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斬吾首去:내 머리를 가져가라/大寒節中後征鳥厲疾(새매 전성기)蘭花風3日(陰12/15)乙亥

solpee 2021. 1. 26. 20:48

《唐紀6 高 武德 5》 (壬午, 622)

*.梁帝 양사도 영륭 7년, 燕王 고개도 시흥 6년, 노왕 서원랑 3년, 한동왕 유흑달 천조2년, 원수 왕마사 진통 원년, 송제 보공석 원년이다.(아직 당의 통일시대가 아닌 7국시대 이다)

 

 66. 12월17일에 전유안이 유흑달을 쳐서 이를 깨뜨리고, 그들의 莘州(山東莘縣) 자사인 맹주를 붙잡았는데, 항복한 장솔이 6천 명이었다. 이때에 산동의 호걸들은 대부분 장리들을 죽이고 유흑달에게 호응하니 위아래 사람들이 서로 시기하여 사람들은 더욱 흩어지고 원망하였었는데, 전유안은 吏民들을 坦然하여 의심하지 않으며 대우하니, 일을 말하는 사람들은 가깝고 멀고를 묻지 않고 모두 곧장 침실까지 들어와서 보고하게 하였고, 매번 이민들이게 말하였다.

 66. 甲子,田留安擊劉黑闥,破之,獲其莘州刺史孟柱,〈魏州莘縣,隋開皇十六年置莘州,大業二年廢,唐復置。〉降將卒六千人。〈降,戶江翻。將,卽亮翻。〉是時,山東豪傑多殺長吏以應黑闥,〈長,知兩翻。〉上下相猜,人益離怨;留安待吏民獨坦然無疑,白事者無問親疏,皆聽直入臥內,每謂吏民曰︰

 

 나는 너희들과 함께 나라를 위하여 도적을 막는 것이니, 진실로 마땅히 마음을 같이하여 협력하여야 할 것인데, 반드시 순종하기를 버리고 거역하는 것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다만 스스로 나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갈 것이다."

 이민들은 모두가 서로 경계하며 말하였다.

 "전공은 지성을 미루어 가지고 사람을 상대하니 마땅히 함께 죽을힘을 다하여 그에게 보답하여야 할 것이고, 반드시 빚질 수는 없다."

 「吾與爾曹俱爲國禦賊,〈爲,于僞翻。〉固宜同心協力,必欲棄順從逆者,但自斬吾首去。」吏民留相戒曰︰「田公推至誠以待人,當共竭死力報之,必不可負。」

 

 원죽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본래는 유흑달의 무리였지만 몰래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전유안이 이를 알고 그 일을 드러내지 않고 데려다가 그의 좌우에 드고 열쇠를 관리하게 하였더니, 원죽림이 감격하여 드디어 마음을 바꾸어 귀부하니 끝내 그를 거두어 채용하였다. 공로로 도국공으로 올려서 책봉하였다.

 18일에 幷州(太原) 자사 성인중이 범원을 쳐서 격파하였다.

 有苑竹林者,本黑闥之黨,潛有異志。留安知之,不發其事,引置左右,委以管鑰;竹林感激,遂更歸心,卒收其用。〈卒,子恤翻。〉以功進封道國公。

乙丑,幷州刺史成仁重擊范願,破之。〈幷,卑名翻。

 

 

 68. 황상이 수 말의 전사 가운데 대부분이 고리에 몰입되어서, 이 해에 고리왕 고건무에게 편지를 내려주고 모두 돌아오게 하였으며, 역시 주와 현으로 하여금 중토에 있는 고리 사람들을 찾게 하여 그 나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고건무가 조서를 받고 중국 백성들 가운데 앞뒤로 돌려보내 온 사람이 1만 명을 헤아렸다.

