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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통의 독립과 이원길의 실패 /小寒節末候雉始雊水仙風2日(陰12/4)甲子

solpee 2021. 1. 16. 16:55

《唐紀3 高 武德 2年》 (己卯, 619)

 

 

 77. 이자통은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국호를 '오'라 하고 연호를 '명정'이라고 고쳤다. 단양의 도적 우두머리인 낙백통이 무리 1만여를 인솔하고 그에게 항복하니 이자통은 그를 좌복야로 삼았다.           

 77.  상략....子通入江都,因縱擊綸,大破之,伏威亦引去。子通卽皇帝位,國號吳,改元明政。丹陽賊帥樂伯通帥衆萬餘降之,〈丹陽郡,隋初之蔣州。賊帥,所類翻。通帥,讀曰率。降,戶江翻。〉子通以爲左僕射。

 

 

 

 79. 배적이 개휴에 도착하니 송금강이 성을 점거하고 이를 막았다. 배적은 도색원에 진을 치고 군영 안에서는 시냇물을 먹었는데 송금강이 이를 끊자 사졸들릉 목이 말랐다. 배적이 군영을 옮겨서 물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니 송금강이 군사를 풀어서 그들을 치자, 배적의 군사들은 드디어 붕궤되고 잃어버리고 죽고 하여 거의 다 없어졌는데, 배적은 하룻밤 하루 낮 동안 말을 달려서 진주에 도착하였다.

 79. 裴寂至介休,〈介休,漢古縣,因介子推介山而名,時爲介州。〉宋金剛據城拒之。寂軍于度索原,營中飲澗水,金剛絕之,士卒渴乏。寂欲移營就水,金剛縱兵擊之,寂軍遂潰,失亡略盡;寂一日一夜馳至晉州。

 

 ................중략...........

 先是,劉武周屢遣兵攻西河,浩州刺史劉贍拒之,〈浩州,隋之西河郡。先,悉薦翻。贍,而豔翻。〉李仲文引兵就之,與共守西河。及裴寂敗,自晉州以北城鎭俱沒,唯西河獨存。姜寶誼復爲金剛所虜,謀逃歸,金剛殺之。〈復,扶又翻。〉裴寂上表謝罪,〈上,時掌翻。〉上慰諭之,復使鎭撫河東。〈劉文靜淺水原之敗,貶落不偶以至於誅;裴寂度索原之敗,位任如故:唐高祖以賞罰馭臣,上下其手矣。〉

 

 유무주가 나아가서 병주(幷州:太原)를 압박하니 제왕 이원길이 그의 사마인 유덕위를 속여서 말하였다.

 "경이 늙고 약한 사람들을 가지고 성을 지키면 나는 강한 군사를 가지고 나가서 싸우겠소."

 9월 16일에 이원길이 밤중에 출병하였는데, 그의 처를 데리고 주를 포기하고 달아나서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원길이 처음 떠나는데, 유무주의 군사들은 이미 성 아래에 도착하였고, 진양의 토호인 설심이 성을 가지고 유뮤주에게 받게 하였다. 황상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가 나서 예부상서 이강에게 말하였다.

 劉武周進逼幷州,齊王元吉紿其司馬劉德威曰:「卿以老弱守城,吾以強兵出戰。」辛巳,元吉夜出兵,攜其妻妾棄州奔還長安。〈紿,蕩亥翻。還,從宣翻。〉元吉始去,武周兵已至城下,晉陽土豪薛深以城納武周。上聞之,大怒,謂禮部尚書李綱曰:

 

 "원길은 어리고 약하며 지금 해야 할 일을 익히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두탄과 우문흠을 파견하여 그를 보필하게 하였다. 진양에는 강한 군사가 수만이고 식량도 10년은 지탱할 곳이고 왕을 일으큰 터전인데 하루아침에 이를 버렸다. 듣건대 우문흠이 이 획책을 먼저 획책하다니 내가 그의 목을 베어야 마땅할 것이다."

 「元吉幼弱,未習時事,故遣竇誕、宇文歆輔之。〈歆,許今翻。〉晉陽強兵數萬,食支十年,興王之基,一旦棄之。聞宇文歆首畫此策,我當斬之!」

 

 이강이 말하였다.

 "왕께서는 나이가 어리고 교만하여 안일하기만 하였는데, 두탄이 일찍이 규제하고 간하는 일이 없었고, 또 그것을 덮어버렸으므로 사민들로 하여금 분하고 원통하게 하였으며, 오늘의 실패는 두탄의 죄입니다. 우문흠이 간하였으나 왕은 고치지 않았고 얼마 안 있다가 모두 상주문으로 보고하였으니 충성스러운 신하인데 어찌 죽일 수 있습니까?"

 綱曰:「王年少驕逸,竇誕曾無規諫,又掩覆之,〈少,詩照翻。覆,敷又翻。〉使士民憤怨,今日之敗,誕之罪也。歆諫,王不悛,尋皆聞奏,〈事見上二月。悛,丑緣翻。〉乃忠臣也,豈可殺哉!」

 

 다음날 황상은 이강을 불러 들어오게 하고 어좌에 올라 말하였다.

