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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민의 고리침략5 (敗退). /驚蟄節初候桃始花菜花桃花風2日(陰1/23)癸丑

solpee 2021. 3. 5. 16:33

《唐紀14 太宗 貞觀 19》 (乙巳, 645)

 

 

 ②. 황상이 백암성에서 이기면서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안시의 성은 험하고 군사도 날카로우며 그 성주도 재주와 용기가 있어서 막리지가 어지럽힐 당시에도 성을 지키면서 복종하지 않자 막리지가 이를 쳤으나 점령할 수가 없어서 이어서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건안의 군사는 약하고 양식도 적어서 만약에 그들이 생각 못한 곳으로 나아가서 이를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공은 먼저 건안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고, 건안이 점령되면 안시는 우리들의 뱃속에 있게 되니 이 병법이 이른바 '성에는 공격하지 아니해야 할 것도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②. 上之克白巖也,謂李世勣曰︰「吾聞安市城險而兵精,其城主材勇,莫離支之亂,城守不服,莫離支擊之不能下,因而與之。建安兵弱而糧少,〈少,詩沼翻。〉若出其不意,攻之必克。公可先攻建安,建安下,則安市在吾腹中,此《兵法》所謂『城有所不攻』者也。」〈《孫子兵法》之言。〉

 

대답하였다.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사들의 양식은 요동에 있는데, 지금 안시를 넘어서 건안을 공격하다가 만약에 도적들이 우리들의 운송로를 끊게 된다면 장차 어찌합니까? 먼저 안시를 공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안시가 떨어지면 북을 울려며 가서 건안을 빼앗을 뿐입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공을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계책을 쓰지 않겠소. 나의 일을 그르치지 마시오."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를 공격하였다.

 對曰︰「建安在南,安市在北,吾軍糧皆在遼東;今踰安市而攻建安,若賊斷吾運道,將若之何?〈斷,丁管翻。〉不如先攻安市,安市下,則鼓行而取建安耳。」上曰︰「以公爲將,〈將,卽亮翻。〉安得不用公策。勿誤吾事!」世勣遂攻安市。

 

 안시 사람들은 황상의 깃발과 차개를 멀리서 보기만 하면 번번이 성에 올라가서 북을 두드리니 황상이 화를 내자, 이세적은 성을 이기는 날애 남자건 여자건 모두 이를 묻어버리게 해달라고 청구하였다. 안시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더욱 굳게 지키니 공격하기를 오랫동안 하여도 점령할 수 없었다.

 安市人望見上旗蓋,輒乘城鼓譟,上怒,世勣請克城之日,男女皆阬之,安市人聞之,益堅守,攻久不下。

 

 고연수와 고혜진이 황상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소인은 이미 몸을 대국에 맡겼으니 감히 그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으며, 천자께서 일찍 위대한 공로를 성취하셔서 소인도 처자와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시에 있는 사람들도 그 집안을 돌아보고 애석해 하여서 사람들이 스스로 싸우니 쉽게 점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소인은 고리의 10여만의 무리를 가지고서도 깃발을 바라보자 막히고 무너졌고, 나라 사람들의 간담이 깨졌고, 오골성의 욕살은 늙은이여서 굳게 지킬 수 없으니, 군사를 올겨서 그곳에 다가가면 아침에 가면 저녁에 이길 것입니다.

 高延壽、高惠眞請於上曰︰「奴旣委身大國,不敢不獻其誠,欲天子早成大功,奴得與妻子相見。安市人顧惜其家,人自爲戰,未易猝拔。〈易,以豉翻。〉今奴以高麗十餘萬衆,望旗沮潰,〈沮,在呂翻。〉國人膽破,烏骨城耨薩老耄,不能堅守,移兵臨之,朝至夕克。

 

 그 나머지 길에 있는 작은 성들은 반드시 풍문만 듣고도 달아나고 무너질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의 자재와 양식을 거두어 북을 치고 나아가면 평양은 반드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도 역시 말하였다.

