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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藥利病,苦言利行[kǔ yào lì bìng,kǔ yán lì xíng]/ 雨水節初候獺祭魚菜花風5日(陰1/11)辛丑

solpee 2021. 2. 21. 10:31

《唐紀12 太宗 貞觀 16》 (壬寅, 642)

 

 

 ①. 봄, 정월, 9일에 위왕 이태가 《括地志》를 올렸다. 이태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사마 소욱이 이태에게 유세하기를 옛날의 현명한 왕은 모두 선비를 초빙하여 책을 지었다고 하였으므로 이태가 이를 상주하여 허락하여 달라고 청하여 이를 지은 것이다.

 ①. 春,正月,乙丑,魏王泰上《括地志》。〈上,時掌翻;下同。〉泰好學,司馬蘇勗說泰,以古之賢王皆招士著書,故泰奏請脩之。〈時泰奏引蕭德言、顏胤、蔣亞卿、許偃等就府脩撰。好,呼到翻。說,輸芮翻。〉

 

 이에 크게 관사를 열고 당시의 뛰어난 인재를 널리 부르니 인물들이 길에 메어지게 몰려들어 그 집 문의 뜰은 저자와 같았다. 이태의 매월 급여는 태자를 뛰어 넘었는데, 간의대부 저수량이 상소하였다.

 於是大開館舍,廣延時俊,人物輻湊,門庭如市。泰月給踰於太子,諫議大夫褚遂良上疏,以爲︰

 

 "성인께서 예를 만들면서 적자를 높이고 서자를 낮추셨으며, 세자가 쓰는 물품을 계산하지 않는 것은 제왕 된 사람과 이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서자는 비록 아껴주기는 하지만 적자를 뛰어 넘을 수는 없는 것은 혐의가 조금씩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는 때문이고 화란의 근원을 없애려는 것입니다. 만약에 마땅히 가까워야 될 사람이 멀어지고 마땅히 높혀야 될 사람이 낮아진다면 아첨하고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이 기회를 타고 움직입니다.

 「聖人制禮,尊嫡卑庶,世子用物不會,與王者共之。〈《周禮》︰王及世子惟膳不會,其他服物,世子猶皆會。會,古外翻。〉庶子雖愛,不得踰嫡,所以塞嫌疑之漸,除禍亂之源也。若當親者疏,當尊者卑,則佞巧之姦,乘機而動矣。

 

 옛날에 한의 두태후가 양효왕을 총애하였다가 끝내는 걱정하다가 죽었으며, 宣帝는 회양헌왕을 총애하다가 역시 거의 실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위왕은 궁궐 문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서 의당 예의 규칙을 보이고 겸손과 검약으로 교훈하여야 마침내 좋은 그릇이 될 것이고, 이것이 이른바 '성인의 가르침은 엄숙하게 하지 않아도 완성된다.'는 경우일 것입니다."

 황상이 이를 좇았다.

 昔漢竇太后寵梁孝王,卒以憂死;〈見《漢景帝紀》。塞,悉則翻。卒,子恤翻。〉宣帝寵淮陽憲王,亦幾至於敗。〈見《宣帝》、《元帝紀》。幾,居希翻;下同。〉今魏王新出閤,宜示以禮則,訓以謙儉,乃爲良器,此所謂『聖人之敎不肅而成』者也。」〈《孝經》載孔子之言。〉上從之。

 

 황상이 또한 이태로 하여금 무덕전으로 옮겨서 살라고 하였느데, 위징이 편지를 올려서 말하였다.

 "폐하께서 위왕을 총애하셔서 항상 그로 하여금 안전하게 하고자 하시는데, 의당 매번 그의 교만하고 사치함을 억눌러서 혐의를 받을 곳에 있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이 전각으로 옮겨 살게 하니 마침내 동궁의 서쪽이고, 해릉(이세민의 동생 이원길)이 예전에 일찍이 기거하였으므로 이때의 사람들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비록 시대는 다르고 일도 다르지만 그러나 역시 위왕이 마음속으로 편안하게 쉬게 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거의 이러한 오해에 이르렀구나."

 급히 이태를 보내어 그의 저택으로 가게 하였다.