 "내가 공을 얻고서는 드디어 형벌을 함부로 내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원길이 스스로 훌륭하지 못한 짓을 하였으니, 두 사람이 금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울러 두탄을 사면하였다. 위위소경 유정회가 태원(병주)에 있다가 유무주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유정회는 비밀리에 표문을 올려서 유무주의 형세를 설명하였다.

 明日,上召綱入,升御座曰:「我得公,遂無濫刑。元吉自爲不善,非二人所能禁也。」幷誕赦之。衞尉少卿劉政會在太原,爲武周所虜,政會密〈【章:十二行本「密」下有「遣人奉」三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表論武周形勢。

 

 유무주는 병주를 점거하고 송금강을 파견하여 진주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고 우교위대장군 유홍기를 포로로 잡았으나 유홍기는 도망하여 돌아왔다. 송금강은 나아가서 강주를 압박하고 용문을 함락시켰다.

 武周據太原,遣宋金剛攻晉州,拔之,虜右驍衞大將軍劉弘基,〈驍,堅堯翻。〉弘基逃歸。金剛進逼絳州,陷龍門。〈宋白曰:絳州,晉都,《左傳》所謂新田也。後周武成二年,置絳州。龍門,漢皮氏縣也,後魏改爲龍門縣,隋、唐屬蒲州。

 

 

 81. 예부상서 이강이 태자첨사의 업무를 관장하게 되니, 태자 이건성은 비로소 그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오래 있다가 태자는 점차로 소인들과 친하게 지내고 진왕 이세민의 공로가 높은 것을 아파하여 자못 시기하게 되었는데, 이강이 여러 차례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마침내 해골하기를 빌었다.

 81. 禮部尚書李綱領太子詹事,《漢書‧百官表》:詹事,秦官,掌皇后、太子家。應劭云:詹,省也,給也,言給事太子家。晉、宋及後魏用人漸重,北齊總東宮內外衆事,無大小皆統之。後周置太子宮正、宮尹;隋復置詹事;唐統東宮三寺、十率府之政令。太子建成始甚禮之。久之,太子漸昵近小人,昵,尼質翻。近,其靳翻。疾秦王世民功高,頗相猜忌;綱屢諫不聽,乃乞骸骨。

 

 황상이 그에게 욕하며 말하였다.

 "경은 하반인(서역상인)의 장사였는데, 마침내 짐의 상서가 된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가? 또 바야흐로 경으로 하여금 이건성을 보도하게 하였는데 굳이 떠나가겠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이강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하반인은 도적입니다. 매번 망령되게 사람을 죽이고자 하여 신이 그것을 간하면 바로 중지하여서 그의 장사가 되었을 때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창업을 하신 밝은 주군이고, 신이 재주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말하는 것은 마치 물을 돌에 떨어뜨리는 것과 같았고, 태자에게 말하여도 그러한데, 신이 어떻게 감히 오래 천대(천자의 상서대)를 더럽히고, 동조(동궁)를 욕되게 하겠습니까?"

 上罵之曰:「卿爲何潘仁長史,乃恥爲朕尚書邪!長,知兩翻。邪,音耶。且方使卿輔導建成,而固求去,何也?」綱頓首曰:「潘仁,賊也,每欲妄殺人,臣諫之卽止,爲其長史,可以無愧。爲長史事見一百八十四卷義寧元年。陛下創業明主,臣不才,所言如水投石,〈言以水投石,雖沾濕而不能受水。言於太子亦然,臣何敢久汚天臺、辱東朝乎!」天臺,謂尚書省。東朝,謂東宮。汚,烏故翻。朝,直遙翻。

 

 황상이 말하였다.

 "공이 곧은 선비라는 것을 아니 힘써 남아서 내 아이를 보필해 주시오."

 23일에 이강을 태자소보로 삼고 상서와 첨사는 옛날 그대로 하게하였다. 이강이 다시 편지를 올려서 태자가 술을 마시면서 절제가 없고, 아첨하고 이간하는 말을 믿고 골육을 멀리 한다고 간언하였더니, 태자는 기뻐하지 아니하고 하는 짓은 여전하였다. 이강은 우울하고 답답하여 뜻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 해에 굳게 늙어 병이 들었다고 말하고 사직하겠다고 하니 상서의 직책을 풀어주고 여전히 태자소보로 삼았다.

 上曰:「知公直士,勉留輔吾兒。」戊子,以綱爲太子少保,尚書、詹事如故。少,始照翻。綱復上書諫太子飲酒無節,及信讒慝,疏骨肉;復,扶又翻;下同。上,時掌翻。慝,吐得翻。太子不懌,而所爲如故。綱鬱鬱不得志,是歲,固稱老病辭職,詔解尚書,仍爲少保。