 "장량의 군사가 沙城에 있으니 그를 부르면 이틀을 자면 도착할 수 있어서 고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올라타서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뽑고 압록수를 건너서 곧바로 평양을 빼앗아버리는 것은 이번 거사에 있습니다."

 其餘當道小城,必望風奔潰。然後收其資糧,鼓行而前,平壤必不守矣。」羣臣亦言︰「張亮兵在沙城,〈沙城卽卑沙城。〉召之信宿可至,乘高麗兇懼,〈兇,許拱翻。〉倂力拔烏骨城,渡鴨綠水,直取平壤,在此舉矣。」

 

 황상이 장차 이를 좇으려 하는데 홀로 장손무기가 말하였다.

 "천자가 친히 정벌을 나왔으니, 제장이 온 경우와 달라서 위험을 타고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지금 건안신성에 있는 오랑캐들은 무리가 10여만인데 만약에 오골을 향한다면 모두가 우리의 뒤를 밟아 올 것이니 먼저 안시를 격파하고 건안을 빼앗은 다음에 멀리까지 달려 나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니, 이것이 만 가지가 다 안전한 대책입니다."

 황상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上將從之,獨長孫無忌以爲︰「天子親征,異於諸將,不可乘危徼幸。〈徼,古堯翻。〉今建安、新城之虜,衆猶十萬,若向烏骨,皆躡吾後,不如先破安市,取建安,然後長驅而進,此萬全之策也。」上乃止。〈太宗之定天下,多以出奇取勝,獨遼東之役,欲以萬全制敵,所以無功。〉

 

 여러 군사들이 급히 안시를 공격하는데 황상은 성 안에 있는 닭과 돼지의 소리를 듣고서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성을 포위한 지 오래 되었는데 성 안에서는 연기와 불이 날로 미미해져가고 지금에는 닭과 돼지가 심하게 시끄러우니, 이는 반드시 군사들에게 잡아 먹이는 것이고 반드시 밤중에 나와서 우리를 습격하려는 것인데, 의당 군사를 엄히 하여 이를 대비하시오."

 이날 밤에 고리군 수백 명이 성에 줄을  매달아 내려왔다. 황상이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성 아래에 이르러서 병사를 불러서 급히 쳐서 목을 벤 것이 수십 급이었는데 구리는 물러나서 도망하였다

 諸軍急攻安市,上聞城中雞彘聲,謂李世勣曰︰「圍城積久,城中煙火日微,今雞彘甚喧,此必饗士,欲夜出襲我,宜嚴兵備之。」是夜,高麗數百人縋城而下。〈縋,馳僞翻。〉上聞之,自至城下,召兵急擊,斬首數十級,高麗退走。

 

 강하왕 이도종이 무리를 감독하여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토산을 쌓고 그 성을 조금씩 압박하자 성 안에서도 역시 그 성을 더 높이 쌓아서 이를 막았다. 사졸들이 차례를 나누어서 교대로 싸우는데, 하루에 여섯 번에서 일곱 번 교전하엿으며, 충차와 포석으로 그 성루를 파괴하였더니 성 안에서는 따라서 목책을 세워서 그 부서진 부분을 막았다. 이도종은 발을 다쳤는데 황상이 친히 그를 위하여 침을 놓았다. 토산을 쌓는 일을 밤낮으로 쉬지 않아서 무릇 60일(이미 앞에서 닭 돼지를 잡아 먹었는데 60일을 견뎠다는 것은 이치가 맞지 않다)이나 되었는데 공력은 들인 것은 50만의 분량이었고, 토산 꼭대기에서 성곽까지는 몇 장 정도 떨어져 있어서 내려가서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이도종이 과의인 부복애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토산 꼭대기에서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江夏王道宗督衆築土山於城東南隅,浸逼其城,城中亦增高其城以拒之。士卒分番交戰,日六、七合,衝車礮石,壞其樓堞,〈礮,與砲同,匹皃翻。壞,音怪。〉城中隨立木栅以塞其缺。道宗傷足,上親爲之針。〈塞,悉則翻。爲,于僞翻。〉築山晝夜不息,凡六旬,用功五十萬,山頂去城數丈,下臨城中,道宗使果毅傅伏愛將兵屯山頂以備敵。

 

 토산이 무너져서 성을 눌러버리니 성이 무너졌는데, 마침 부복애는 사사롭게 거느리는 부대를 떠났었고, 고리사람 수백 명이 성이 부서진 곳으로 나와서 싸우고 드디어 토산을 빼앗아 점거하고 참호를 파고 이를 지켰다.

