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이의부의 轉禍爲福/ 驚蟄節中候倉庚鳴(꾀꼬리 운다)棣棠花(산앵두)風4日(陰2/1)庚申

solpee 2021. 3. 12. 19:31

《唐紀15 高宗 永徽 6年》 (乙卯, 655)

 

 

 ④. 고리는 백제와 말갈의 군사와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경계를 침입하여 33개의 성을 빼앗았는데, 신라왕 김춘추는 사신을 파견하여 도와주기를 청하였다. 2월 25일에 영주(營州: 今 徐水 西北)도독 정명진과 좌위중랑장 소정방을 파견하여 군사를 발동하여 고리를 쳤다.

 ④. 高麗與百濟、靺鞨連兵,侵新羅北境,取三十三城;新羅王春秋遣使求援。〈使,疏吏翻。〉二月,乙丑,遣營州都督程名振、左衞中郎將蘇定方發兵擊高麗。〈將,卽亮翻。〉

 

 

 ⑤. 여름, 5월 14일에 정명진 등이 遼水(今 大淸河)를 건너니 고리는 그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문을 열고 貴端水(今 南拒馬河 高碑店 일대의 白沟河)를 건너서 맞아 싸웠는데, 정명진이 분발하여 쳐서 그들을 대파하고 죽이고 붙잡은 사람이 1천여 명이었고 그들의 외곽과 촌락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애꿎은 민간인만 살육하였다.)

 ⑤. 夏,五月,壬午,名振等渡遼水,高麗見其兵少,開門渡貴端水逆戰,〈按《舊書‧程名振傳》,貴端水當在新城西南。少,詩沼翻。〉名振等奮擊,大破之,殺獲千餘人,焚其外郭及村落而還。

 

 

 ⑧. 6월에 무소의는 황후와 그의 어머니인 위국부인 유씨가 엽승을 하였다고 무고하여 황후의 어머니인 유씨는 궁궐에 들어올 수 없게 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가을 7월 10일에 이부상서 유석을 깎아 내려서 수주 자사로 삼았다. 유석은 떠나서 부풍에 도착하였는데, 기주장사 우승소가 뜻에 영합하여 유석이 금중에서 있었던 말을 누설하였다고 상주문을 올리자 다시 여주 자사가 되었다.

 ⑧. 六月,武昭儀誣王后與其母魏國夫人柳氏爲厭勝,〈厭,於葉翻,又一琰翻。《考異》曰︰《舊傳》云︰「后懼不自安,密與母柳氏求巫祝厭勝,事發,故廢。」今從《實錄》。〉敕禁后母柳氏不得入宮。秋,七月,戊寅,貶吏部尚書柳奭爲遂州刺史。奭行至扶風,〈武德元年,分岐山置湋川縣,取湋水爲名;貞觀八年,更名扶風,屬岐州。《九域志》︰縣在州東八十里。〉岐州長史于承素希旨奏奭漏洩禁中語,復貶榮州刺史。〈榮州,漢南安江陽之地,隋爲大牢縣,屬資州,武德元年,分置榮州。復,扶又翻。〉

 

 당은 수의 제도를 이어받아서 후궁에는 貴妃·淑妃·德妃·賢妃 등이 있었는데 모두 1품으로 보았다. 황상은 특히 宸妃(신비)를 두어 무소의로 이것을 삼고자 하니, 한원과 내재가 간하면서, 고사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고 하여 마침내 이를 중지하였다.

 唐因隋制,後宮有貴妃、淑妃、德妃、賢妃,皆視一品。上欲特置宸妃,以武昭儀爲之,韓瑗、來濟諫,以爲故事無之,乃止。〈《考異》曰︰《唐曆》在此年四月,今據《實錄》。四月,韓瑗、來濟未爲侍中、中書令。《唐曆》又云︰「瑗、濟諫,帝不從。」按立武后詔書,猶云昭儀武氏。然則未嘗爲宸妃也。今從《會要》。〉

 

 중서사인 요양 사람 이의부는 장손무기가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벽주사마로 좌천되었다. 칙령이 아직 문하성에 이르지 않았는데, 이의부가 이를 비밀리에 알고 중서사인 유주(今 徐水) 사람 왕덕검에게 계책을 물었더니, 왕덕겸이 말하였다.

 中書舍人饒陽李義府爲長孫無忌所惡,〈惡,烏路翻。〉左遷壁州司馬。〈武德八年,析巴州始寧縣地置壁州。〉敕未至門下,義府密知之,問計於中書舍人幽州王德儉,德儉曰︰

 

 "황상께서 무소의를 황후로 삼고자 하지만 오히려 미루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재신들이 다른 논의를 할까 두려워하는 것 뿐입니다. 그대는 계책을 세워서 이를 수립한다면 화가 변하여 복이 될 것이오."

 이의부가 그러할 것으로 여겼다.

 「上欲立武昭儀爲后,猶豫未決者,直恐宰臣異議耳。君能建策立之,則轉禍爲福矣。」義府然之,

 

 이날 왕덕겸을 대신하여 숙직을 하였는데, 합문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표문을 올려서 '황후 왕씨를 폐위시키고 무소의를 세워서 억조나 되는 백성들의 마음을 만족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황상은 즐거워하여 불러서 보고 더불어 말을 하고서 구슬 1말을 주고 옛날 직책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였다.

 是日,代德儉直宿,叩閤上表,請廢皇后王氏,立武昭儀,以厭兆庶之心。〈厭,於葉翻。〉上悅,召見,與語,賜珠一斗,留居舊職。

 

 소의는 또 비밀리에 사자를 파견하여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잠시 후에 뛰어넘어서 중서시랑으로 벼슬을 주었다.

 昭儀又密遣使勞勉之,〈使,疏吏翻。勞,力到翻。〉尋超拜中書侍郎。〈《考異》曰︰《舊傳》云︰「高宗將立武后,義府密申叶贊,擢拜中書侍郎、同中書門下三品、監修國史,賜爵廣平縣男。」《新書‧本紀》、《年表》皆云「是歲七月,義府爲中書侍郎參知政事。」《實錄》但云「超拜中書侍郎」。《宰輔圖》︰「十一月,自中書侍郎參知政事。」今從之。〉

 

 이에 우위경 허종경·어사대부 최의현·중승 원공유가 모두 몰래 무소의에게 마음을 깔아 놓았다.

 於是衞尉卿許敬宗、御史大夫崔義玄、中丞袁公瑜皆潛布腹心於武昭儀矣。

 

*幽州

 1.今河北、山东境内黄河、济水故道,菑、时二水皆在今山东淄博市东临淄附近。

 2.山东马颊河,北抵内蒙古赤峰市、敖汉旗,西起河北万全县、涿鹿县、易县

 3.十六国时汉置幽州,镇离石县(今山西离石市);前赵置幽州,镇北地郡(今陕西耀县);后燕失中原后东保辽西,复置幽州,镇令支县(今河北迁安市西);北燕移镇肥如县(今河北卢龙县北);南燕置幽州,镇琅邪郡之发干(今山东临沂市);夏置幽州,镇大城(今内蒙古杭锦后旗东南)。

 4.东晋侨置幽州于三阿(今江苏高邮市西);淝水战后复得汉、晋青州之地,改置幽州,镇广固(今山东青州市)。

 5.北魏、东魏、北齐、隋、唐、五代梁、唐皆置幽州治蓟县,辖境渐次缩减,中唐后辖有今北京、天津一带,北抵长城,东南抵海河、蓟运河之地。后晋天福元年(936)割献契丹;辽会同元年(938)升为幽都府,建号南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