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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민의 고리 침략 2/雨水節末候草木萌動菜花李花風3日(陰1/19)己酉

solpee 2021. 3. 1. 20:41

《唐紀13 太宗 貞觀 18》 (癸卯, 644)

 

 

 ⑯. 곽효각이 언기왕 용돌기지와 그의 처자에게 족쇄를 채워서 행재소에 이르렀는데 그를 용서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17일에 황상이 태자에게 말하였다.

 "언기왕은 현명한 보필자를 찾지 않고, 충성스러운 꾀를 채용하지 않아서 스스로 멸망하여 목이 묶이고 손이 묶여서 만 리를 떠돌며 흔들렸으니, 사람이 이것을 두렵게 생각한다면 두려운 것을 안다고 할 수 있다."

  29일에 면지의 천지에서 사냥을 하였고, 11월 2일에 낙양에 도착하였다.

 ⑯. 郭孝恪鎖焉耆王突騎支及其妻子詣行在,敕宥之。丁巳,上謂太子曰︰「焉耆王不求賢輔,不用忠謀,自取滅亡,係頸束手,漂搖萬里;人以此思懼,則懼可知矣。

己巳,畋于澠池之天池;〈澠池縣,漢、晉屬弘農郡,後魏置澠池郡,後周置河南郡,大象中廢郡,以縣屬洛州,唐屬穀州。酈道元曰︰熊耳山際有池,池水東南流,水側有一池,世謂之澠池。澠,彌兗翻。〉十一月,壬申,至洛陽。

 

 전에 의주 자사였던 정원숙은 이미 치사하였는데, 황상은 그가 일찍이 수 양제를 좇아서 고리를 정벌하였었기 때문에 불러서 행재소로 오게 하여 그에게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요동까지의 길은 멀고 양식의 운반도 어렵고 막히는데 동이들은 성을 잘 지켜서 이를 공격하여도 급히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오늘날은 수에 비할 바가 아니니 공은 다만 듣기만 하시오."

 前宜州刺史鄭元璹,已致仕,上以其嘗從隋煬帝伐高麗,〈鄭元璹仕隋,爲右武候將軍,從伐高麗。璹,殊玉翻。〉召詣行在;問之,對曰︰「遼東道遠,糧運艱阻;東夷善守城,攻之不可猝下。」上曰︰「今日非隋之比,公但聽之。」〈帝所謂恃國家之大,甲兵之強,算略之足,以取勝,欲見威於敵者也。〉

 

 장검 등이 遼水(今 大淸河, 南拒馬河다. 당시 海河는 바다였다.)의 물이 불어서 건널 수 없자 황상은 두려워하고 나약하다고 생각하고 장검을 불러서 낙양으로 오게 하였다. 도착하여 산천의 험한 곳과 물이나 풀이 좋고 나쁜 것을 갖추어 진술하니, 황상이 기뻐하였다.

 황상은 洺州(今 邢台 南西) 자사 정명진이 용병을 잘하니 불러서 방략을 묻고 그의 재주가 민첩한 것을 칭찬하고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말하였다.

 "경은 장상의 그것을 가지고 있으니, 짐이 바야흐로 장차 사명을 맡기겠소."

 張儉等值遼水漲,久不得濟,上以爲畏懦,召儉詣洛陽。至,具陳山川險易,水草美惡;〈懦,乃臥翻,又奴亂翻。易,以豉翻。〉上悅。

上聞洺州刺史程名振善用兵,召問方略,嘉其才敏,勞勉之,曰︰〈洺,音名。勞,力到翻。〉「卿有將相之器,〈將,卽亮翻。相,息亮翻。〉朕方將任使。」

 

 정명진은 실수하여 절하고 감사하지 않았는데, 황상이 시험적으로 나무라며 화를 내며 그가 하는 것을 보려고 말하였다.

 "산동의 시골 녀석이 한 개의 자사 직책을 갖게 되니 부귀함이 극에 달하였다고 생각하였는가? 감히 천자 옆에서 말하는 것이 거칠고 또한 다시 절도 하지 않다니!"

 정명진이 사죄하며 말하였다.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신은 아직 일찍이친히 성스러운 질문을 받든 적이 없었고, 마음속으로 대응할 것을 생각하였으니, 그러므로 절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名振失不拜謝,上試責怒,以觀其所爲,曰︰「山東鄙夫,得一刺史,以爲富貴極邪!敢於天子之側,言語粗疏;又復不拜!」〈復,扶又翻。〉名振謝曰︰「疏野之臣,未嘗親奉聖問,適方心思所對,故忘拜耳。」

 

 행동거지가 태연자약하였고 응대하는 것은 더욱 분명하게 말하였다. 황상이 이에 감탄하며 말하였다.

