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尉遲敬德의 武勇:이세민의 용인술과 울지경덕의 무용/大寒節(05:40)初後鷄始乳(닭이 알을 품기 시작)瑞香花2日(陰12/9)己巳

solpee 2021. 1. 20. 04:54

《唐紀3 高 武德 2年》 (己卯, 619)

 

 

 ㊿. 사만보가 감천궁으로 진군하였다. 9월 17일에 진왕 이세민이 우무위장군 왕군곽을 파견하여 환원(하남 서북)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다. 왕세충은 그의 장수인 위은 등을 파견하여 왕군곽을 치게 하니, 왕군곽이 거짓으로 달아나면서 매복을 시켰다가 그들을 대파하였고, 드디어 동쪽으로 가서 땅을 경락하여 管城(하남 정주)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㊿. 史萬寶進軍甘泉宮。〈漢甘泉宮在京兆醴泉縣。史萬寶自新安進軍逼洛陽,不應至漢之甘泉宮。《隋志》︰河南壽安縣,後魏之甘棠縣,有顯仁宮。或者以顯仁宮爲甘棠宮也。「泉」,恐當作「棠」。〉丁丑,秦王世民遣右武衞將軍王君廓攻轘轅,拔之。〈《新志》︰洛州緱氏縣東南有轘轅故關。轘,音環。〉王世充遣其將魏隱等擊君廓,君廓僞遁,設伏,大破之,遂東徇地,至管城而還。〈《隋志》︰滎陽郡管城縣,舊曰中牟,開皇十六年,析置管城縣,十八年,省內牟入焉。隋改中牟曰內牟,時爲管州治所。將,卽亮翻;下同。還,從宣翻。〉

 

 이보다 먼저 왕세충의 장수인 곽사형과 허라한이 당의 경계를 노략질하였는데, 왕군곽이 계책으로 이들을 쳐서 물러나게 하니, 조서를 내려서 그를 위로하며 말하였다.

 "경은 13명을 가지고 도적 1만 명을 격파하니, 예로부터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제압한 것 가운데서도 아직은 없었던 일이오."

 왕세충의 위주 자사인 시덕예가 거느리고 있는 기주, 하주, 진주, 수주, 허주, 영주, 위주의 일곱 주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진왕 이세민은 편리한 대로 주현의 관리를 임명하였는데 왕세충이 임명하였던 것에 의거하였고, 바꾼 것이 없었으며, 위주를 고쳐서 남변주로 하였으며, 이에 하남의 군현들이 계속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先是,王世充將郭士衡、許羅漢掠唐境,〈先,悉薦翻。〉君廓以策擊卻之,詔勞之曰︰〈勞,力到翻。〉「卿以十三人破賊一萬,自古以少制衆,未之有也。」〈少,詩沼翻。〉

世充尉州刺史時德叡帥所部?、夏、陳、隨、許、潁、尉七州來降。〈王世充蓋置?州於雍丘,夏州於陽夏,陳州於宛丘;隨州無所考,意洧州之誤也;許州於長社,潁州於汝陰,尉州於尉氏。帥,讀曰率。降,戶江翻;下同。〉秦王世民以便宜命州縣官並依世充所署,無所變易,改尉州爲南汴州,於是河南郡縣相繼來降。

 

 유무주의 항복한 장수인 심상 등이 대부분 배반하고 떠났다. 제장들은 울지경덕을 의심히여 그를 군대 안에다가 가두었는데 행대의 좌복야인 굴골통과 상서 은개산이 이세민에게 말하였다.

 "울지경덕은 날래고 용감하며 절륜한데 지금 이미 그를 가두어서 마음으로는 반드시 원망할 것인데, 그를 남겨두면 후환이 될까 걱정이니 끝내 그를 죽이는 것과 같지 아니합니다.

 에세민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울지경덕이 만약에 배반한다면 어찌 심상보다 뒤에 하겠소?"

 劉武周降將尋相等多叛去。諸將疑尉遲敬德,囚之軍中,〈相,息亮翻。尉,紆勿翻。〉行臺左僕射屈突通、尚書殷開山言於世民曰︰「敬德驍勇絕倫,〈屈,九勿翻。驍,堅堯翻。〉今旣囚之,心必怨望,留之恐爲後患,不如遂殺之。」世民曰︰「不然,敬德若叛,豈在尋相之後邪!」〈邪,音耶。〉

 

 급히 그를 석방하도록 명령하고 그를 끌어들여 침실까지 들어오게 하여 그에게 금을 내려주고 말하였다.

