마다 승리하였다. 

  백제가 웅지진강 입구에 구 개의 목책을 세우니, 유인궤가 신라 군사들과 합쳐서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였는데, 죽이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만여 명이었다. 도침은 마침내 부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서 임존성을 보존하였는데, 신라도 양식이 다하자 군사를 인솔하고 돌아갔다

 仁軌御軍嚴整,轉鬬而前,所向皆下。百濟立兩栅於熊津江口,仁軌與新羅兵合擊,破之,殺溺死者萬餘人。〈溺,奴狄翻。〉道琛乃釋府城之圍,退保任存城;〈任存城在百濟西部任存山。《考異》曰︰《實錄》或作「任孝城」,未知孰是。今從其多者。〉新羅糧盡,引還。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이라고 하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이라고 하면서 무리들을 불러모으니, 그 형세는 더욱 많아졌다. 유인궤의 무리는 적어서 유인원의 군사를 합쳐가지고 사졸들을 쉬게 하였다.

 道琛自稱領軍將軍,福信自稱霜岑將軍,招集徒衆,其勢益張。〈張,知亮翻。〉仁軌衆少,與仁願合軍,休息士卒。〈少,詩沼翻。〉

 

 황상은 조서를 내려서 신라에 출병하게 하자 신라왕 김춘추는 조서를 받들고 그의 장수인 김흠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유인궤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고사에 이르자 복신이 맞아 쳐서 그를 패배시켰다. 김흠은 葛嶺道에서 숨어서 신라로 돌아갔고 다시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복신은 얼마 있다가 도침을 죽이고 그 나라의 군사를 오로지 하였다.

 上詔新羅出兵,新羅王春秋奉詔,遣其將金欽將兵救仁軌等,至古泗,福信邀擊,敗之。〈將,卽亮翻。敗,補邁翻。〉欽自葛嶺道遁還新羅,不敢復出。〈復,扶又翻。〉福信尋殺道琛,專總國兵。

 

 

 ⑥. 4월 16일에 임아상을 패강도행군총관으로 삼고, 글필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삼고, 소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삼았으며, 소사업과 여러 흉노 병사들 무릇 35개의 군대와 더불어 육지와 바다로 길을 나누어서 나란히 나아가게 하였다.

 ⑥. 庚辰,以任雅相爲浿江道行軍總管,契苾何力爲遼東道行軍總管,蘇定方爲平壤道行軍總管,與蕭嗣業及諸胡兵凡三十五軍,水陸分道並進。

 

 황상은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고 그 뒤를 이으려고 하였는데, 29일에 황후가 반대하는 표문을 올려서 고리를 친히 정벌하는 것을 간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이를 좇았다.

 上欲自將大軍繼之;癸巳,皇后抗表諫親征高麗;〈麗,力知翻。〉詔從之。

 

 

 ⑧. 가을 7월 11일에 소정방이 고리를 패강에서 격파하고 여러번 싸워서 모두 승리하고 드디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⑧. 秋,七月,甲戌,蘇定方破高麗於浿江,屢戰皆捷,遂圍平壤城。

 

 

 ⑨. 9월, 1일에 특진인 신라왕 김춘추가 죽었다. 그의 아들인 김법민을 낙랑군왕·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⑨. 九月,癸巳朔,特進新羅王春秋卒;以其子法敏爲樂浪郡王、新羅王。〈卒,子恤翻。樂浪,音洛琅。〉

 

 

 ⑪. 고리의 연개소문은 그의 아들인 연남생을 파견하여 정에의 병사 수만을 가지고 압록수를 지키게 하여서, 여러 군사들은 건널 수가 없었다.

 ⑪. 高麗蓋蘇文遣其子男生以精兵數萬守鴨綠水,諸軍不得渡。

 

 글필하력이 도착하였는데 마침 물이 얼어서 크게 합쳐지자 글필하력은 무리를 이끌고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서 북을 울리며 나아가니 고리는 크게 무너졌고 달아나는 것을 쫓아서 수십리를 갔는데, 목을 벤 것이 3만 급이었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契苾何力至,值冰大合,何力引衆乘冰渡水,鼓譟而進,高麗大潰,追奔數十里,斬首三萬級,餘衆悉降,〈降,戶江翻。〉

 

 연남생은 겨우 몸만 죽음을 면하였다. 마침 군사를 회군기키라는 조사가 있어서 마침내 돌아왔다.

 男生僅以身免。會有詔班師,乃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