 황상은 화가 나서 부복애를 목 배어서 조리를 돌리고 제장에게 이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사흘 동안에도 이길 수가 없었다. 이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까지 가서 죄를 받게 해달라고 청하였더니, 황상이 말하였다.

 "너의 죄는 마땅히 사형이다. 그러나 짐은 한의 무제가 왕회를 죽인 것이 진 목공이 맴영을 채용한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또 개모요동을 격파한 공로를 가지고 있으니 그러므로 특별히 너를 용서할 뿐이다."

 山頹,壓城,城崩;會伏愛私離所部,〈離,力智翻。〉高麗數百人從城缺出戰,遂奪據土山,塹而守之。〈塹,七豔翻。〉上怒,斬伏愛以徇,命諸將攻之,三日不能克。道宗徒跣詣旗下請罪,上曰︰「汝罪當死,但朕以漢武殺王恢,〈見十八卷元光二年。〉不如秦穆用孟明,〈秦穆公使孟明帥師東伐,再爲晉師所敗,穆公復用孟明。孟明增脩其政,帥師伐晉,晉人不敢出,遂霸西戎。〉且有破蓋牟、遼東之功,故特赦汝耳。」

 

 황상은 요좌는 일찍 추워지고 풀은 마르고 물은 얼어서 병사와 말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며 또 양식이 장차 떨어지려 하여서 9월, 18일에 군사를 회군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먼저 요주개주 두 주의 호구를 차출하여 요수를 건너게 하고 마침내 안시성 아래에서 군사를 시위하면서 선회하였는데, 성 안에서는 모두가 흔적을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성주가 성에 올라가서 절하며 인사하니 황상은 그가 굳게 지킨 것을 칭찬하고 비단 100필을 내려주면서 임금을 섬긴 것을 격려하였다. 이세적과 강하왕 이도종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을 거느리고 후위를 맡게 하였다.

 上以遼左早寒,草枯水凍,士馬難久留,且糧食將盡,癸未,敕班師。先拔遼、蓋二州戶口渡遼,乃耀兵於安市城下而旋,城中皆屛迹不出。〈屛,必郢翻。〉城主登城拜辭,上嘉其固守,賜縑百匹,〈縑,幷絲繒也。〉以勵事君。命李世勣、江夏王道宗將步騎四萬爲殿。〈殿,丁練翻。〉

 

 20일에 요동에 이르렀고 21일에 요수를 건넜다. 요택은 진흙벌판이어서 수레와 말이 통행하지 못하자 장손무기에게 명령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잘라서 길에 메우도록 하였고, 물이 깊은 곳에는 수레를 교량으로 삼아는데, 황상은 스스로 나무를 말의 안장걸이에 묶어서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 1일에 황상이 포구에 이르러서 말을 세우고 도로를 메운 여러 군사들을 독려하여 발착수를 건너게 하는데, 폭풍 속에 눈이 내리니 사졸들은 옷이 젖어서 많은 사람이 죽자 칙령을 내려서 길에다 불을 지피면서 그들을 기다렸다.