 "대장부의 뜻과 기개는 서로 기대하는 것이 있는데, 작은 혐의는 마음에 두지 말고, 나는 끝내 참소하는 말을 믿고서 충성스럽고 훌륭한 사람을 해하지는 않을 것이니, 공은 의당 이를 몸에 새기시오. 반드시 떠나려고 하거든 이 금을 노자로 쓰게 하여 한동안 함께 일하였던 마음이나 표시하려는 것이오."

 遽命釋之,引入臥內,賜之金,曰︰「丈夫意氣相期,勿以小嫌介意,吾終不信讒言以害忠良,公宜體之。必欲去者,以此金相資,表一時共事之情也。」

 

 21일에 이세민이 500 명의 기병을 데리고 전장 터를 다니다가 위의 무릉성(북위 8대황 원각의 묘,북망산 소재)에 올랐다. 왕세충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인솔하고 갑자기 들이닥쳐서 그를 포위하였다. 선웅신이 삭을 이끌어 잡고 곧바로 이세민에게 달려오니 울지경덕이 말 위에 뛰어올라서 큰 소리를 지르고 옆으로 찔러 선웅신을 말에서 떨어뜨리니, 왕세충의 군사가 조금 물러났고, 울지경덕은 이세민을 보호하며 포위를 벗어났다. 이세민과 울지경덕은 다시 기병을 인솔하고 돌아가서 싸우며 왕세충의 진영을 들락날락하는데 가고 오는데 장애되는 것이 없었다.

 辛巳,世民以五百騎行戰地,〈騎,奇寄翻;下同。行視地形,可置陳處。行,下孟翻。〉登魏宣武陵。〈魏宣武陵曰景陵,在北邙山。魏世宗,諡宣武帝。〉王世充帥步騎萬餘猝至,圍之,單雄信引槊直趨世民,〈帥,讀曰率;下同。槊,所角翻。趨,七喻翻。〉敬德躍馬大呼,橫刺雄信墜馬,〈呼,火故翻。刺,七亦翻。〉世充兵稍卻,敬德翼世民出圍。世民、敬德更帥騎兵還戰,出入世充陳,往反無所礙。

 

 굴골통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계속하여 도착하니 왕세충의 군사는 대패하였고, 겨우 몸만 죽음을 면하였고, 그들의 관군장군 진지략을 사로잡고 참수한 것이 1천 여 급이었으며, 창과 방패를 든 군가 6천명을 잡았다. 이세민이 울지경덕에게 말하였다.

 "공은 어찌 보답하는 것이 빠르시오?"

 울지경덕에게 금을 한 궤짝 내려 주었다. 이로부터 총애하고 대우하는 것이 날로 융성하였다.

 屈突通引大兵繼至,世充兵大敗,僅以身免;擒其冠軍大將軍陳智略,〈陳,讀曰陣;下同。冠,古玩翻。《考異》曰︰《實錄》︰「丙戌,太宗與世充相遇於魏宣武陵,擊大破之,斬數千級,獲陳智略。」《舊書‧敬德傳》︰「太宗旣釋之,是日從獵於榆窠,世充引步騎數萬來戰,單雄信直趨太宗,敬德刺雄信墜馬,翼太宗出圍,更帥騎兵交戰,擒陳智略。」據擒智略,則宣武、榆窠之戰,共是一事也。《實錄》據奏到日。《河洛記》在二十一日,今從之。〉斬首千餘級,獲排矟兵六千。〈排矟,言執排執矟者也。矟,與槊同。〉世民謂敬德曰︰「公何相報之速也!」賜敬德金銀一篋,〈篋,苦協翻。〉自是寵遇日隆。

 

 울지경덕은 槊(矟同:기병용 1장8척~1장6척, 창날 50~60cm창)을 잘 피하였는데, 매번 혼자 말을 타고 적진 속으로 들어가니 적의 빽빽한 삭이 그를 찔렀지만 끝내 다치게 할 수 없었고, 또 적의 삭을 탈취하여 도리어 그들을 찌를 수 있었다. 제왕 이원길은 말을 타고 삭을 잘 다룬다고 자부하여는데, 울지경덕이 능력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각기 창날을 떼어내고 승부를 비교하자고 청하였다. 울지경덕이 말하였다.