 上又令泰徙居武德殿;魏徵上書,以爲︰「陛下愛魏王,常欲使之安全,宜每抑其驕奢,不處嫌疑之地。〈處,昌呂翻。〉今移居此殿,乃在東宮之西,海陵昔嘗居之,〈元吉追封海陵剌王。〉時人不以爲可;雖時異事異,然亦恐魏王之心不敢安息也。」上曰︰「幾致此誤。」遽遣泰歸第。

 

 

 ⑦. 6월, 20일에 조서를 내려서 황태자가 부고에 있는 물건을 꺼내서 사용하는 것을 관할 관서에서 제한하지 말게 하였다. 이에 태자가 꺼내 가져가는 것이 절도가 없었다. 좌서자(동궁의 정무담당) 장현소가 편지를 올렸다.

 "周의 武帝는 산동을 평정하였고, 수의 문제는 강남을 통일하고서 부지런히 검소하며 백성들을 아껴서 모두가 훌륭한 군주가 되었는데, 아들이 불초하여 끝내는 종사를 망쳤습니다.

  ⑦. 甲辰,詔自今皇太子出用庫物,所司勿爲限制。於是太子發取無度,左庶子張玄素上書,以爲︰「周武帝平定山東,隋文帝混一江南,勤儉愛民,皆爲令主;有子不肖,卒亡宗祀。〈謂天元及煬帝也。卒,子恤翻。〉

 

성상께서 전하는 친하기로는 부자이고 업무로는 집안과 나라를 겸하고 있으니 응당 써야 할 물건은 절제하여 제한해서는 안 되지만, 은혜로운 뜻이 내린 지 60일을 넘지 않아서 쓴 물자가 이미 7만을 넘었으며, 교만하고 사치가 극도에 달하였지만 누가 이것을 지나치다고 말하겠습니까?

 聖上以殿下親則父子,事兼家國,所應用物不爲節限,恩旨未踰六旬,用物已過七萬,驕奢之極,孰云過此!

 

 하물며 궁궐에 있는 올바른 인사는 아직 일찍이 곁에 없고, 여러 삐뚤어지고 음란하게 재주 피우는 사람들이 깊은 궁궐에 가까이 있는데서야! 밖에서 우러러 쳐다보아도 이미 이러한 실수가 있는데, 가운데에서 은밀한 일은 차라리 다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況宮臣正士,未嘗在側;羣邪淫巧,昵近深宮。在外瞻仰,已有此失;居中隱密,寧可勝計!〈昵,尼質翻。近,其靳翻。勝,音升。〉

 

 쓴 약은 병에 이롭고, 쓴 말은 행동에 이로운데, 엎드려 생각하건대 편안한 시기에 위태로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셔서 하루하루를 신중하게 하십시오."

 태자는 그 편지를 싫어하여 집안의 노복으로 하여금 장현소를 엿보다가 이른 아침에 비밀리 큰 말의 채찍으로 그를 쳐서 거의 죽게 하였다.

 苦藥利病,苦言利行,〈因張良之言而品節之。〉伏惟居安思危,日愼一日。」太子惡其書,〈惡,烏路翻。〉令戶奴伺玄素早朝,〈戶奴、官奴,掌守門戶。伺,相吏翻。朝,直遙翻。〉密以大馬箠擊之,幾斃。〈箠,止蘂翻。幾,居希翻,又音祁。

 

 

 ⑩. 특진 위징이 병이 들자 황상은 수조를 내려서 묻고서 말하였다.

 "며칠을 만나지 못하니 짐의 허물이 커졌다. 지금 스스로 가보려고 하지만 더욱 수고로워질까 걱정이다. 만약에 듣고 본 것이 있으면 상황을 봉함하여 들여오라."

 위징이 말씀을 올렸다.

 "근래에는 제자가 스승을 능욕하고 노비가 주인을 소홀히 하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가볍게 보니 모두가 한 것이 그렇게 될 만한 것이 있으므로, 점차로 자라나게 해서는 안됩니다."

 ⑩. 特進魏徵有疾,上手詔問之,且言︰「不見數日,朕過多矣。今欲自往,恐益爲勞。若有聞見,可封狀進來。」徵上言︰〈上,時掌翻;下上表同。〉「比者弟子陵師,奴婢忽主,下多輕上,皆有爲而然,漸不可長。」

 

 또 말하였다.