 "방현령은 짐의 좌우에 20여 년 동안 있었는데, 매번 짐을 볼 때마다 나머지 사람을 견책하면 안색이 제 모습을 갖지 못하였다. 정명진은 평생 동안 짐을 일찍이 보지도 못하였었는데, 짐이 하루아침에 그를 책망하였지만 일찍이 두렵고 떨리는 기색이 없었고 말의 조리도 잃지 않으니 정말로 기이한 인사로다."

 그날로 우교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舉止自若,應對愈明辯。上乃歎曰︰「房玄齡處朕左右二十餘年,每見朕譴責餘人,顏色無主。〈此玄齡所以爲忠謹也。處,昌呂翻。〉名振平生未嘗朕,朕一旦責之,曾無震懾,辭理不失,眞奇士也!」卽日拜右驍衞將軍。〈懾,之涉翻。驍,堅堯翻。〉

 

 24일에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江州·淮州·嶺州·峽州의 군사 4만을 인솔하고, 장안·낙양에서 모집한 병사 3천과 전함 500척을 인솔하고 내주에서 바다에 배를 띄워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고,  또한 태자첨사·좌위솔인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과 蘭州·河州 두 주에 있는 항복한 호족들을 인솔하고 요동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양군의 세력을 합쳐서 같이 나아가게 하였다.

 甲午,以刑部尚書張亮爲平壤道行軍大總管,帥江、淮、嶺、峽兵四萬,〈硤中諸州,夔、硤、歸是也。帥,讀曰率;下同。〉長安、洛陽募士三千,戰艦五百艘,自萊州泛海趨平壤;〈艦,戶黯翻。艘,蘇遭翻。趨,七諭翻。〉又以太子詹事、左衞率李世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帥步騎六萬及蘭、河二州降胡趣遼東,〈率,所律翻。騎,奇寄翻。降,戶江翻。趣,與趨同,音七喻翻。〉兩軍合勢並進。

 

 30일에 여러 군대가 幽州(今 定州)에서 크게 모여서 행군총관 강행본과 소부소감 구행엄을 파견하여 먼저 많은 공인들을 감독하여 안라산에서 운제와 충차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에 멀고 가까이에 있는 용사들 가운데 모집에 호응한 사람과 성곽을 공격하는 기계를 바친 사람은 헤아릴 수가 없이 많았는데, 황상이 모두 친히 덜어내거나 덧붙이며 그 가운데 편리한 것을 선택하였다.

 庚子,諸軍大集於幽州,遣行軍總管姜行本、少府少監丘行淹先督衆工造梯衝於安蘿山。時遠近勇士應募及獻攻城器械者不可勝數,上皆親加損益,取其便易。〈勝,音升。易,以豉翻。〉

 

 또 손수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고리의 연개소문이 주군을 시해하고 백성들을 학대하니 마음으로 어찌 참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유주와 계주를 순행하며 요동과 갈석산에서 죄를 묻는데, 지나가는 곳에서 군영을 세우고 주둔하려고 하는 것이며 수고롭게 비용을 들지 않게 할 것이다. "

 又手詔諭天下,以「高麗蓋蘇文弒主虐民,情何可忍!今欲巡幸幽、薊,問罪遼、碣,〈碣,其謁翻。〉所過營頓,無爲勞費。」

 

 또 말하였다.

 "옛날에 수의 양제는 그 아랫사람들에게 잔인하고 포학하였고, 고리의 왕은 그 백성들에게 어질고 아껴서 어지러움을 생각하였으니, 어지러운 군사를 가지고 편안하고 화합된 무리들을 공격하였고 그러므로 성공할 수 없었다. 지금 대략 승리할 수 있는 길에는 다섯 가지가 있음을 말하겠다.

 且言︰「昔隋煬帝殘暴其下,高麗王仁愛其民,以思亂之軍擊安和之衆,故不能成功。今略言必勝之道有五︰

 

 천 번째로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순종하는 것으로 거역하는 것을 토벌하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잘 다스려진 것으로 혼란한 틈을 타는 것이며, 네 번째로 편안한 자세로 수고로운 것을 맞는 것이며, 다섯 번째로는 기쁜 마음을 가진 것으로 원망하는 것을 감당하는 것이니,  어찌 이기지 못할까를 걱정하겠는가?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노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에 무릇 주둔하고 머무는데 드는 비용을 갖추는데 줄어든 것이 태반이었다.

 一曰以大擊小,二曰以順討逆,三曰以治乘亂,〈治,直吏翻。〉四曰以逸待勞,五曰以悅當怨,何憂不克!布告元元,勿爲疑懼!」〈太宗以高麗爲必可克而卒不克,所謂常勝之家,難與慮敵也。〉於是凡頓舍供費之具,減者太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