 乙酉,至遼東。丙戌,渡遼水。遼澤泥潦,車馬不通,命長孫無忌將萬人,翦草塡道,水深處以車爲梁,上自繫薪於馬鞘以助役。〈將,卽亮翻。鞘,所交翻,鞭鞘也。按孔穎達《禮記正義》曰︰弓頭爲鞘。此所謂馬鞘,蓋馬鞍頭也。〉冬,十月,丙申朔,上至蒲溝駐馬,督塡道諸軍渡渤錯水,〈蒲溝、渤錯水,皆在遼澤中。〉暴風雪,士卒沾濕多死者,敕然火於道以待之。

 

 무릇 고리를 정벌하면서 玄菟、橫山、蓋牟、磨米、遼東、白巖、卑沙、麥谷、銀山、後黃의 열 개의 성을 점령하고, 遼州、蓋州、巖州의 세 주의 호구를 옮겨서 중국에 들여온 사람이 7만 명이었다. 新城·建安·駐에서 있었던 세 번의 큰 전투에서 목을 벤 것이 4만여 급이었고, 전투하다가 죽은 병사가 거의 2천 명이었고, 전마로 죽은 것은 열에 일고여덟 마리였다.

 황상은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위징이 만약에 있었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번 행동을 하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역마를 달려서 위징에게 소뢰의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하고 다시 만들어던 비를 세우게 하고, 그의 처자를 불러서 행재소로 오게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상을 내렸다.

 凡征高麗,拔玄菟、橫山、蓋牟、磨米、遼東、白巖、卑沙、麥谷、銀山、後黃十城,〈菟,同都翻。磨,莫臥翻。〉徙遼、蓋、巖三州戶口入中國者七萬人。〈《考異》曰︰《實錄》上云,「徙三州戶口入內地者,前後七萬人」;下癸丑詔書云,「獲戶十萬,口十有八萬」。蓋幷不徙者言之耳。〉新城、建安、駐驆三大戰,斬首四萬餘級,戰士死者幾二千人,〈幾,音祁,近也。〉戰馬死者什七、八。上以不能成功,深悔之,歎曰︰「魏徵若在,不使我有是行也!」命馳驛祀徵以少牢,〈少,詩照翻。〉復立所製碑,〈踣碑見上卷十七年。〉召其妻子詣行在,勞賜之。〈勞,力到翻。〉

 

 11일에 영주에 도착하여서 조서를 내려서 요동에서 사망한 사졸들의 해골을 유성의 동남쪽에 모아 놓게 하고 유사에게 명령하여 대뢰의 제사를 마련하게 하였는데, 황상은 스스로 글을 지어서 그들에게 제사 지냈는데, 곡을 하게 되자 애도함을 극진히 하였다.

 그 부모들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내 아이가 죽었는데 천자가 그에게 곡을 하였다니, 죽었다 하여 어찌 한스러워 하겠는가?"

 황상이 설인귀에게 말하였다.

 "짐의 제장들은 모두 늙었으니 신진의 날래고 용감한 사람을 얻어서 이를 거느리게 하려고 생각하는데, 경 만한 사람이 없으니 짐이 요동을 얻은 것을 기뻐하지 않지만 경을 얻은 것을 기뻐하오,"

 丙午,至營州。〈營州至洛陽二千九百一十里。〉詔遼東戰亡士卒骸骨並集柳城東南,命有司設太牢,上自作文以祭之,臨哭盡哀。其父母聞之,曰︰「吾兒死而天子哭之,死何所恨!」上謂薛仁貴曰︰「朕諸將皆老,思得新進驍勇者將之,〈將,卽亮翻。驍,堅堯翻。〉無如卿者,朕不喜得遼東,喜得卿也。」

 

 21일에 황상은 태자가 받들어 영접하려고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비기 3000명을 좇게 하고서 말을 달려서 임유관으로 들어갔고, 길에서 태자를 만났다.

 丙辰,上聞太子奉迎將至,從飛騎三千人馳入臨渝關,〈漢遼西郡有臨渝縣。《唐志》,營州有渝關守捉城。杜佑曰︰臨渝關在平州盧龍縣城東百八十里。騎,奇寄翻。師古曰︰渝,音喻。〉道逢太子。

 

 황상이 주를 출발하면서 입고 있는 갈포를 가리키며 태자에게 말하였다.

 "너를 볼 때까지 기다려서야 마침내 이 갈포를 바꾸어 입겠다."

 요좌에 있으면서 비록 한창 무더워서 땀을 흘렸으나 바꾸어 입지 않았다. 가을이 되어 구멍이 뚫리고 해지니 좌우에서 그것을 바꾸어 입도록 청하였으나 황상이 말하였다.