 "저 울지경덕은 삼가 이것을 떼어 버리겠지만 왕께서는 떼어 버리지 마십시오."

 敬德善避矟,每單騎入敵陳中,敵叢矟刺之,終莫能傷,又能奪敵矟返刺之。〈刺,七亦翻。〉齊王元吉以善馬矟自負,聞敬德之能,請各去刃相與校勝負,敬德曰︰「敬德謹當去之,王勿去也。」

 

 이미 그렇게 하고 이원길이 그를 찔렀지만 끝내 적중시킬 수가 없었다.

 진왕 이세민이 울지경덕에게 물었다.

 "삭을 빼앗는 것과 삭을 피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어렵소?"

 울지경덕이 답하였다.

 "삭을 빼앗는 것이 어렵습니다."

 마침내 울지경덕에게 제왕의 삭을 빼앗도록 명령하였다. 이원길이 삭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뛰어나가니 속으로 그를 찌르려고 하였는데, 울지경덕이 잠깐 사이에 그의 삭을 세 번이나 빼앗으니, 이원길은 비록 얼굴을 대하고는 탁월함을 탄복하였지만 속으로는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旣而元吉刺之,終不能中。〈去,羌呂翻。中,竹仲翻。〉秦王世民問敬德曰︰「奪矟與避矟,孰難?」敬德曰︰「奪矟難。」乃命敬德奪元吉矟。元吉操矟躍馬,志在刺之,〈操,七刀翻。〉敬德須臾三奪其矟;元吉雖面相歎異,內甚恥之。

 

 

 57. 두건덕이 유주를 포위하면서 이예가 고개도에게 급한 상황을 알리니, 고개도는 2천의 기병을 인솔하고 이를 구원하였는데, 두건덕의 군사가 이끌고 떠나버렸으니,  고개도는 이예를 통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하였다.

 10월 19일에 고개도를 울주(今 陽曲縣)총관으로 삼고 이씨라는 성을 내려주었으며 북평군왕으로 책봉하였다.

 57. 竇建德之圍幽州也,是年五月,建德兵攻幽州。李藝告急于高開道,開道帥二千騎救之,建德兵引去,開道因藝遣使來降。帥,讀曰率。騎,奇寄翻。使,疏吏翻。降,下江翻。戊申,以開道爲蔚州總管,蔚州,隋鴈門郡之靈丘、上谷郡之飛狐縣地。蔚,紆勿翻。賜姓李姓,封北平郡王。

 

 고개도는 화살촉이 뺨에 박혀서 의원을 불러서 이를 뽑게 하였는데, 의원이 말하였다.

 "화살촉이 깊이 박혀서 뽑아낼 수 없습니다."

 고개도는 화가 나서 그를 목 베었다. 따로 한 의원을 불렀더니 말하였다.

 "이를 뽑으려면 대단히 아픕니다."

 또 그 목을 베었다. 다시 한 의원을 부르니 의원이 말하였다.

 "뽑을 수 있습니다."

 마침내 뼈를 뚫고 그 사이에 쐐기를 박으니 뼈가 1 촌이 좀 넘게 갈라졌고, 끝내 그 촉을 뽑았는데, 고개도는 기녀에게 연주하게 하고 먹을 것을 올리라고 하며 그치지를 않았다.

 開道有矢鏃在頰,召醫出之,醫曰︰「鏃深,不可出。」開道怒,斬之。別召一醫,曰︰「出之恐痛。」又斬之。更召一醫,醫曰︰「可出。」乃鑿骨,置楔其間,楔,先結翻。骨裂寸餘,竟出其鏃;開道奏妓進膳不輟。妓,渠綺翻。

 

 *.北平: 《周勃世家》:追至長城,定上谷十二縣,右北平十六縣,遼西、遼東二十九縣,漁陽二十二縣。
《地理志》(略去自注):右北平郡,戶六萬六千六百八十九,口三十二萬七百八十。縣十六:平剛,無終,石成,廷陵,俊靡,薋,徐無,字,土垠,白狼,夕陽,昌城,驪成,廣成,聚陽,平明。
《魏志·田疇傳》:舊北平郡治在平岡,道出盧龍,達于柳城;自建武以來,陷壞斷絕,垂二百載,而尚有微徑可從。今易縣, 玉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