 68. 上以隋末戰士多沒於高麗,是歲,賜高麗王建武書,使悉遣還;亦使州縣索高麗人在中土者,遣歸其國。〈麗,力知翻。索,山客翻。〉建武奉詔,遣還中國民前後以萬數。

 

 

《唐紀6 高 武德 6》 (癸未, 623)

 

 

 ①. 봄, 정월 3일에 유흑달이 임명한 饒州 자사 제갈덕위가 유흑달을 잡아가지고 성을 들어서 항복하였다. 이때에 태자는 기장 유흥기를 파견하여 유흑달을 추격하게 하였는데, 유흑달은 관군의 압박을 받아서 도망하면서 쉴 수가 없었으며 요양에 도착하지만 따르는 사람은 겨우 100명이었고 대단히 주려있었다.

 ①. 春,正月,己卯,劉黑闥所署饒州刺史諸葛德威執黑闥,舉城降。時太子遣騎將劉弘基追黑闥,黑闥爲官軍所迫,奔走不得休息,至饒陽,〈饒陽縣,前漢屬涿郡,後漢屬安平國,晉、魏屬博陵郡,隋屬河間郡,唐屬深州,黑闥分置饒州。將,卽亮翻。〉從者纔百餘人,〈從,才用翻。〉餒甚。

 

 제갈덕위가 나가서 맞이하고, 유흑달을 이끌어서 성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유흑달이 할 수 없다고 하니, 제갈덕위가 눈물을 흘리며 굳게 청하였고, 유흑달은 마침내 그를 좇았다. 성 옆의 저자에 도착하여 중간에서 멈추어 쉬는데 제갈덕위가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밥 먹기를 아직 다 마치치지 아니하였는데, 제갈덕위는 군사를 챙겨가지고 그를 붙잡아서 호송하여 태자에게 갔고, 아울러 그의 동생 유십선을 洺州에서 목을 베었다.

 德威出迎,延黑闥入城,黑闥不可;德威涕泣固請,黑闥乃從之。至城旁市中憩止,〈憩,去例翻。〉德威饋之食;食未畢,德威勒兵執之,送詣太子,幷其弟十善斬於洺州。〈洺,彌幷翻。《考異》曰︰《革命記》︰「劉黑闥走至深州,崔元愻爲僞深州總管,黑闥欲至,城中陳列三千餘兵,擬納黑闥,據城拒守,北勾突厥。城人諸葛德威爲車騎,領當城之兵。有張善護者,先任鄕長,來就軍中,語三五少年曰︰『可捉黑闥取富貴,今若不捉,在後終是擾亂山東,廢我等作生活。』諸少年咸云︰『非諸葛車騎不可。』善護知德威非得酒食不肯出師,乃於家宰一肥猪,出酒一石,延德威而語之;德威許諾。黑闥至,元愻乃請之入城而不許,唯就市中遣鋪設而坐食。元愻請以城中兵呈閱,言並精銳,必堪拒守,黑闥食而許之。元愻乃召兵以呈之,德威以前領健卒出,卽就市中擒劉闥,送於洺州皇太子所。元愻與男野久奔突厥。斬黑闥於洺州城西,臨刑乃嘆」云云。今從《實錄》,亦兼采《革命記》。〉

 

 유흑달이 처형을 당하기에 이르러서 한탄하여 말하였다.

 "나는 행복하게 집에서 채소를 심고 있었는데 고아현 같은 무리들에게 오도되어서 여기에 이르게 되었구나!"

 黑闥臨刑歎曰︰「我幸在家鉏菜,爲高雅賢輩所誤至此!」

 

 

《唐紀6 高 武德 7》 (甲申, 624)

 

 

 ⑥. 2월 7일에 고리왕 고건무가 사자를 파견하여 와서 역서를 나누어 달라고 청하였다. 사자를 파견하여 고건무를 요동군(遼河의 동쪽 곧 북경일원:遼河=今海河-子牙河-東淀大淸河-大淸河-南拒馬河로 추정)왕·고리왕으로 책봉하고, 백제왕 부여장을 대방군(帶方=營州=昌黎로 추정)왕으로 삼고, 신라왕 김진평을 낙랑군(保定市 徐水區로 추정)왕으로 삼았다.

 ⑥. 丁未,高麗王建武遣使來請班曆。遣使册建武爲遼東郡王、高麗王;以百濟王扶餘璋爲帶方郡王,新羅王金眞平爲樂浪郡王。麗,力知翻。樂浪,音洛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