 "군사들의 옷은 대부분 해졌는데 나 홀로 새 옷을 입어야 옳단 말인가?"

 이에 이르러서 태자가 새 옷을 올리니 마침내 이를 바꾸어 입었다.

 上之發定州也,指所御褐袍謂太子曰︰「俟見汝,乃易此袍耳。」在遼左,雖盛暑流汗,弗之易。及秋,穿敗,左右請易之,上曰︰「軍士衣多弊,吾獨御新衣,可乎?」至是,太子進新衣,乃易之。

 

 여러 군사들이 포로로 잡은 고리의 백성 1만4천 명은 먼저 유주에 모았다가 장차 군사들에게 상을 주려고 하였지만 황상은 그들이 부자와 부부가 떨어지고 흩어지는 것을 부랑하게 여겨서 유사에게 명령하여 그들의 값을 매기게 하고 모두 전이나 포를 가지고 대신주고 풀어서 민으로 삼으니 환호하는 소리가 사흘 동안 쉬지 않았다. 11월 7일에 거가가 유주에 이르렀더니 고리의 백성들이 성의 동쪽에서 영접하며 절하고 춤추며 환호하였는데, 땅에서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여 먼지가 바라보였다.

 諸軍所虜高麗民萬四千口,先集幽州,將以賞軍士,上愍其父子夫婦離散,命有司平其直,悉以錢布贖爲民,讙呼之聲,三日不息。〈讙,許爰翻。〉十一月,辛未,車駕至幽州,高麗民迎於城東,拜舞呼號,〈號,戶高翻。〉宛轉於地,塵埃彌望。

 

 16일에 역주의 경계를 통과하는데 사마 진원숙이 백성들로 하여금 땅을 파고 불씨를 모아 두고서 채소를 심었다가  이를 올렸다. 황상이 그가 아첨하는 것을 싫어하여 진한숙의 관직을 면직시켰다.

 22일에 거가가 정주에 도착하였다.

 23일에 이부상서 양사도가 채용한 사람의 대부분이 적당한 인재가 아니었다는 죄에 걸려서 공부상서로 좌천되었다.

 庚辰,過易州境,司馬陳元璹使民於地室蓄火種蔬而進之;上惡其諂,免元璹官。〈璹,殊玉翻。惡,烏路翻。〉

丙戌,車駕至定州。

丁亥,吏部尚書楊師道坐所署用多非其才,左遷工部尚書。

 

 28일에 거가가 정주를 출발하였다. 12월 7일에 황상이 종기가 나는 병에 들어 보연에 올라서 갔는데, 14일에 병주에 도착하니, 태자가 황상을 위하여 종기를 입으로 빨았으며, 연을 부축하며 걸어서 좇기를 며칠 동안 하였다. 17일에 황상의 병이 나아서 백관들이 모두 경하하였다.

 壬辰,車駕發定州。十二月,辛丑,上病癰,御步輦而行。戊申,至幷州,太子爲上吮癰,扶輦步從者數日。〈爲,于僞翻。吮,徐兗翻。從,才用翻。〉辛亥,上疾瘳,百官皆賀。〈瘳,丑留翻。〉

 

 황상이 고리를 정벌하면서 우령군대장군인 집실사력으로 하여금 돌궐 사람들을 거느리고 하주의 북쪽에 주둔하여 설연타를 대비하게 하였다. 설연타에서는 다미가한이 이미 즉위하였는데, 황상은 출정하였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군사를 이끌고 하남을 노략질하니 황상은 좌무후중랑장인 장안 사람 전인회를 파견하여 집실사력과 함께 군사를 합쳐서 이들을 치게 하였다. 집실사력은 파리한 모습으로 거짓 퇴각하며 그들을 유인하여 깊이 들어오게 하고, 하주의 경내에 들어오게 되자 진을 정비하고 그들을 기다렸다. 설연타는 대패하니 뒤쫓아서 600여 리를 달려가서 사막의 북쪽에 위엄을 빛내고 돌아왔다.

