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雖固南山猶有隙:남산처럼 하여도 틈이 있음./立春節末候魚上冰(얼음 밑에서 물고기 논다)望春(버들목련)風初日(陰1/2)壬辰

solpee 2021. 2. 12. 20:03

《唐紀10 太宗 貞觀 9》 (乙未, 635)

 

 

 ⑪. 7월 24일에 조서를 내렸다.

 "산릉 작업은 한의 장릉을 만들었던 고사에 의거하되 힘써 넉넉하고 후하게 하라."

 기한이 이미 촉박해져서 공사를 마칠 수가 없었다. 비서감 우세남이 상소문을 올렸다.

 "성인은 그 부친을 박장한다 하여 불효한 것은 아니며 깊이 생각하고 먼 훗날까지 염려하여 후장하는 것이 부모에게 누가 되기에 충분하니, 그러므로 만들지 않을 뿐입니다. 옛날에 장석지가 한 말이 있습니다.

 ⑪. 丁巳,詔︰「山陵依漢長陵故事,長陵,漢高祖陵也。皇甫謐曰︰長陵東西廣百二十步,高十三丈。房玄齡云,高九丈。蓋尺度之長短有古今之異也。務存隆厚。」期限旣促,功不能及。祕書監虞世南上疏,以爲︰「聖人薄葬其親,非不孝也,深思遠慮,以厚葬適足爲親之累,上,時掌翻。累,力瑞翻。故不爲耳。昔張釋之有言︰

 

 '그 안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비록 굳게 하기를 남산처럼 한다고 하여도 오히려 틈이 있게 마련입니다.' 유향은 말하였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끝까지 끝나는 일이 없지만 국가에는 피폐하거나 흥왕하는 일이 있으니 장석지의 말은 끝이 없는 계책입니다.' 그 말이 깊고 절실하며 진실로 지극한 이치에 합치됩니다.

 『使其中有可欲,雖固南山猶有隙。』見十四卷漢文帝三年。劉向言︰『死者無終極而國家有廢興,釋之之言,爲無窮計也。』見三十一卷漢成帝永始元年。其言深切,誠合至理。

 

 엎드려서 생각하건대 폐하의 성스러운 덕은 당과 우를 뛰어넘으시는데, 그러나 그 부모에게 후장을 하여서 마침내 진과 한을 본받으려고 하시니, 신은 가만히 페하를 위하여 말씀드리건대 채택하지 마십시오. 비록 다시 금과 옥을 감추지 않는다 하여도 후세에는 다만 무덤이 이처럼 큰 것만 볼 것인데 어찌 금과 옥이 없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또 지금 상복을 벗으신 것이 패릉의 예에 의거하였는데, 무덥을 만드는 것만은 홀로 장릉의 예에 의거하니, 아마도 마땅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伏惟陛下聖德度越唐、虞,而厚葬其親乃以秦、漢爲法,臣竊爲陛下不取。雖復不藏金玉,爲,于僞翻。復,扶又翻;下同。後世但見丘壟如此其大,安知【章︰十二行本「知」下有「其中」二字;乙十一行本同。】無金玉邪!且今釋服已依霸陵,用漢文帝遺詔三十七日釋服也。而丘壟之制獨依長陵,恐非所宜。

 

 엎드려 바라건대 《白虎通》에 의거하여 3仞(2丈1尺)의 봉분을 만들고, 기물을 만드는 것은 일률적으로 모두 절감하고 줄이고 이어서 돌에 새겨 능의 옆에 세우시고 따로 한 통을 써서 이를 종묘에 감추어 두어서 자손들에게 영구한 법으로 삼게 하십시오."

 상소문이 상주되었으나 회보하지 않았다.

 伏願依《白虎通》班固等述《白虎通義》六卷。爲三仞之墳,器物制度,率皆節損,仍刻石立之陵旁,別書一通,藏之宗廟,用爲子孫永久之法。」疏奏,不報。

 

 우세남이 다시 상소문을 올렸다.

 "한의 천자는 즉위하면 바로 산릉을 만들었는데 멀리는 50여 년까지 갔지만 지금은 몇 달 사이에 수십 년의 공사를 하게 되니 아마도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황상이 마침내 우세남의 상소문을 유사에게 주고 그 적당한 것을 자세히 처리하게 하였다.

 世南復上疏,以爲︰「漢天子卽位卽營山陵,遠者五十餘年;今以數月之間爲數十年之功,恐於人力有所不逮。」上乃以世南疏授有司,令詳處其宜。復,扶又翻。處,昌呂翻。

 

 방현령 등이 논의하여 말하였다.

 "한 장릉의 높이가 9丈이고 원릉의 높이는 6丈이었으니, 지금 9丈은 지나치게 높고 3仞은 너무 낮으니 청컨데 원릉의 만들어진 예에 의거하십시오."

 이를 좇았다.

 房玄齡等議,以爲︰「漢長陵高九丈,原陵高六丈,原陵,漢光武陵也。高,去聲。今九丈則太崇,三仞則太卑,請依原陵之制。」從之。

 

 

 ⑳. 11월 26일에 광록대부 소우를 특진으로 삼고 다시 참예정사하게 하였다. 황상이 말하였다.

 "무덕 6년(623) 이후로 고조께서는 폐위시키고 새로 세우는 마음을 갖고 있었으나 아직은 확정하지 않았고, 나는 형제들에게 용납되어지지 않자 실제로 공로가 상을 줄 수 없는 정도로 높게 된 것을 두려워하였소. 이 사람은 이익으로 유혹할 수 없었고 죽이겠다는 것으로 위협할 수 없었으니 정말로 사직을 위한 신하요."

 ⑳. 戊午,以光祿大夫蕭瑀爲特進,復令參預政事。蕭瑀罷預聞朝政,見上卷貞觀四年。復,扶又翻。上曰︰「武德六年以後,高祖有廢立之心而未定,我不爲兄弟所容,實有功高不賞之懼。斯人也,不可以利誘,不可以死脅,眞社稷臣也!」誘,音酉。

 

 이어서 소우에게 시를 내려주었다.

 "빠른 바람이 불어야 단단한 풀을 알겟고, 온통 무너져야 진실한 신하를 알겠구나!"

 因賜瑀詩曰︰「疾風知勁草,板蕩識誠臣。」

 

 또 소우에게 말하였다.

 "경의 충성스럽고 곧음은 옛사람이라도 넘어서지 못할 것이며, 그러나 선악이 대단히 분명하니 역시 때로는 실수도 있을 것이오."

 又謂瑀曰︰「卿之忠直,古人不過;然善惡太明,亦有時而失。」

 

 소우가 두 번 절하고 감사하였다. 위징이 말하였다.

 "소우는 많은 사람을 거스르고 외롭게 서 있지만, 오직 폐하께서 그의 충성스럽고 굳건함을 알아주시니 만약에 성스럽고 밝으신 분을 만나지 아니하였다면 화를 면하려고 하여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瑀再拜謝。魏徵曰︰「瑀違衆孤立,唯陛下知其忠勁,曏不遇聖明,求免難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