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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雅好山水[wú yǎ hǎo shān shuǐ]/ 雨水節初候獺祭魚菜花風4日(陰1/10)庚子

solpee 2021. 2. 20. 11:08

《唐紀11 太宗 貞觀 15》 (辛丑, 641)

 

 

 

 ⑩. 태자첨사 우지녕이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기용하여 직책에 복귀하였다. 태자는 궁실을 수리하여 농사짓는 일을 방해하였고, 또 鄭과 魏의 음악(淫聲)을 좋아하여 우지녕이 간언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또 환관을 총애하여 항상 주위에 있게 하니 우지녕이 편지를 올려서 말하였다.

 ⑩. 太子詹事于志寧遭母喪,尋起復就職。〈按《會要》,武德年制,文官遭父母喪,聽去職。起復者,起之於苫塊之中而復其官職也,亦謂之奪情。〉太子治宮室,妨農功;又好鄭、衞之樂;〈治,直之翻。好,呼到翻。〉志寧諫,不聽。又寵昵宦官,常在左右,〈昵,尼質翻。〉志寧上書,以爲︰

 

 역아(아들을 죽이고 제 환공에 아부 채용되었으므로 관중이 멀리하라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가 수조와 난을 일이켜 제 환공의 시신이 구더기가 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하였다) 이래로 환관이 국가를 무너트려 망하게 한 사람이 하나가 아닙니다. 지금 전하께서 친히 이런 사람을 총애하시어 의관을 바꾸 어 입게 하여 능욕하게 하니 오래 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自易牙以來,宦官覆亡國家者非一。今殿下親寵此屬,使陵易衣冠,不可長也。」〈上,時掌翻;下同。易,以豉翻。長,竹兩翻。〉

 

 태자는 司馭(사어: 駕士말몰이꾼이 태자궁에 30명 근무)로 하여금 반년동안 나누어 당번을 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또 사사로이 돌궐의 달가우를 이끌어서 궁으로 들어오게 하니 우지녕이 편지를 올려서 간절하게 간하여쓴데,  태자가 크게 화를 내고 자객인 장사정과 홀간승기를 시켜 그를 죽이려 하였다. 두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가서 우지녕이 笘塊(점괴:부모 복 중에 거적을 笘, 흙덩어리로 만든 베개를 塊라 함)에서 잠을 자는 것을 보고 끝내 차마 죽이지 못하고 중지하였다.

 太子役使司馭等,半歲不許分番,〈太僕寺典廐署,有執馭一百人,舊番上二宮。《六典》,太子僕寺有廐牧署,有冀馭十五人,駕士三十人。〉又私引突厥達哥友入宮,〈《新書》作「達哥支」。〉志寧上書切諫,太子大怒,遣刺客張思政、紇干承基殺之。〈紇,下沒翻。〉二人入其第,見志寧寢處苫塊,〈孔穎達曰︰寢苫枕塊,謂孝子居於廬中,寢臥於苫,頭枕於塊。處,昌呂翻。〉竟不忍殺而止。

 

 

 ⑬. 황상이 직방랑중 진대덕(간첩)을 파견하여 고리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8월 10일에 고리에서부터 돌아왔다. 진대덕이 처음에 그들의 경계로 들어가서 산천과 풍속을 알고자 하여 도착하는 성읍마다 綾綺(비단)를 그 지키는 사람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나는 본디 산수를 아주 좋아하니 이곳에 명승지가 있으면 내가 이를 보고 싶소."

  ⑬. 上遣職方郎中陳大德使高麗;〈職方,掌天下地圖及城隍鎭戍烽候之數,辨其邦國之遠近及四夷之歸化,凡五方之區域,都邑之廢置,疆埸之爭訟,舉而正之。使,疏吏翻。麗,力知翻。〉八月,己亥,自高麗還。大德初入其境,欲知山川風俗,所至城邑,以綾綺遺其守者,曰︰「吾雅好山水,〈遺,于季翻。好,呼到翻。〉此有勝處,吾欲觀之。」

 

 지키던 사람은 기뻐하며 그를 이끌고 돌아다녀서 가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왕왕 중국인들을 만나자, 스스로 말하였다.

 "집은 어느 군에 있었는데 수 말년에 군대에 나왔다가 고리에 몰입되었으며, 고리에서는 떠돌아다니는 여자를 처로 삼게 하였으며, 고리 사람들과 섞여 사는데 거의 반이 될 것입니다."

 이어서 친척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를 물으면 진대덕은 그들을 속여서 말하였다.

 "모두 걱정할 것이 없소."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서로 알렸다.

 守者喜,導之遊歷,無所不至,往往見中國人,自云︰「家在某郡,隋末從軍,沒於高麗,高麗妻以遊女,〈妻,七細翻。〉與高麗錯居,殆將半矣。」因問親戚存沒,大德紿之曰︰「皆無恙。」〈紿,蕩亥翻。恙,余亮翻。〉咸涕泣相告。

 

 며칠 후에는 수 시절의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곡을 하는 사람이 郊野(교야: 도시 근교의 들과 시골의 넓은 들)에 가득하였다. 진대덕이 황상에게 말하였다.

 "그 나라에서는 고창이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고서 여관의 관리들이 부지런한 것이 보통 때보다 배나 되었습니다."

 數日後,隋人望之而哭者,徧於郊野。大德言於上曰︰「其國聞高昌亡,大懼,館候之勤,加於常數。」

 

 황상이 말하였다.

 "고리는 본래 4군의 땅(4군 즉 요동은 지금 하북의 보정 창주 북경 일원이다)일 뿐이다. 내가 졸병 수만 명을 발동하여 요동을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나라를 기울여서 이를 구원할 것이니, 별도로 수군을 파견하는데, 동래에서 출발하게 하여 바닷길로 평양(今 遼陽)을 향하여 수륙으로 세력을 합치면 그들을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산동(崤山以東)에 있는 주현이 피로해진 것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 내가 그들을 수고롭게 하려 하지 않을 뿐이다."

 上曰︰「高麗本四郡地耳,〈漢武帝置臨屯、眞番、樂浪、玄菟四郡,高麗有其地。〉吾發卒數萬攻遼東,彼必傾國救之,別遣舟師出東萊,自海道趨平壤,〈趨,七喻翻。〉水陸合勢,取之不難。但山東州縣彫瘵未復,吾不欲勞之耳!」〈觀帝此言,已有取高麗之心。瘵,則界翻。

 

*당시 遼河는 지금의 海河~子牙河~大淸河~南拒馬河이다. 따라서 白石山으로 숨은 중국군을 高麗軍이 추격하여 축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백석산이 고리영토였기에 가능하였다. 따라서 남거마하가 요하이고, 남거마하 동쪽이 요동, 서쪽이 요서이다. 현재 통감필법으로 구획된 영토는 그냥 왜곡일 뿐이다. 실질적인 지명들은 모두 이 지역임을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