 上之征高麗也,使右領軍大將軍執失思力將突厥屯夏州之北以備薛延陀。〈力將,卽亮翻;下同。夏,戶雅翻。〉薛延陀多彌可汗旣立,以上出征未還,引兵寇河南,〈河南者,北河之南,卽朔方、新秦之地。〉上遣左武候中郎將長安田仁會與思力合兵擊之。思力羸形僞退,誘之深入,及夏州之境,整陳以待之。〈羸,倫爲翻。誘,音酉。陳,讀曰陣。〉薛延陀大敗,追奔六百里,耀威磧北而還。〈磧,七迹翻。還,從宣翻,又如字。《考異》曰︰《高宗實錄》云︰「會延陀死,耀威漠北而還。」其意指眞珠爲延陀也。按眞珠憚太宗威靈,不敢入寇,又死在九月;而此云冬來寇,必非眞珠也。《田仁會傳》作十八年,亦誤也。〉

 

 ...................................................하략..........................................

 多彌復發兵寇夏州;〈武德三年,分幷州之樂平、遼山、平城、石艾置遼州樂平郡;八年,改曰箕州。後周置蔚州於漢代郡之靈丘,隋廢州,以靈丘縣屬肆州;唐武德六年,分肆州之靈丘、易州之飛狐地置蔚州。雲州,雲中郡,貞觀十四年自朔州北定襄城徙治定襄縣,其地實隋馬邑郡之雲內縣恆安鎭,卽漢魏所都平城也。開元十八年,改定襄縣爲雲中縣。蔚,紆勿翻。〉右衞大將軍代州都督薛萬徹,左驍衞大將軍阿史那社爾,發勝、夏、銀、綏、丹、延、鄜、坊、石、隰十州兵鎭勝州;〈勝州,隋之榆林郡。後魏舊有銀州,隋廢爲儒林縣,屬綏州;貞觀二年,分綏州之儒林、眞鄕縣復置銀州銀川郡,漢西河之圁陰、圁陽縣地也。圁,音銀。杜佑曰︰銀州,春秋白狄地,治儒林縣,漢圁陰縣地。丹州,古孟門河西之地;西魏置汾州義川郡,後改州爲丹州。隋廢州及郡,以義川縣屬延州。義寧元年,分延州之義川、咸寧、汾川置丹州咸寧郡。坊州,春秋白狄之地;姚興置中部縣,後魏置中部郡。隋廢郡,以中部縣屬敷州。武德二年分鄜州,置坊州中部郡,以周天和七年,元皇帝放牧鄜州,於此置馬坊也。鄜,音膚。〉勝州都督宋君明,左武候將軍薛孤吳,發靈、原、寧、鹽、慶五州兵鎭靈州;〈西魏於五原置西安州,後改爲鹽州,隋廢州爲鹽川郡,貞觀二年復置鹽州。〉又令執失思力發靈、勝二州突厥兵,與道宗等相應。薛延陀至塞下,知有備,不敢進。

 

*野史에는 당군이 30만이 출병하여 모두 죽고 3만 명 정도 돌아왔으며 이세민은 안시성에서 왼쪽 눈을 실명하는 부상을 당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평양은 지금의 요양이요 주 전투는 당시의 요동인 북경일원과 평천 능원 수중 건창 흥성 일원에서 있었다. 당시의 압록수는 지금의 대릉하였으며 대릉하는 건너지도 못하였다. 당사에서는 전공은 부풀리고 전사상자는 엄청나게 줄였다. 중국 최고의 통치였다는 貞觀之治도 수 문제 양견의 開皇之治의 따라하기에 불과 하였으며 643년 위징이 죽자 폭군으로 변신 되었다. 또한 당 태종 이세민은 수 양제 양견과 같이 한족과 선비족의 혼혈이었다. 이세민의 아버지 이연은 수 양제 양광과 이종사촌 간 이면서 수 문제가 주 황제의 고명을 받고도 황위를 찬탈 하였듯이 이연 또한 조카의 황권을 찬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