 "폐하께서 조회에 임석하셔서 항상 지극히 공정함을 가지고 말씀하시는데 물러 나와서 이를 시행하시는 것은 사사롭게 치우치는 것을 면치 못하십니다. 혹은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하고 가로질러 위엄과 노여움을 더하시며, 대개 두루 빛나게 하려고 하셔도 끝내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又言︰「陛下臨朝,常以至公爲言,退而行之,未免私僻。或畏人知,橫加威怒,〈比,毗至翻。爲,于僞翻。長,知兩翻。朝,直遙翻。橫,戶孟翻。〉欲蓋彌彰,竟有何益!」

 

 위징의 집에 마루가 없어서 황상은 작은 전각을 짓다가 중지한 재료를 가지고 이르 짓게 명령하여 닷새 만에 완성하였고, 이어서 흰색의 병풍과 흰색이 버선 그리고 궤안과 지팡이 등을 하사하여서 그를 숭상하는 것에 적합하게 하였다.

 徵宅無堂,上命輟小殿之材以構之,〈程大昌曰︰魏徵宅在丹鳳門直出南面永興坊內。〉五日而成,仍賜以素屛風、素褥、几、杖等以遂其所尚。

 

 위징이 감사하는 표문을 올리니 황상은 수조로 칭찬하였다.

 "경을 처우하는 것이 이에 이르게 한 것은 대개 백성과 국가를 위한 것이지 어찌 한 사람을 위한 것이 겠으며, 무슨 일로 지나치게 감사하는가?"

 徵上表謝,上手詔稱︰「處卿至此,蓋爲黎元與國家,豈爲一人,〈處,昌呂翻。爲,于僞翻。〉何事過謝!」

 

 

 

 ⑪. 8월 14일에 황상이 말하였다.

 "오늘날 국가에는 무슨 일이 가장 급하오?"

 간의대부 저수량이 말하였다.

 "지금 사방에서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오직 태자와 제왕들에게 분수를 정해 주는 것이 가장 급합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이 말은 옳다."

 이때에 태자 이승건은 덕을 잃었고, 위왕 이태가 총애를 받았는데, 여러 신하들은 날로 의심하는 의견을 가졌고, 황상은 이를 듣고 싫어하면서 시중을 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⑪. 八月,丁酉,上曰︰「當今國家何事最急?」諫議大夫褚遂良曰︰「今四方無虞,唯太子、諸王宜有定分最急。」〈分,扶又翻。〉上曰︰「此言是也。」時太子承乾失德,魏王泰有寵,羣臣日有疑議,上聞而惡之,〈惡,烏路翻。〉謂侍臣曰︰

 

 "바야흐로 지금 여러 신하들은 충성스럽고 곧기에서 위징을 뛰어 넘을 사람이 없으니 내가 파견하여 태자를 가르치게 하여 천하 사람들의 의심을 끊는데 이용하겠다."

 9월 4일에 위징을 태자태사로 삼았다. 위징이 병이 조금 나아지자 조당에 나아가서 표문을 올려서 사양하니 황상이 수조로 유시하였다.

 「方今羣臣,忠直無踰魏徵,我遣傅太子,用絕天下之疑。」九月,丁巳,以魏徵爲太子太師。徵疾少愈,詣朝堂表辭,〈少,詩沼翻。朝,直遙翻。〉上手詔諭以︰

 

 "주의 유왕과 진의 헌공은 적자를 내쫓고 서자를 세워서 나라를 위험하게 하고 집안을 망하게 하였다. 한의 고조는 태자를 거의 폐위시켰다가 사호에 의지한 연후에 펀안해졌다. 내가 지금 공에게 의뢰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뜻이다. 공이 병들었다는 것을 아니 누워서 글 보호해도 좋다."

 위징이 마침내 조서를 받았다.

 「周幽、晉獻,廢嫡立庶,危國亡家。〈周幽王廢太子而立褒姒之子,爲犬戎所殺,周室遂微。晉獻公廢世子,立驪姬之子,晉國大亂。〉漢高祖幾廢太子,賴四皓然後安。〈見《漢高紀》及《考異》。幾,居希翻。〉我今賴公,卽其義也。知公疾病,〈《說文》︰病,疾加也。〉可臥護之。」徵乃受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